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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년 방해득(房海得)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 내용분류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 작성주체 발급자 : 박상수(朴尙洙) / 수취자 : 방해득
· 작성시기 乾隆三十六年辛卯十月十五日 (1771)
· 작성지역 전북 부안군
· 형태사항 크기 : 33.0 X 41.3 / 서명 : [着名] 3개
· 소장처 현소장처 :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 원소장처 :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정의

1771년(영조 47) 10월 15일 박상수(朴尙洙)방해득(房海得)에게 논과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해제
1771년(영조 47) 10월 15일 박상수(朴尙洙)방해득(房海得)에게 논과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박상수는 몸이 아파서 약값으로 돈이 많이 들어가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부득이하게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동문(東門) 바깥쪽 선은동(僊隱洞) 전평(前坪) 지자답(地字畓) 3두락지(斗落只)와 밭 1두락지로 부수(負數)로는 13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박상수는 구문기(舊文記) 1장(丈)과 신문기(新文記)를 매수인(買受人) 방해득에게 넘겨주었다.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관(官)에 가져가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답주(畓主) 박상수와 증인(訂人) 송순봉(宋順奉), 집필(執筆) 이춘우(李春遇)가 참여하여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원문텍스트
<연도>乾隆三十六年辛卯十月十五日<인명>房海得前 明文
右明文事段矣身累月身病呻吟故藥債
許多故不得己自己買得東門外<지명>仙隱洞
前坪地字畓三斗落只又田一斗落只所耕
十三負㐣價折錢文十兩依數捧是
遣右人前本文記一丈永永放賣
爲去乎日後子孫卞若有言端持
此文記告官卞呈事
畓主 <인명>朴尙洙[着名]
證人 <인명>宋順奉[着名]
筆執 <인명>李春遇[着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