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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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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사익에게 보냄(與吳士益 庚辰)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8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8.TXT.0019
오사익에게 보냄
저는 기가 약해지고 살이 빠져서 영락없는 귀신 몰골입니다. 게다가 금년은 술사(術士)가 악운(惡運)이라고 부르는 해인데 아직 곧장 죽지 않고 있으니, 결국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인하여 생각건대, 인생의 큰일은 임금과 부모와 스승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벼슬하지 않았고 지금 또 나라가 없어졌으니 임금을 섬기는 것은 그만이었고,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고 또 마음에 흡족하게 죽은 뒤의 일을 처리할 재물도 없으니 부모를 섬기는 것 또한 그만이었습니다. 오직 분수를 따라 선사를 무함을 변론하는 것에 진력하여 선사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혹 그런대로 수행하였습니다. 근래에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제반 문자를 수습하여 수정하여 책을 만들어주 82) 다음의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삼가 선사가 임종하기 수일 전에도 오히려 논을 지어 전옹(全翁 임헌회)의 무함을 변론한 의리주 83)에 붙였습니다. 다만 저승사자가 이르기 전에 능히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생각건대, 형은 선사를 무함함을 변론하는 일에 처음에는 양쪽의 사이에서 가부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원래 선사의 불언지교(不言之敎)를 따랐다."는 오진영의 편지를 얻어 보여준 뒤에 "〈답옹서(答甕書)〉를 보고서 더욱 분명해졌으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병인년(1926) 섣달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오진영의 의서(擬書)를 보고서는 또 의론이 달라짐을 면치 못하여 무함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제가 반복해서 충고하자 지금 이후에는 중간의 옮겨 다니는 견해를 버리고 전일의 명백한 의론을 도로 지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 외에 더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렴풋하고 근사하여 확실히 근거로 삼을 수 없는 편지의 말을 믿기 보다는 어찌(차리리) 명백하고 준엄하며 정직하여 백세를 기다릴 수 있는 유서(遺書)를 지키는 것과(것이 나은 것과) 같겠습니까? 대의(大義)가 같게 되어 결국에 하나의 길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미욱한 견해가 앞뒤로 차이가 있었던 것은 진실로 부끄럽습니다만, 붕우 간에 강마(講磨)가 도움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도 다행이고 얼마나 시원합니까."라고 한 무인년(1938) 7월의 편지는 의론이 여기에 이르러 또한 이미 바른 것에 가까웠으니 저 또한 변론을 그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함이 매우 두텁기 때문에 의견이 완전히 똑같게 되기를 더욱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성품의 강유(剛柔)와 의론의 준완(峻緩)은 한 판에 찍은 것처럼 같을 수 없다."는 형의 말도 불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어쩌지 못하고 제가 또한 그대로 두려고 하지 않자, 더욱 확대되어 대인(代認)과 면명(面命)에 대한 기묘년(1939) 8월의 편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형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른바 임술년(1922) 3월의 면명에 대해서는 오진영도 오히려 "단지 지속을 논하였을 뿐이고 인가 여부를 미처 말하지 못하였다."라는 말로 회피하였는데, 형은 곧장 "대인도 구차하지 않다."는 것으로 면명을 해당시키고, 이미 "대인의 명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더욱 그의 무함을 증명하여 완성해준 것이었습니다. 형은 어찌 갑자기 병인년과 무인년주 84)의 두 편지에 없는 힐난거리를 세우고, 또 어찌 몇 해 전의 제 편지의 "대인은 원래 말이 되지 않으니 결코 선산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했던 말을 조금도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에 저는 혼자 가만히 탄식하여, '내가 만약 무인년 7월 이후에 다시 한 마디 말이 없었다면 이 친구로 하여금 이렇게 하지 않게 하였을 것인데, 지금 마침내 완전히 똑같게 하려고 했던 것이 도리어 크게 어긋나게 만들었다.'라고 여기었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이미 답장을 작성했으나 말이 자못 준엄하였고 또한 갑자기 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금년 봄 서로 만난 날에 지금 편지의 내용으로 대략 들어서 말씀드렸더니, 형이 곧바로 기쁘게 듣고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어찌 견해를 고치는데 인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아. 견해를 고쳤으니 이것으로 충분하고, 형은 예전 그대로 무인년 7월의 오두남(吳斗南)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다만 말이 이미 문자에 드러났으니, 또 문자로 견해를 고친 실상을 기록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의혹이 없게 하는 것도 방애되지 않기 때문에 조만간 한 통의 편지를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친구 간에는 10년 동안 의론이 같지 않은 것은 해될 것이 없고 하루라도 마음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가장 꺼려한다.'고 항상 말합니다. 지금 변론의 문장을 책으로 엮으면서 문득 형도 지난날의 일들을 써서 피차의 마음을 통했으면 하는 생각이 우연히 들었습니다. 일이 많다고 웃지 마시고 은혜롭게 한 마디 말씀을 답해주지 않겠습니까?
또 "선사가 만약 인교(認敎)가 없었다면 하나의 절개만 있는 선비에 불과할 뿐이다. 어찌 고단하게 선사로 하여금 전체가 모두 온전한(전적으로 완전한) 군자가 될 수가 없게 하는가."라고 하는 일종의 설이 있는데, 나올수록 더욱 기이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설이 행해지면, 선사가 선사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장차 의리가 꽉 막히게 되고 천지가 뒤집어진 뒤에 그치게 될 것입니다. 너무도 통탄스러우니 어찌해야겠습니까?
형의 편지에 "10여 년 동안 오직 음성(陰城) 하나가 뱃속에 가로질러 있어서 그 언어와 문자에 조금만 다른 것을 보면 문득 입을 열어 말하고 붓을 잡아 썼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정절사전(鄭節士傳)〉을 논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형은 제 마음에 대해 얕게 알았을 뿐만 아니라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개 이는 선사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으니 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만, 다만 중화[華]와 오랑캐[夷]를 구분하여 막는 것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언급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형도 저의 의론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사원(祠院)의 제사에 생고기를 올리는 것도 큰 쟁론이었지만 저는 생고기를 올린다는 오진영의 의론을 옳다고 하였으니, 여기서 제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사람을 논하고 문장을 논함에는 오직 이치를 볼 뿐입니다. 사람들이 제가 생고기를 올리는 것을 옳게 여긴 것으로 오진영에게 아첨하여 화를 늦추고자 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아, 진실로 그 마음을 의심하여 죄를 덮어씌우려고 한다면 어찌 할 말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주 85)
주석 82)책을 만들어
김택술이 《간재집(艮齋集)》 출판에 따른 오진영의 스승 간재에 대한 무고와 이에 따른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정리한 《사백록》을 가리킨다.
주석 83)선사가……의리
김평묵(金平默)이 임헌회(任憲晦)의 제문을 지었는데, 임헌회를 호안국(胡安國)과 사마광(司馬光)에게 비유했다 해서 전우와 임헌회의 아들 임진재(任震宰)가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선언하고 제문을 돌려보낸 일을 말한다. 《간재집(艮齋集)前篇》 권2 〈답유치정(答柳穉程)〉
주석 84)병인년과 무인년
원문은 '丙戌'로 되어 있는데, 문맥을 살펴 '戌'을 '戊'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석 85)죄를……걱정하겠습니까
처벌할 작정만 한다면 트집 잡을 핑곗거리는 많을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혜공(惠公)이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이극(里克)을 죽이려 하자, 이극이 "나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한다면, 어찌 할 말이 없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欲加之罪 其無辭乎]"라고 말하고는 자결했던 고사가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 십년(僖公10年)》
與吳士益 庚辰
弟氣弱肉削,便同鬼狀,且今年術士所稱惡運,而姑不卽殊,不知竟如何也。仍念人生大事,事君、父、師。而曾不立朝,今且無國,事君已矣; 少而孤露,又無財可以恔心後事,事親亦已矣; 惟有隨分盡力於辨誣,以之事師,則或庶幾焉。近方收拾諸般文字可助於辨誣者,修整成編以俟來百,竊附先師屬纊前數日,猶著論以辨全翁誣之義。然未知符到前能就緖否也。且念兄於此事,初不可否於兩間,及得示以"原從先師不言之敎"之震書,然後有"視答甕書,尢爲分曉, 不可不謂之誣師"之丙寅臘月書。後十年,見震擬書,又不免貳論爲不誣,而得弟反復忠告,有今而後,不可不棄却中間遊移之見,還守前日直截之論。而此外更無他道, 與其信依俙近似不可確據之書言,豈若守明白峻正百歲可俟之遺書哉? 大義所同,終歸一轍。迷見之前後參差,誠可慙; 朋友之講磨有力,不可誣。"何幸如之, 何快如之"之戊寅七月書,論至於此,亦已近正,吾亦可止矣。惟其相愛之甚厚,故愈欲同歸之純如,則"性之剛柔,論之峻緩,不能如印一板"之兄言,亦未爲不可。終無柰弟又不肯放過,則輾轉出來代認、面命之己卯八月書矣。兄試思之。所謂壬戌(1922)三月之面命,震猶以"單論遲速不及認否"諱之,兄則直以"代認不拘"當面命, 旣云有認命,則是益成其誣矣。不知兄何忽立此丙戊二書所無之詰頭,亦胡少不念年前鄙書"代認元不成說, 決非師敎"之言乎? 於是私竊嗟歎, 以爲我若戊寅七月以後,更無一言,則不使此友有此,而今乃欲其純同者,反致大乖也。以是雖己裁答書,辭頻峻節,又不能遽發。乃於今春面晤日,略擧告之, 如今書中意,則兄卽喜聞曰: "然則吾何吝改見。" 噫! 改見則斯已矣,而依舊是戊寅七月書之吳斗南也,何幸何幸! 但言旣形於文字, 則不妨又以文字記其改見之實,使觀者無惑, 故意其有早晩一書之賜耳。弟常言凡在親友無傷十年議論不同,最忌一日心肝相隔。今於編成辨文之日,忽偶念兄且寫過境之事,要通彼此之心。未知不以多事笑之,而幸惠一言之覆否?
又有一種說,謂先師若無認敎,不過爲一節之士,何苦使先師不得爲全體君子也云者,可謂愈出愈奇。此說之行,非惟先師不得爲先師,將見義理晦塞、天地翻覆而後己。痛歎痛歎, 柰何柰何?
兄書云: "十數年間,惟一陰城橫著肚裡,見其言論文字少異,則輒啟口抽筆。" 此以論《鄭傳》事而云然。然兄於弟心,非惟淺知,可謂全未。蓋此非關於先師者,則不論亦可也,而特以係華夷之防,故言者耳。故兄亦不從鄙論乎? 院亨之生熟薦,亦大爭論也,而弟是吳論之生薦,此可以知吾心也。凡論人論文,惟理之是視耳,安知人之又不以弟是生薦爲媚吳而緩禍也乎? 噫! 苟疑其心而加之罪,何患無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