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열람
  • 디렉토리열람
  • 유형분류
  • 최전우(崔銓宇) 염수재기(念修齋記)

최전우(崔銓宇) 염수재기(念修齋記)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문서-시문류-기
·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기
· 작성주체 발급자 : 최전우(崔銓宇)
· 작성시기
· 작성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 형태사항 크기 : 29.8 X 44.2
· 소장처 현소장처 : 부안 연곡리 유절재 / 원소장처 :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정의

최전우가 염수재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

해제
최전우(崔銓宇)전북 전주 토정리 명학동에 지은 염수재(念修記)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이다. 이곳은 지금 전북 완주군 소양면 분토동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곳 주덕산(周德山)은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세장지(世葬地)로,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을 비롯하여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 등 현조들의 묘가 있는 지역이다. 재실 주덕재(周德齋)도 이곳에 있다. 그런데도 이와는 별개로 재실을 지어 염수재라는 편액을 단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기문의 저자 최전우는 영현(英顯)과 장광(莊光) 때에 현달했지만 돌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선조들의 깊은 뜻을 살펴보라고 하였다. 원문의 '영현(英顯)'의 영(英)은 세종(世宗)의 영릉(英陵)을, 현(顯)은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을 가리킨다. 최광지는 세종대에 집현전 제학까지 올라가 장래가 총망되었지만 기미를 미리 알아채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단종의 축출과 세조대의 비유교적인 정치를 미리 예감했던 것이다. 최광지의 동생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와, 최광지의 아들 옹암공(甕菴公) 최생명(崔生明)도 마찬가지였다. 부친 또는 형의 명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송애의 탁월한 선견(先見)에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세속적인 명리를 추구하다가 단종대와 세조대에 패가망신한 사람들과 가문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니 전주최씨의 오늘이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선대의 올바른 처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문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시경󰡕 〈문왕(文王)〉에서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毋念爾祖 聿修厥德]"라고 한 것을 후손들은 깊이 새겨야 한다고 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재실의 이름 '염수(念修)'가 나왔으니, 후손들이 반드시 선조의 덕을 항상 생각하며 닦으라는 것이 이 기문의 내용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적혀 있지 않지만, 문서의 작성자인 최전우(崔銓宇), 일명 최재영(崔再榮)은 류절재에 소장된 문서 중 '1931년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거호금수봉책(醵戶金收捧冊)'에서 연명인(聯名人)의 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리고 역시 류절재 소장 문서의 하나인 또다른 염수재기에 따르면 간지가 '辛'자인 해에 염수재를 건설한 것으로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해는 신미년, 즉 1931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문서도 염수재가 건설된 1931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텍스트
念修齋記 土亭里鳴鶴洞齋室
全州周德山寔吾崔氏世葬之域而月塘府君以下墓位在於此所已有
齋而扁之以周德繼之而有松崖府君墓旣有周德則不別爲齋可也雖有齋
而總之爲周德不別爲扁亦可也今必別爲齋而別爲念修之扁者何哉爲岡陵
溪谷之少間於周德而然歟曰非也周德所同也念修所獨也爲別其分派之
祖而然歟亦非也府君以月塘肖胤仕於 英顯盛際爲集賢殿提學
眷方隆若將有爲而知幾而退翛然長往繼是而季弟烟村公及府君之胤子
甕菴公次第退歸不及於難府君之退固自爲明哲而烟村甕菴公之退雖未
知其先府君之有命與否亦不可不謂府君之先見有以啓導之也盖在 莊
光之世幸禍貪利▣(利)身拂靑紫爲世唾鄙爲後孫恥辱者固不足道至於盡忠立
節名耀史策者亦多不免一家一門之禍▣▣(然則)然則府君之明哲固不失爲出處
之正而崔氏之有今日皆公之賜也豈不盛歟所以別爲齋而扁之以念修者也詩
曰毋念爾祖聿修厥德扁齋之義盖取諸此而念修非二事念祖可修德修德
可念祖入此齋者必顧名思義念先祖之德修之而勿替則庶幾哉以是書之
與諸宗勖之 十四世孫銓宇一名再榮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