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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상서(上書) 2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 내용분류 국왕/왕실-보고-상서
· 작성주체 발급자 : 기지방화민 원복철 원복흥 등 57인 / 수취자 : 남원부사
· 작성시기 壬午九月 (1822)
· 작성지역 전북 남원시
· 형태사항 크기 : 110.4 X 77.5 / 서명 : [署押] 1개, [官印] 3개 / 인장 : 7.0*7.0(정방형) 적색 3개
· 소장처 현소장처 :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 원소장처 :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정의

1822년(순조 22) 9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57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

해제
1822년(순조 22) 9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57명이 같은 고을에 사는 동몽(童蒙)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조정에 알려 포양(褒揚)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면서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인필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5월에는 모친이 단독증(丹毒症)으로 온몸이 부풀어 올라 사람들이 모두 체념하고 있었는데, 박인필은 변함없이 모친의 병간을 지극 정성으로 하여 마침내 차도가 있게 되었다. 남원의 유생들은 어린 박인필의 효행이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되기에 공의(公議)를 모아 성주에게 상서를 올리니, 이러한 박인필의 행적을 위에 알려 포양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남원부사는 이에 대해 참으로 가상하다면서 포양지전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한 상서는 이 문서 외에도 몇 건이 더 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박인필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이다. 또 박인필 뿐만 아니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도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원 기지방의 유생들은 같은 해 5월에도 거의 같은 내용의 상서를 남원부사에게 올렸었다. "1822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상서(上書) 1"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문서의 소장처인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이를 1882년으로 추정하여 문서에 연필로 그렇게 써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위 박인필(朴仁弼)의 효행과 관련하여 작성된 상서들이 모두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위 임오년1882년이 아니라 1822년으로 추정되며, 효행 관련 문서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고("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 효행 관련 통문이나 상서들이 17세 동몽(童蒙) 박인필을 언급하고 있다. 즉 부친이 죽기 직전의 박인필이 동몽으로 어린 나이였고, 그 시기를 명문에서는 도광 4년으로 명기하고 있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