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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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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 아무개에게 보냄【승지공파(承旨公派) 여러 족인들을 대신하여 씀】(與吳某 代承旨公派諸族人作○甲子)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8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8.TXT.0030
오 아무개에게 보냄【승지공파(承旨公派) 여러 족인들을 대신하여 씀】
좌하가 진사 김용승에게 답한 편지를 보니, "《율곡집》에는 증(贈) 승지(承旨) 김공(金公) 묘갈(墓碣)이 있는데, 《전서》에는 어찌하여 대비(大碑 신도비)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어서 본손(本孫)이 근세에 갈을 고쳐 비를 세우고 다시 선사께 갈문을 청하였다. 그러자 선사는 그 비가 온당치 않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유영선(柳永善)이 곁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그 일을 자세히 안다.……"라고 하였습니다. 도승지 김공은 곧 저희의 선조입니다. 좌하와 김 진사는 모두 저희 집의 선조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무엇 때문에 이를 언급했는지 그 이유를 비록 알 수 없지만, 좌하가 비를 못마땅해 한 글이 팔도에 퍼져서 누구나 보고 듣게 되었으니, 어찌 후손으로서 개탄하는 한 마디 질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좌하는 잘 살펴주기를 바랍니다. '이에 신도비를 세운다.[爰樹神道碑]'라는 한 구문은 이미 저희 선조의 비 원문(原文)에 있는 것입니다. 원문이란 것은 지은 자의 수필(手筆)에서 나온 것으로, 제목(題目)의 경우 혹 후인들이 고치기도 하는 것과는 비교될 것이 아닙니다. 《율곡전서》에 수록된 우리 선조의 신도비는 곧 율곡 선생이 손으로 정한 철안입니다. 좌하가 근거한 《율곡집》은 어느 본을 가리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도암전서(陶庵全書)》주 112) 범례에는 이미 "우암(尤庵)은 전집과 후집을 모두 병통으로 여겨 이를 정리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전서》를 고쳐서 바로잡는데 있어 어찌 율옹(栗翁)의 수필을 버리고 우옹(尤翁)이 병통으로 여긴 것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본손 또한 어찌 율곡의 수필(手筆)과 우암의 유의(遺意)와 도암의 수정(手正)를 어길 수 있겠습니까? 존선사(尊先師)가 신도비가 온당치 않다고 하여 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대의 말이 더욱 근거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저희 집안의 장로가 거듭 묘표(墓表)를 청했을 때, 존선사는 일찍이 조금이라도 신도비를 온당치 않게 여긴 뜻이 없었으며, 심지어 최연촌(崔烟村) 형제의 비문도 전후로 의심치 않고 지었다고 합니다. 만약 저희 집안에는 국법을 지키고, 최씨 집안에는 국법을 파괴하며, 본손에게는 은밀히 숨기고 문인에게는 사사로이 말했다면 군자의 언행일치(言行一致)하고 표리교정(表裏交正)하는 학문이 결단코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지난번 편지로 유우(柳友)에게 물었더니, 과연 "온당치 못하여 허락하지 않았다.[未安不許]" 네 글자는 이제야 처음으로 듣는다."고 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좌하가 자신의 견해를 스스로 세우는데 급급하여 자신도 모르게 말을 지어내어 선사를 무함한 것입니다. 저희는 일찍이 좌하가 인의(認意)와 인교(認敎)로 존선사를 무함하여 공의(公議)에 대단히 용납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아무개도 사람인데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겠는가. 이는 분명히 가혹한 책망이다."라고 생각하였는데, 비로소 그것이 믿을 만한 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곡이 직접 쓴 신도비에 대해서 좌하는 마치 없는 것처럼 보았고, 우암이 병통으로 여긴 것에 대해서 좌하는 본집은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도암이 정리해서 바로잡은 것에 대해서 좌하는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저희가 생각하기에, 좌하는 단지 존선사를 무함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로 율곡, 우암, 도암 세 선생까지 무함한 것입니다. 저희는 선조의 일과 관련된 까닭에 촉범(觸犯)을 피하지 않고 모두 진술하다 보니 이에 이르렀습니다. 명백히 회신하여 가르쳐주기를 바랍니다.
주석 112)《도암전서(陶庵全書)》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이이(李珥)의 〈율곡집(栗谷集)〉을 〈율곡전서(栗谷全書〉로 증보, 편찬한 책을 말한다.
與吳某 代承旨公派諸族人作○甲子
竊見座下答金進士容承書,有曰: "《栗谷集》有贈承旨金公墓碣,《全書》 不知何爲大碑,而本孫近世改碣竪碑,復以請碣於先師。先師謂其碑未安而不許之。柳永善侍側,詳知其事云云。" 都承旨金公,卽鄙等之先祖也。座下與金庠,俱無關於鄙家祖先,其往復源委之何以及此,雖未可知,座下彈碑之文,飛滿八域,聞見所及,豈非後昆之慨痛一言之質出於不得已者? 幸座下察焉。夫"爰樹神道碑"一句,旣著於鄙先碑原文,原文者出於撰人之手筆,而非題目之容有後人翻改者比也。懸知?栗谷全書?所載鄙先神道碑,乃栗谷先生之手定鉄案也。座下所據?栗谷集?,未知指何本。然?陶庵全書?凡例,旣曰"尢庵俱病於前後集,以不能釐正爲恨"云,則其於?全書?之改正也,安得舍栗翁手筆而取尢翁之所病也? 本孫亦安得以違栗谷手筆、尢庵遺意、陶庵手正也耶? 尊先師之以神碑未安而不許碣者,座下之言尢屬無據。鄙門長老之再三請墓表也,尊先師未嘗有一毫未安神碑之意,至於崔烟村兄弟之碑,又前後不疑而作之云。若謂守典於鄙家而破典於崔門,隱諱於本孫而私語於門人,決知君子言行一致、表裏交正之學不如此。故向以書問于柳友,則果以"未安不許四字,今始創聞"見答。此座下急於自立己見,而不覺造言而誣師也。鄙等曾聞座下以誣尊先師以認意、認敎,大不容於公議。然私竊以爲"某也亦人,豈至於是? 是必苛責也",而今以後始知其信然矣。蓋栗谷之親書神道碑也,而座下則視之如無; 尢庵之所病也,而座下則曰本集可據; 陶庵之所釐正也,而座下則曰不知何爲。鄙等以爲座下非但誣尊先師,上而誣栗、尢、陶三先生也。鄙等以有關先事,不避觸犯,畢陳至此,幸明白回示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