모년 11월에 기응도(奇應度)가 인척(姻戚) 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를 전하고 내년 3월의 만남을 기약한 내용의 편지이다. 한 달 전 하인이 가져온 편지로 그간에 편지가 잘 전달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이어 기응도 본인의 안부를 전하기를, 자신은 집으로 돌아와 차를 다려 마시며 날을 보내고 있는데, 매번 눈이 개고 새벽달이 밝을 때 형이 준 시(詩)를 읽다가, '지금 세상에서 지사(志士)의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라는 구절에 이르면 울음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리운 마음을 전했다. 어느 때나 이광수가 거처하는 매오당(梅五堂)에서 마음껏 술 마시며 놀 수 있느냐고 하며 만남을 고대하기도 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듣기를, 이광수가 요사이 은거하는 동지 6~7명과 함께 산방(山房)에서 고인의 책 천만 권을 읽고 있으며, 때때로 담양(潭陽)의 빼어난 명산을 소요하고 계시다고 하는데, 장성(長城) 하사(河沙)에 사는 기원직(奇元直)이 함께하지 못함이 한이 되진 않느냐며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이광수에 대한 그리움으로 좋은 술 만곡(萬斛)을 먹어도 더운 배 속을 채울 수 없다고 하며 재차 만남을 기원하는 뜻을 전하며, 내년 봄 3월에 봄풀이 우거지고 강 버들 가늘어지면 한번 만나자고 청했다. 이광수에게 약속을 어기지 말라고 당부하고 자신은 날마다 이 만남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고서 눈 내리는 추위 속에서 독서 하며 아프지 말라고 염려하였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