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7년(영조 23)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4호(四戶)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창윤(白昌潤)이 작성하여 영암군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장전리는 오늘날의 영암군 장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작성 당시 호주(戶主) 백창윤은 27세로, 처(妻) 김씨(金氏)(27)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백경옥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김씨의 본관은 김해(金海)였다. 백창윤의 부(父)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백민징(白敏徵)이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이 가선대부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의 종2품 품계로 초기에는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하였다. 이때 백민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조부는 백신헌(白信憲), 증조부는 백상원(白尙源), 외조부는 김시호(金時豪)로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호주 백창윤의 처 김씨의 부는 수용(壽龍), 조부는 린(璘), 증조부는 귀찬(貴㜺), 외조부는 장(壵)으로 인동(仁同)이 본관이다.
문서의 끝 부분에 이 집안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28살 먹은 계집종 신량이 있었지만 지난 병인년에 도망가고 없었다. 조선시대의 호적에는 이처럼 도망을 간 노비들의 이름도 반드시 기입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있을 지도 모르는 노비의 소유권 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호구단자의 맨 끝에는 "甲子戶口相凖"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이때 작성된 호구단자를 갑자년, 즉 1744년의 호적과 대조하였다는 의미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호구단자를 보면, 백창윤의 부 백민징과 아들 백경옥, 손자 백사형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