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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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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 아무개에게 답함(答權某 甲子)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8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8.TXT.0026
권 아무개에게 답함
보내온 편지에 음양모순(陰陽矛盾)과 조변석개(朝變夕改)의 소인으로 나를 지목한 것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기고서 또 환란을 초래한 도적으로 나를 비기었습니다. 대저 생민이 있은 이래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선이나 악으로 이름하지 못하고 죽은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소인이나 도적의 이름을 얻는 것도 본디 쉽지 않으니, 우리 형의 은혜는 어찌 이리도 두터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이름이란 것은 실질의 손님입니다.주 107) 만약 단지 그 이름만 누리고 그 실질을 규명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음식을 먹고도 그 맛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감히 질문하여 소인이 된 실질을 알고자 하니, 끝까지 가르쳐주기 바랍니다. 대저 내가 김용승(金容承)과 절교한 것은 내가 나의 일을 한 것인데 무슨 일을 입증한단 말입니까? 남이 김용승과 절교하지 않은 것은 그가 스스로 잘못한 것인데, 내가 어찌 그를 참견하겠습니까? 다만 음성의 오진영이 나에게 김용승을 당인으로 삼은 죄목을 뒤집어씌우고, 심지어 '영좌(靈座)에 들이지 말라.'는 설을 가지고 무함을 성토하고 제사에서 내친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선사를 잊고 김용승을 당으로 삼은 실질적 죄상은 생각지도 않았으니, 이미 말할 가치도 없었습니다. 형은 음성에 대해 복심으로 충직하게 믿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형의 편지에 "기쁘고 시원하게 씻어내었다."고 한 것과 음성의 편지에 "종현(鍾賢)의 처사가 옳다."고 한 말을 인용하여 내가 김용승과 절교함에 그 기록이 있음을 증명하였고, 또 김용승이 연전에 한농노(漢農老)라고 부른 것과 마음속에 선사를 무시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김용승을 허용하여 다시 성토하지 않고 김용승에게 조용하게 잘못을 고칠 것을 권면한 것을 가지고 음성이 전후로 김용승을 당으로 삼은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양측이 계속 대변(對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곧 "한 구의 몇 마디 말로 형을 팔고 참작해서 말을 한 뜻을 살피지 않았다."라고 하고, 곧장 들어가는 것을 밀치고 막은 일, 동문으로 받든 일, 제문을 성토한 것 등으로 음양모순과 조변석개라고 하였습니다. 또 오진영의 글에 "만약 이후에 선사를 범한다면 내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토죄하겠다."고 한 말을 살피지 않고, 감히 김용승과 절교하지 않은 것을 심술의 병통과 환란을 초래한 것으로 얽어맸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생각해보고 여러 가지를 참고하여 구해보아도 매우 괴이합니다. 대저 형이 죄를 판결한 것도 그 자체로 얼마간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 구의 몇 마디 말이 죄가 된다면 전편의 마음을 통틀어 거론하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형의 이 편지 전편을 모두 읽어보니, "기쁘고 시원하게 씻어내었다."는 등의 말에 참작한 뜻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를 낱낱이 따져본다." 등의 말에도 저의 뜻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형을 판 것으로 김용승과 절교한 증거로 삼아 죄를 주었으니, 마음을 돌이켜보면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또 곧바로 들어간 것은 그러하지만, 밀치고 막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스스로 돌이켜보아 정직하다면 비록 천만 명이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주 108)고 했습니다. 어찌 물러나 기다리며 스스로 기가 꺾이는 일을 하였겠습니까? 애당초 막았던 것이 없었으니, 또한 어찌 밀치고 막은 이치가 있겠습니까? 제가 실제로 죄가 있다면 음성 쪽의 여러 사람이 등 뒤에서 걷어차며 내쫓기를 형이 김용승에게 했던 것처럼 하는 자가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마침내 내가 변론을 한 번 하자 입을 다물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또 저는 이미 김용승과 절교를 했고, 김용승을 만나서 제문을 본 것은 곧 당일 풍파가 있은 뒤에 있었습니다. 형은 어떻게 김용승을 만나 제문을 본 죄를 미리 알아서 음성 쪽 사람들과 마땅히 영좌에 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벌을 정했단 말입니까? 그것도 또한 이른바 "지극히 성실하면 미리 알 수 있다."주 109)는 도인 것입니까? 또 그가 천리 멀리서 상제(祥祭)에 달려와 제문을 가지고 사죄를 하였으니, 단지 그가 멋대로 들어온 것을 추궁만 하고, 다시 그 글을 살펴서 진퇴를 결정해도 늦지 않았는데, 형의 무리들이 영전에서 먼저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찬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형은 이전 편지에 "김상(金庠 김용승)이 강리(講里)에 사죄하는 것을 뜻밖에도 기쁘게 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강리에 사죄를 한 것은 기쁘게 들었는데, 선사에게 사죄를 한 것에 대해서는 기쁘게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먼저 단지 곧장 발로 찼으니, 참으로 음성을 중시하고 선사를 경시한 것입니다. 저는 당일의 일을 늦게 비로소 와서 보았지만 이 의리에 대해서는 소견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미 김용승에게 경솔하게 곧장 들어간 것은 먼저 그 도리를 잃은 것이라고 질책하였고, 또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스스로 큰 죄에 빠졌다고 질책한 뒤에 여러 사람 앞에서 그 제문을 읽게 하였습니다. 송춘계장(宋春溪丈)은 "글에서 노주(老洲)를 배척하고 자복하지 않는 것은 흠이 되는 일이다."라고 했는데, 저도 자세히 살펴보니 춘계장의 말이 진실로 옳았습니다. 다음날 또 그가 끝까지 "사우간(師友間)으로 선사를 대하였다,"는 설을 고치지 않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어찌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그와의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죄를 준다면 감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말을 나눈 것은 있었지만 동문으로 대한 것은 없었으며, 제문을 본 것은 옳았지만 제문을 성토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형이 마침내 대략 서너 글자를 가지고 본래 면목을 바꾸었는데 마음을 먹고 한 것입니까? 이것은 형이 사람을 죄에 빠뜨린 것입니다. 또 호중(湖中)에 있었을 때에는 "성선(性善)【김용승의 옛날 자(字)라고 하는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김용승의 옛날 자인지도 모릅니다.】이 내방하였으니 나에게 술이 있다면 마셔야 하고 밥이 있으면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고 【정돈영(鄭敦永)이 신헌(愼軒)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선이 지난번 강리에 도착했을 때 내가 가서 보았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으며,【박창현(朴昌鉉)이 저에게 대답한 말인데, 이 때 정돈영(鄭敦永)과 오해겸(吳海謙)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김용승과 작별할 때에 간곡하게 나에게 방문을 부탁했다."고 한 자도 있었는데, 【이광규(李光珪)가 화도(華島)의 강변에서 김용승과 작별할 때 이 말이 있었는데, 김(金)은 "김용승과 당이 되는 것인데 어찌 하겠는가."라고 하였고, 이(李)는 "군은 다른 말을 꺼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저와 수십 명이 함께 보고 들었던 것입니다.】 그 죄를 묻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친근하게 서로 그리워했습니다. 그런데 호남(湖南)에 있을 때에는 김용승이 잠깐 지나는 길이었는데 중벌이 갑자기 가해지고 엄한 성토가 뒤따랐으니, 또한 하나의 괴이한 일이었습니다. 아, 저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김용승이 애초에 오진영에게 보낸 선사를 무함하는 글을 꺼내지 않았다면 반드시 그가 선사를 배반한 죄를 성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제(祥祭)에 달려간 처음에 음성을 성토한 말을 재차 꺼내지 않았다면 분명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호남인이 애당초 인의(認意)와 인교(認敎)로 음성을 꾸짖지 않았다면 김용성을 당으로 삼았다는 앙갚음이 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제를 치르는 날 재차 음성을 내치는 일이 없었다면 김용승을 당으로 삼은 벌이 반드시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상천하에 오직 일음(一陰 오진영)만이 홀로 존귀하고 세상에 다시 우리 육양선생(六陽先生 간재)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음양모순과 조변석개, 심술의 병통과 환란의 초래[陰陽變改心病亂招]'는 형이 나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비록 사라지지 않을 대필(大筆)의 은혜를 지극히 감사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옹졸하고 융통성이 없는 저가 마침내 그 이유도 모르고서 염치없이 받는 것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고, 또 저가 위에서 진술한 바가 어떠합니까? 괴이할 뿐입니다. 여러 의심을 이미 해소할 수 없다면 여덟 글자의 미명(美名)은 형과 음성 오진영에게 바치고 싶지만, 이미 주었는데 다시 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천하에는 끝내 정명(定名)이 없겠습니까? 각각 스스로 자신의 심술과 언행 사이에서 돌이켜 구한다면 이 이름이 합당한지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처럼 뜨겁다가 얼음처럼 차갑기가 날로 심해집니다. 어느 날 강물이 줄어들어 돌이 드러나는 것처럼 진상이 밝혀지는 일은 아득히 정해진 기일이 없으니, 또한 어찌 쉽게 이루어지겠습니까? 다만 피차 죽고 나서 백 세대가 흘러 의론이 정해질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
영남에서 문집을 간행하지 못하게 된 것은 뇌물과 관련한 분노와 비문과 관련한 유감 때문입니까? 호남이 인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뇌물과 관련한 분노와 비문과 관련한 유감이 만약 없었다면 비록 인가하지 않는 곳이 있더라도 장차 듣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오직 인가를 조심한 곳은 반드시 영남입니다. 영남의 의리라는 것은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내가 비록 한심하지만 인가하지 않은 호남을 버리고 영남에서 일을 함께 한다면 하늘이 분명 싫어할 것입니다.
위로 선사를 범했다니 이 무슨 말씀입니까? 저의 편지에 "선사가 이를 조금도 생각지 않았는데 조만간 하라고 명했다는 것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라고 했던 것은 선사께서 분명 이러한 일이 없었음을 밝힌 것이었습니다. 천하는 문자가 똑같은데, 이를 두고 윗사람을 범한 말이라 한다면, 사람들 중 그 누가 이를 믿겠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주석 107)이름이란……손님입니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이름이란 실질의 손님인데, 나보고 장차 손님이 되라고 하는 말인가.[名者, 實之賓也, 吾將爲賓乎]"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108)스스로……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맹자는 부동심(不動心)의 방법으로 용기에 관해 논하기를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다면 비록 천만 명이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하였다. 즉 자신이 떳떳하면 아무리 많은 사람도 두렵지 않다는 기상이다.
주석 109)지극히……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4장에 "지극히 성실한 도(道)는 미리 알 수 있다. 국가가 흥성하려면 반드시 복된 조짐이 생기고, 국가가 멸망하려면 반드시 요사스러운 징조가 생긴다.[至誠之道, 可以前知,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孽]"라고 하였다.
答權某 甲子
來書以陰陽矛盾朝變夕改之小人目我,猶以爲未足也,又以亂招之盜賊律我。蓋自生民以來,林林蔥蔥,無善惡可名而沒者何限? 得小人盜賊之名,亦自不易,吾兄之賜一何厚也? 雖然,名者,實之賓也。若徒享其名,而不究其實,是猶食之而不知其味也。玆敢質之,欲知所以爲小人之實,幸有以卒敎之也。夫我之絶金,吾爲吾事,何事立證? 人不絶金,彼自失之,我何管他? 但陰吳之勒我以黨金之罪,至以几筵勿入之說,加之作討誣黜祀之報,而不念自家前後忘師黨金之實罪,已甚無謂。而兄之於陰,是腹心忠諒者。故引兄書"喜豁洒然"、陰書"鍾賢得之"之語,證吾絶金之有書; 又擧知其年前呼漢農老心中久無先師,而許金不復討,勉金安靜改過,證陰前後之黨金。此兩造對辨之不得已者,乃承以孤行單辭賣兄而不察遺辭斟酌之意,及排閑直入、逢承盍簪、討祭文爲陰陽變改。又以不察陰書"若後侵師, 吾并以千人討之"之語,而敢構以不絶金爲心病亂招。反覆思之,參互求之,深怪。夫兄之折獄奏當,亦自一般差異也。夫孤行單辭之爲罪,則通擧全篇之心不爲罪。兄之此書,通讀全篇,不惟"喜豁灑然"等語之不見有斟酌意,至於"歷數其罪"等語,有非盡鄙意者。今反以賣兄爲絶金之證見罪,反顧于中,能無愧負乎? 且直入則是然,而排閑則非其實也。"自反而縮,雖千萬人吾往矣。" 有何退待自沮之爲乎? 初無有拒閑者,則又何有排閑之理乎? 使此漢而有實罪也,則陰邊諸人踢蹴背後而逐之,如兄之於容承者,必有其人,乃被鄙辨一破而噤不得措一辭者,何也? 且弟旣已絶金矣,逢金而見祭文,乃在當日風波之後,兄何以預知逢金見文之罪,與陰邊人定不當入靈之罰也? 其亦所謂至誠前知之道歟? 且彼千里赴祥操文謝罪者,只當責其擅入,更爲之觀其文而進退之,未晩也。兄輩之拳踢,先動於靈前者,何也? 兄之前書,不曰金庠之謝罪講里儻喜聞乎? 謝罪乎講里則喜聞之,謝罪乎先師,則不惟不喜聞,乃先直踢之,其眞重陰而輕師也。弟於當日之事,晩始來見,然有見於此義也,故旣責金以率爾直入先失其道,又責以不聽吾言,自䧟大罪,乃令閱其文于衆中。宋春溪丈曰:"文中斥老洲不服,是爲欠事。" 弟亦審視,春言良是。翌日,又聞其終不改師友之說,故知其末如之何,而斷置之矣。以此而見罪,則不敢辭矣。然通語則有矣,盍簪則未也,見祭文則是矣,討祭文則非也。兄乃略將數三字頓換本面目,有心哉? 兄之䧟人也。且在湖中,則有言性善【容承舊字云。此中人并與容承舊字而不知。】來訪,吾有酒則當飮之,有飯則當食之者【鄭敦永對愼軒云然。】; 有言性善之向到講里,吾往見之者【朴昌鉉對弟言,如此時鄭敦永、吳海謙在座。】; 有作別容承丁寧託以訪我者,【李光珪於華島江邊別容承有此言,金言其於黨金何, 李言君勿出別言。弟及數十人所共見聞者。】 非惟不問其罪,反與之爾我相眷戀。在湖南,則容承之風影乍過,重罰輒加,嚴討并隨,亦一可異也。噫,吾其知之矣。使金初不發封陰誣師之章,必不聲其倍師罪矣。再不發討陰言於赴祥之初,必不遭拳踢之加矣。使湖南人初無認意敎之責陰,黨金之報非所及也。再無黜陰於祥祀之日,黨金之罰必不到也。天上天下,惟一陰獨尊,不知世間復有我六陽先生,鳴呼痛哉! 蓋陰陽變改,心病亂招,兄之所以名我者,雖極感大筆不朽之惠,自念拙拙硜硜,竟不識所以然而冒受之,有非實心,且弟之右陳何也? 可異之。羣疑旣不可觧,則八字美名欲奉納於兄與陰吳,然想不欲旣與而還取。然則天下終無定名乎? 各自反求於心術言行之間,則可知斯名之當否矣。火熱氷寒日甚,一日水落石出,漠無定期,亦何可易也? 只當俟彼此蓋棺之日、百世論定之時而已.
嶺刊之敗,爲賂怒碑憾耶? 爲湖之有不認耶? 賂怒碑憾之若無乎,雖有不認地,將如不聞也者,而惟認是謹者必嶺也。嶺之義理,固如是矣。吾雖無似,舍湖不認而同事於嶺,天必厭之。
上犯先師,此何謂也? 鄙書所謂"曾謂先師少不念此而命遲速間爲之乎"者,明先師之必無是事也。天下之文同也,以此爲犯上語,則人誰信諸? 令人失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