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4년(갑진년) 12월에 朴相堯, 文永伯, 李應奎 등 31명이 연명하여 綾州牧使에게 올린 上書이다.
상서를 올려 요청하는 사항은 裵以仁과 그의 弟嫂인 南平文氏의 효성이 지극하니 이들이 褒賞을 받을 수 있게 조치해 달라는 것이다.
상서 본문 서두에서 먼저 지방 수령이 효도한 백성을 포상하는데 힘써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董夫子의 뛰어난 행실은 刺史가 천거해 주지 않음으로써 天子가 그 명성을 듣지 못하였고, 東海의 孝婦의 극절한 절개는 于公이 보고하지 않아 太守는 그 실상을 알기 어려웠습니다.1)1) 東海孝婦 : 『說苑』 제5편 貴德에 東海郡에 사는 孝婦의 일화가 실려 있다. 그 효부는 과부가 되어서도 재가하라는 시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고 성심껏 봉양하였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이것이미안하여 목을 매고 죽었다. 이에 시누이가 송사를 하였는데, 太守의 문초를 이기지 못하고 거짓 자백을 하고 사형을 받았다. 고을 獄吏인 于公은 이를 힘써 변명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또 정숙함을 되짚어 아름다움을 포상함은 국가의 밝은 법이니, 숨어 있는 바를 밝히고 버려진 바를 드러냄은 곧 합하의 인자한 政事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그 포상 받을 사람의 인적사항과 효행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본 고을의 士人인 裵以仁은 太師 密直公 裵廷芝(1259~1322) 후손이며, 효행으로 추천받아 참봉을 지낸 裵允德의 5세손입니다. 그리고 忠과 孝烈이 면면히 전해지고 있는 집안입니다. 그의 어머니 光山 金氏는 임진왜란 공신인 忠壯公의 후손이고, 경신년생으로 올해 향년이 105세입니다. 말과 정신이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으니 역시 효도로 봉양한 영향이 아니겠습니까. 그 아들인 배이인은 나이가 91인데 그 부모를 色養하고 있으니 이 어찌 고금에 드문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임오년 한겨울에 그의 어머니가 불행히도 학질에 걸렸는데, 늘 산삼을 원하면서 그러면 내 병이 잘 낫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동생 裵以潑과 더불어 추운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눈과 서리를 밟으며 찾아다녔으나, 끝내 캐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하면서, '내가 정성이 있었으면 하늘이 어찌 감응함이 없겠는가.'라고 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오는 길에 다행히 산삼 한 뿌리를 찾아내었고, 급히 캐서 집으로 돌아와 한 차례 다려 드렸더니, 그 질병이 고쳐졌습니다. 또 경자년 봄에는 癘疫이 막 치성하여 온 집안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의 동생 裵以潑의 처인 文氏은 또한 시어머니를 효도로 봉양하였지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메추라기가 부엌 아궁이에 날아 들어와서, 이를 반찬으로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어찌 하늘이 감응한 정성이 아니겠습니까. 한집안 안에서 효자와 효부가 함께 나왔으니, 누가 감히 흠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裵以仁과 그의 동생인 裵以潑의 처 文氏 효성을 강조하고, 이어서 "저희는 같은 고을에 살면서 이미 깊이 심복하고 있습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이들이 褒賞을 받은 은전을 입을 수 있도록 임금께 轉報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능주목사는 처결을 9일에 내리길, "한집안 안에도 효자와 효부가 있으니 더욱 극히 가상하다. 轉報에는 시기가 있으니 물러나 公議를 기다림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