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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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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 아무개에게 답함(答吳某 甲子七月○聲討前)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8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8.TXT.0028
오 아무개에게 답함
답장을 받아보니, 곡절이 비록 많지만 그 큰 것을 총괄해보면, 정재(靜齋)의 스스로 인간(認刊)을 담당했다는 것과 옹서(甕書)의 법도를 벗어나 화(禍)를 전가했다는 것과 상빈(傷貧)‧뇌비(賂碑)‧경쟁(競爭)에서 변론과 성토가 나왔다는 것을 말한 것에 불과했고, 마지막에는 변괴(變怪)의 일과 무문(舞文)의 농간을 저희에게 돌렸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어찌 그렇겠습니까? 청컨대 대략 질정해 보겠습니다. 일찍이 집사가 계해년(1923) 8월에 정재에게 답한 편지를 본 적이 있었는데, "대신 인가를 받는 것에 대해 작년 가을에 의견을 수합할 때에 형도 사람들을 따라 허락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허락한 것이 스스로 담당한 것과 선창하여 따른 것과 결단하여 힘쓴 것과는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 만큼 동일시할 수 없음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계해년 8월에 따라 허락한 것을 갑자기 갑자년 6월에 스스로 담당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정재가 인간을 담당하여 반대자를 막았다는 설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집사는 정재에게 대답하기를 "선사가 일찍이 인의(認意)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자승(子乘)에게 답하기를 "선사가 반드시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미 어디에서나 선사를 무함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행하설(杏下說)주 110)로 논해 보면, 바야흐로 함재장(涵齋丈)이 인간(認刊)을 성토할 때에 집사는 "세상의 앞날은 알 수가 없으니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는 명을 홀로 받들었다는 말을 지어내서 선사의 인교(認敎)를 입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 말을 동문 가운데 어떤 누가 지어냈던 모두 죄줄 수가 있으니, 대초(代草)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집사는 고제(高弟)이고, 일을 주관했고, 또 대초를 하였으며, 또 홀로 들었다고 스스로 말했는데, 누구와 죄를 분담하여 결사적으로 버티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법도를 벗어나 전가하고자 해도 해당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정재가 백이(伯夷)이던 도척(盜跖)이던 본디 하늘이 정해준 신분이 있는 것이니, 저나 집사가 억지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가난한 선비에게 책을 간행하는 곳이 돈이 생겨나는 숲이 아닌 것은 손금을 보는 것처럼 명백합니다. 정재가 비록 가난하다고 해도 또한 천치가 아닌데, 어찌 이를 몰라서 간행 장소를 옮겨서 가난을 벗어나려고 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상빈(傷貧)의 마음이 하나이다.'라는 해명은 남을 모함하는 글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경존(敬存)이 뇌물을 주어 비문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뇌물을 받고서 비문을 지은 자는 누구입니까?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비(碑)를 강등하여 갈(碣)로 만들어 선사께 천고의 누를 끼쳤으니, 이것을 감히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집사가 비를 갈로 강등한 것은 비록 국법을 따른 것이지 뇌물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뇌물로 인해 강등했다는 설이 이미 나왔습니다. 비록 실제로 국법을 어겼다고 해도 살피지 못한 잘못은 작고 뇌물로 누를 끼친 것은 크니, 마땅히 처리를 합당하게 했어야 했습니다. 국법을 보지 않고 멋대로 선사의 글을 고친 것은 또한 감히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뇌비(賂碑)와 관련한 유감은 경존 뿐만 아니라 동문이 똑같이 여긴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이 선사에게 누를 끼치고 선사를 경시한 것을 유감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 경쟁에는 두 가지고 있는데, 혈기의 경쟁은 있어서는 안 되지만 의리의 경쟁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이 의리가 아니고 집사의 무함이 진실이 아니라면 이미 끝내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師道)가 보존된 바로서 스승은 군부(君父)와 일체가 되고 하늘이 보는 것이 매우 밝아서 죄를 지은 자가 도망칠 수 없고 보면, 저희의 경쟁을 어찌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경쟁하는 바는 바로 의리인데, 집사는 곧 그것을 습속이라 하니, 어찌 그리 어긋난단 말입니까? 아, 선사를 무함한 것이 변괴(變怪)가 아니고 무함을 변론한 것이 변괴입니까? 말을 교묘히 하고 잘못을 꾸미는 것이 무문(舞文)이 아니고, 말을 바르게 하고 죄를 성토하는 것이 무문입니까? 천 세대가 지난 이후에 반드시 이를 변론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아, 정직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모두 말하다보니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만약 집사가 선뜻 뉘우치고 자복한다면 곧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대상(大祥)의 제사가 조금 지나서 비록 늦었다고 하지만 지금이라도 뒤미쳐 고친다면 선을 행함에 방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이 마음을 헤아려 알아주길 바랍니다.
김용승(金容承)은 집사의 옛 벗이 아닙니까? 집사는 어떻게 그가 한농노(漢農老)라고 부른 것과 마음속에 선사를 무시한 죄를 알면서도 【집사가 송영숙(宋瑩叔)에게 답한 편지에 "이 사람이 연전에 한농노(漢農老)라고 불렀다."라고 하였습니다. 권고경(權顧卿)이 저에게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마음속에 선사를 무시한 것이 오래되었다."라고 하자, 내가 "어떻게 그것을 하는가?"라고 하니, 권고경이 "석농(石農)에게 듣고서 알았다."라고 했습니다.】 다년간 그를 엄호하며 공경하고 믿었으며 심지어 그를 초빙하여 선사의 원고를 교정하게 하였다가【집사가 김용승에게 답한 편지에 "편지를 보내 원고의 교정을 청하였고, 또 유사첩(有司帖)을 보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집사를 성토한 뒤에야 드러낸단 말입니까? 김용승이 무함을 성토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근래에 선사를 배반한 것과 함께 묻지 않기를 전날에 한농노라고 부르고 마음에 선사를 무시했던 때처럼 대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집사가 김용승을 성토하는 것은 진정으로 선사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이전에는 김용승을 당으로 삼고 선사를 망각했다가, 지금에는 선사에 의탁해서 자신을 위한 행동을 한 것이니,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김용승과 새로이 교유를 한 사이여서 이전에 한농노라고 부르고 선사를 무시했던 일에 대해서는 진실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오늘 제사에서 물리치고 무함을 변론한 도의가 공경할 만한 것을 보고서 그와 교유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홀연 선사를 핍박한 그의 말을 보게 되었고 타일러 고치게 했으나 5일이 지나도 따르지 않으므로 마침내 편지를 보내 고치지 않으면 결단코 절교를 하겠다는 뜻을 보이고서 서로 갈라섰습니다. 비록 집사가 저를 증오하는 태도로도 또한 "종현(鍾賢)의 처사가 옳다."【집사가 권고경에게 답한 편지에 나오는 말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상(大祥)을 지내던 날에 저를 끌어다가 김용승을 당으로 삼은 자로 삼고 영좌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여 제사에서 내쳐진 집사의 대거리로 삼았단 말입니까? 깨우쳐주는 한 말씀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주석 110)행하설(杏下說)
간재집의 간행과 관련하여, 간재가 은행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있을 때에 오진영에게 "힘을 헤아려 하라."고 명하였다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答吳某 甲子七月○聲討前
承來覆,曲折雖多,總其大者,不過曰靜齋之自擔認刊,甕書之越法嫁禍,辨討之出於傷貧、賂碑、競爭,終而歸鄙等於變怪之擧、舞文之奸。鳴呼其然? 豈其然乎? 請得以略質之。嘗見執事癸亥八月答靜齋書矣,不曰代認昨秋收議時,兄亦不隨衆許之乎? 隨許之於自擔、倡從、決勉之相懸,不可同年,尺童亦知。今焉癸八之隨許,忽爲甲六之自擔,此靜齋擔防之說,使人見信難矣。執事對靜齋而言"先師曾有認意",答子乘而曰: "先師敎不必深拘。" 旣無適而非誣師矣。若以杏下之說論之,方涵丈討認之日,執事倡造獨承"世不可知,自量爲之"之命,立先師認敎之證者。卽此是罪,此語同門誰某倡造,皆可罪之,不必待代草也。况執事是高足矣,主事矣,且代草矣,亦自言獨聞矣,欲誰與分罪而抵死支撑乎? 此越法嫁禍之無所當也。靜齋之是夷是蹠,自有天定身分,非吾與執事之所得以强名也。但措大刊所非生金之藪,則若掌紋視者,靜齋雖貧,亦非天癡,豈不知此而欲移刊脫貧乎? 然則"傷貧一也"之解,難免爲䧟人之筆也。謂敬存納賂而得文,則其受賂而作文者誰也? 乃以此降碑爲碣,以成先師千古之累,是其敢爲者乎? 執事之降碣,雖云在典不在賂,賂降之說旣發,雖實違典,失勘小賂累大,宜其有所處之得當。未見國典而擅改先師之文,亦其敢爲者乎? 然則賂碑之憾,非獨敬存,同門之所同也,何也? 憾其累師輕師也。且競爭有兩般: 血氣競爭不可有,義理競爭不可無。謂辨師誣之非義也,執事之誣非眞也,則已終無柰。師道所存,君父一軆,天鑑孔昭,有罪莫逃,則鄙等之競爭,安可已也? 然則其所爭者乃義也,執事乃謂之習,何其乖也? 噫! 誣師者非變怪,而辨誣者變怪歟? 矯辭飾非者非舞文,而正言討罪者爲舞文歟? 千世在後,必有能辨之者。鳴呼! 不直則不見,故盡言至此。然若得執事幡然悔服,則便沒事。差過祥會,雖云晩矣,卽今追改,不害爲善。後諒此心告而見裁焉。
金容承非執事舊要乎? 胡爲乎知其呼漢農老、心無先師之罪,【執事答宋瑩叔書曰: "此人年前呼漢農老。" 權顧卿對澤述言曰: "此人心中無先師久矣。" 吾曰: "何以知之?" 權曰: "聞諸石農而知之。"】 而多年掩護敬信,至於聘校師稿,【執事答金容承書曰: "書請校稿,又致有司帖。"】 及討執事之誣師後發之乎? 使金而不討誣,必與近日倍師而不問,如前日之掩漢農老、無先師也。然則今日執事之討金,是眞正爲師歟? 抑爲己歟? 在前則黨金而忘師,在今則憑師而爲己者,不其然乎? 澤述之於容承,則新交也,其前日漢農老、無先師,固有不可得而知者。但見今日却祭辨誣之義之可敬,而與之遊從,忽見其語逼先師,喩之使改,五日而不從,然後書示以不改必絶而相分矣。雖以執事之憎此漢,亦曰鍾賢之事得之,【執事答權顧卿書中語】 胡爲乎大祥之日,援此漢爲黨金而謂不當入靈,作黜祀執事之對擧乎? 請下一轉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