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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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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사익에게 답함(答吳士益 己卯)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8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8.TXT.0017
오사익에게 답함
저는 나이가 60세에 가깝고 질병이 날로 침범해서 수명이 다 되었으니, 설령 올해 속히 죽더라도 진실로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죽기 전에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을 하나라도 잘못 보거나 의리가 아닌 일을 하나라도 잘못 행한다면 끝내 지하에서도 한이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 제 자신의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동인(同人)의 착오(錯誤)를 보면 차마 남의 일 보듯이 할 수 없는 것이 이전에 비하여 더욱 간절하여 그만둘 수 없습니다. 대체로 친구 간에 서로 도와주는 도리를 말씀드리면, 붕우 간에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주는 것주 69)은 《주역》에 드러나 있고, 친구 간에 충심으로 말해주고 인덕으로 돕는 것주 70)은 것은 《논어》에 보이며, 덕업을 서로 권하고 과실은 서로 경계하는 것주 71)은 《여씨향약》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의 배우는 사람을 보면, 충심으로 고해주고 과실을 바로잡아주는 한 가지 일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말세에 붕우의 도리가 사라졌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남과 나 사이에도 끝내 피차의 구분이 있어서 모두를 똑같이 보는 인(仁)이 행해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에 또 증자(曾子)의 삼성(三省)주 72)을 생각해보면, 첫째는 '남을 위해 도모함에 충성스럽지 못한 것[謀人不忠]'이고, 둘째는 '벗과 사귐에 신실하지 못한 것[交友不信]'입니다. 대부분 한결같이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뜻이지만 다른 사람을 자신을 보듯 하는 것은 보통의 인장으로는 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스스로를 반성한다고 하였지만 또한 후학을 면려하고자 한 것인 듯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논해보면, 친구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보고 남일 보듯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이는 불충(不忠)이고 불신(不信)입니다. 제가 근일에 실로 이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타인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형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으며, 다른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선사에 관계된 일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형은 음성 오진영의 일에 대해 이미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정견(定見)을 도로 지키게 되었으니, 저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미 그렇게 여겼는데, 또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라고 하니, 이는 무슨 말입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이미 무함이라고 말했다면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무함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만약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의당 그것을 고칠 겨를도 없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치지 않은 것으로 살펴보면, 마음을 먹고 선사를 해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는 한 마디 말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제가 우연히 옛날 상자를 열었다가 형이 병인년(1926) 겨울에 보낸 편지를 찾았는데, "그의 초심이 비록 이론을 그치게 하여 선사의 원고를 간행하려는 데에서 나왔지만 선사를 해치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옛날을 끌어다가 지금을 증명함에 자신이 말한 것이 성립되지 않음을 두려워하여 심지어 '선사가 꺼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였다.'주 73)라고 말하는 극도의 지경에 이르고서야 그쳤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비록 선사를 해하려는 마음이 없었더라도 끝내는 바뀌어 선사를 해치게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당시 이 의론은 또한 자못 바름에 가까웠는데, 지금은 이미 정견을 도로 지키면서 유독 이 의론을 버렸으니, 괴상할 따름입니다. 이미 금산(錦山)의 오(吳)가 '성사심제(性師心弟)'를 비판한 것에 대해, 제가 변론한 것을 보고 뒤따라 즉시 변론하여 한 편의 글을 지었으니 선사를 보호함에 새매가 참새를 쫓듯이 하는 뜻주 74)이 있었음을 우러러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부의 적이 일으키는 환란은 외부의 적이 일으키는 환란보다 크고, 선사의 뜻과 절개를 무함하는 것은 의론의 다툼보다 중대하니, 어찌 금산의 오를 변론한 것을 가지고 음성의 오진영을 먼저 변론하지 않는 것입니까? 혹 살아서 친근한 자에게 어려움이 있지만 죽어서 소원한 자는 쉽기 때문에 형의 현명함으로도 또한 세태에 빠진 것입니까? 아, '성사심제(性師心弟)'는 본디 성인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와 의심할 것이 없는 것임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사설(邪說)이 바른 것을 해친다는 죄목을 억지로 씌웠습니다. 하물며 제자의 입에서 나와 믿을 만한 것 같은 인의(認意), 인교(認敎)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고 욕하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으며, 〈전간재전(田艮齋傳)〉을 짓는 자가 어찌 이승욱(李承旭)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저는 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일어나서 위원리(魏元履)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분개하는 날주 75)과 같이 되면 음성을 비호한 제공(諸公)의 죄는 사양할 수 없을 것이고 구구한 저의 오늘날 변론도 [죄를 묻는데] 혹 보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형의 생각에 알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저의 앞선 편지에 갑진년(1904)에 선사가 순명비(純明妃)의 복제(服制)에 대처한 것을 가지고 운운한 바가 있었는데, 오진영의 편지에 "나이와 병이 모두 지극해서 비록 부모상일지라도 최복(衰服)을 가지고 다닐 수 없다."고 한 말이 선사를 무함한 것임을 주로 말하였고, 아울러 형과 내가 함께 보았던 선사가 그 해의 명헌황후(明憲皇后)의 상에는 최복을 입고 망곡(望哭)했던 일을 가져와서 증명하였습니다. 또 오진영이 [선사가] 신혁균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여(與)' 자를 '여(歟)' 자로 고치고 그 이하 18자를 삭제하여 수최(受衰)를 행한 문장으로 만든 것주 76)이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임을 말하고, 사실(事實)을 변란하고 예의(禮意)를 어둡게 했다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은 곧 선사를 무함하고 원고를 고친 사실을 빠뜨리고 답을 하지 않고서 다만 '수최하지 않고 다만 백의와 백립을 착용을 따름이다.'는 설을 들어서 "성론(盛論)이니, 진실로 그러하고 진실로 그러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제 견해도 또한 이와 같았기 때문에 편지로 힐문하였는데, "의심스러운 점이 많으니 이는 진실로 개탄스럽다. ……"라고 하여, 마치 오늘날 예설(禮說)을 뒤미처 강론하는 것과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선사를 무함하여 60세에 부모의 상에도 최복을 가지고 다닐 수 없다고 망언을 하고, 선사의 원고를 고쳐서 예(禮)와 명(命)을 참작하여 중도의 맞게 한 의리를 명료하지 않는 것으로 돌린 자에 대해 감히 배척할 만하고 증오할 만하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의심스럽다고 말하였습니다. 의심스럽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비록 그렇지만 형의 명철함으로 어찌 여기에 제대로 살피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성의장(誠意章)과 호변장(好辯章)주 77) 두 장에 공부가 지극하지 못해서이니, 여기에 더욱 유의하기를 바랍니다. 근래에 주자가 여백공(呂伯恭)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는데,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해져서 부정한 학설이 번갈아 일어나고 그 외의 분분한 것은 진실로 우선 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백공과 같이 현명한 사람도 오히려 익숙히 보고 들은 것에 안주하여, 사람들이 경전을 왜곡하고 성인을 무함하여 제멋대로 이설(異說)을 일삼는 것을 보고도 그다지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사람은 또한 무슨 마음으로 자기 한 몸을 위하는데 안주하여 격렬하게 말하고 엄하게 논함으로써 한 세상의 혼미함을 깨우치는 일에 주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세상에 이 책임을 맡은 사람이 있다면 제가 어찌 이처럼 고생스럽게 언성을 높이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나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한 말입니다. 이와 같은 날을 당하여 우리 사익(士益)과 같이 현명한 사람도 문인들이 선사를 무함하고 원고를 고쳐서 제멋대로 간사하고 패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도 깊이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자는 진실로 또한 무슨 마음으로 스스로 편의에 안주하여 격렬하게 말하고 엄하게 논함으로써 변명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동문 군자 가운데 이 책임을 맡은 자가 있다면 저도 또한 이처럼 고생스럽게 언성을 높이겠습니까? 또 저가 유독 형에게만 언성을 높이면서 그만두지 않는 것은 또한 이유가 있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살펴보면 듣기를 싫어하는 뜻이 있는 것 같았으니, 형의 잘못입니다. 젊었을 때에 산재(山齋)에서 서로 선생과 제자 역할을 하면서 장기간 공부했던 일과 30년 동안 영계(瀛契)에서 서로 손님과 주인 역할을 하면서 우호를 다졌던 일을 어찌 생각지 않습니까? 비록 교묘한 자가 사이를 벌리려고 해도 벌릴 틈이 없고, 불화를 만들려고 해도 붙잡을 자취가 없으니, 그 친함이 어찌 다만 동문과 옛 친구이기 때문일 뿐이겠습니까? 저는 늘 망령되게 고인의 '성패와 영욕을 모두 내가 책임진다.'는 생각주 78)을 또한 정이 중한 벗에게 미루어 쓸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문(師門)에 변고가 있기 전부터 일찍이 이미 일이 있을 때마다 곧장 경계하였고 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또한 오늘날의 마음이 도움을 청하고 당을 도우려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만약 형의 사람됨이 일종의 자기 견해만 옳다 하거나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무리와 같다고 한다면 또한 이미 오래 전에 세상에서 서로 잊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마음은 공정하고자 하고, 견해는 정밀하고자 하며, 의론은 반복해서 중정(中正)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호남과 음성 사이에서 상세히 살펴서 가부가 없고자 하다가 제가 '불언지교(不言之敎)'로 질문하자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오진영이 〈정절사전(鄭節士傳)〉을 지은 뒤에 의론에 해가 없고 저의 변론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가 제가 누차 말씀드린 것으로 인하여 견해를 고쳤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오진영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의서(擬書)에 말을 바꾼 것을 보고 무함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마침내 또한 선사를 무함했다는 옛 견해를 도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투약하고 효과를 보아서 나의 마음을 위로한 자로는 형과 같은 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잘못을 보고 기꺼이 말씀을 드렸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세 번 생각한데 따른 의혹주 79)과 재차 헤아린 데 따른 잘못주 80)이 없을 수 없어서 또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설을 만들어 "처음에는 비록 무심하였으나 끝내는 선사를 해치게 되었다."는 이전의 의론을 버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주 번복하고 자주 잘못되어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나의 말을 길게 하는 것은 또한 형과 같은 이가 없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지난날로 인하여 앞날을 헤아려보면 또한 형이 멀리가지 않고 돌아올 날이 있음을 알고 있으니, 비록 언성을 높이고자 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아, 형과 우리는 모두 늘그막이 되었으니 허물을 고치고 덕을 진취하는 것이 하루가 급한데, 저의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은 또한 편지 머리에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이런 간곡한 말로 바라건대 친구가 장차 죽으려 하면서 좋은 말을 남긴 것이라고 보아서 기쁘게 들어줌이 어떻겠습니까? 비록 말은 다하지 못하고 글로 모두 표현하지 못했으나 기력이 이미 피로하고 붓도 닳아졌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이에 그칠 뿐입니다.
형의 편지에 "유서(遺書)와 면명(面命)은 그 형세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궁구하여 말해보면 선사를 얕게 알았다고 하겠습니다. 오진영의 이른바 '면명'이란 것이 무함임을 어찌 유서의 출현을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저는 일찍이 유서가 아직 나오기도 전에 윤고문(輪告文) 초안을 작성했는데,【갑자년(1924) 7월의 통문은 제가 작성한 윤고문 초안을 따라서 모두가 논하여 가감한 것이다.】 선사의 평소 자정(自靖)한 의리로 인의(認意)가 없었음을 밝히고, 선사의 원고 가운데 "오늘날 선비들이 왜에게 청원하여 교궁(校宮 향교)을 보존하고서 성현을 높힌 공로로 자처하는 것은 너무나 염치가 없는 짓이라고 말할 수 있다."주 81)라고 한 일절의 말로 증명을 하였습니다. 형은 여기에 대해 선사를 깊이 안 것으로 허여하겠습니까, 허여하지 않겠습니까?.
주석 69)붕우……것
《주역(周易)》 태괘(兌卦) 상전(象傳)에 "붙어 있는 못이 태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들과 강습한다.[麗澤, 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
주석 70)친구……것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벗들끼리는 충심으로 말해 주어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忠告而善道之]"는 공자의 말과 "군자는 학문을 통해서 벗을 모으고, 벗을 통해서 자신의 인덕을 보강한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는 증자(曾子)의 말이 보인다.
주석 71)덕업을……것
여씨향약(呂氏鄕約)은 송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이다. 덕과 업을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허물과 그른 일을 서로 경계하고[過失相規],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근심스럽고 어려울 때 서로 구한다[患難相恤)]는 네 조목인데,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소학(小學)》 권6 〈선행(善行)〉
주석 72)삼성(三省)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증자는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반성하노니, 남을 위하여 도모해 줌에 충성스럽지 못하였는지, 친구와 더불어 사귐에 신실하지 못하였는지, 스승에게서 전수받고 익히지 못하였는지 하는 것이다.[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라고 하였다.
주석 73)선사가……말씀하였다
후창이 갑자년(1924)에 김윤승에게 답한 편지를 참조하면, 오진영은 오사익에게 보낸 편지에 "선사가 《오현수언(五賢粹言)》을 인가한 설은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표준을 세우는 마음이기 때문에 꺼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였다."라고 하였다. 《後滄集》 권7 〈답김윤승(答金允升)〉
주석 74)새매가……뜻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기사에 "자기 임금에게 무례한 자를 보면 새매가 참새를 모는 것처럼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한다.[見無禮於其君者, 誅之如鷹鸇之逐鳥雀也]"라고 하였다.
주석 75)위원리(魏元履)가……날
향인(鄕人)이 호문정(胡文定)의 사당을 세우려고 하자 진준경(陳俊卿)과 진양한(陳良翰)이 작은 절개를 꼬집어 의심하니 위원리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분노하였다고 한다.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 권10
주석 76)오진영이……것
전우가 신혁균에게 보낸 편지에 "今則無服而爲有服,與大喪內喪有間,故成服日只用白衣白笠而己矣"라고 하였는데, 오진영은 이를 "今則無服而爲有服歟"로 고쳤다는 것이다.
주석 77)성의장(誠意章)과 호변장(好辯章)
성의장은 《대학장구(大學章句)》 전 6장을 가리키고, 호변장은 《맹자(孟子)》 〈등문공하〉의 호변장을 말한다.
주석 78)고인의……생각
전우가 김동훈에게 보낸 편지에 "고인이 말하기를 '저가 하루라도 나를 스승으로 섬겼다면 그 평생의 성패와 영욕을 모두 내가 책임진다.'고 하였다.[古人言彼一師我. 其平生成敗榮辱, 俱我任之]"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간재집(艮齋集)前編》 권4 〈시김동훈(示金東勳)〉
주석 79)세 번……의혹
노(魯)나라 계문자(季文子)가 어떤 일이든 "세 번 생각한 뒤에 행한다.[三思而後行]"라고 하자, 공자가 "두 번이면 된다.[再斯可矣]"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주석 80)재차……잘못
사람이 처음에는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공연한 의심을 하면 자꾸만 틀리게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정명도(程明道)가 일찍이 창고 안에 있으면서 늘어서 있는 긴 행랑의 기둥이 몇 개나 되는지 속으로 세어 보았다. 그러고는 혹시 잘못 세지 않았는지 의심하여 다시 세어 보니, 세어 볼 때마다 숫자가 틀렸다. 이에 사람을 시켜 기둥 하나하나를 두드리며 세어 보게 하니, 처음에 세어 본 것과 부합하였다 한다. 《近思錄》 卷4 〈存養〉
주석 81)오늘날……있다
《간재집(艮齋集)後編)》 권17 〈화도만록(華島漫錄)〉에 보인다.
答吳士益 己卯
弟年近六旬,疾病日侵,大限將近,矧此年荒促之死,固不足惜,惟恐未死前,錯見一非理,誤行一非義,永爲地下之恨。惟其自志之如此,故見同人之錯誤,不忍越視之意,比前益切而不己。蓋朋友相與之道: 麗澤講習,著於《易‧象》; 忠告輔仁,見於《論語》; 德勸過規,列於《呂約》。竊觀今世學人,於忠告、規過一事,未有聞焉。此非但以末季友道之喪,人己之間,終有彼此之分,故一體之仁,有所難行故也。於是又以意曾子之三省,一則曰謀人不忠,二則曰交友不信, 而多一與人之意。以視人猶己,常情所難,故雖曰自省,而亦欲以勉後學歟? 由是而論,見友有過,才生越視之心,是不忠不信。弟於近日實有是懼,他人猶然,况於兄乎? 他事猶然,况乎關先師乎? 兄於陰震事,旣還守"不可不謂誣師"之定見,則吾不須多言。但旣然而又曰"出無心非害師",此何說也? 弟以爲旣謂之誣,則不可謂出無心非害師; 出無心非害師,則不可謂誣,二者不能兩立。如出無心非害師,則宜其改之之不暇,以其不改觀之,知其有心而害師,此一言而可決也。遇閱舊篋,得兄丙寅冬書,有曰: "彼之初心,雖出於息異論印師稿,而非有害師底心。然而援古證今,惟恐己言之不立,至謂'先師不諱公言'之極而乃己。然則初雖無害師底心,而終易至於害師。" 此時此論,亦頗近正,今旣還守定見而獨棄此論,可怪也已。錦吳"性師心弟"之譏,見弟辨而隨卽辨之,著成一篇,可仰有鷹鸇之志於衛師矣。然內宄之禍大於外敵之患,志節之誣重於議論之爭,胡不以辨錦吳者先辨陰吳也? 其或以生而親近者有難,而死而疎遠者可易,故雖兄之賢,亦涉世態歟? 鳴呼! "性師心弟"之本自聖訓而無可疑者,人猶勒加以邪說害正之目,而况於認意、認敎之出自弟子而若可信者,諸家之譏罵又當如何,而作《田艮齋傳》者,豈獨李承旭一人乎? 吾恐不知德者作,元履扼腕之日,諸公護陰之罪,有不得辭,而區區今日之辨,或與有力也。且兄之意有不可知者。弟之前書,以甲辰歲先師所處純明妃服制,有所云云,主言震書所稱"年病俱極,雖親喪莫能持衰"之說之爲誣師,而引先師是歲明憲皇后喪服衰望哭兄我共見事而證之。又言震之就申赫均書,改"與"以"歟",刪其下十八字,使受衰之文之爲改稿,而以變亂事實、䵝昧禮意斥之也。兄乃掉了誣改之實而不之答,但擧不受衰只用白衣笠之說而曰: "盛論,誠然誠然。" 鄙見亦如此,故以書詰問,而答語"多可疑,是則誠可歎也"云云,有若今日追講禮說者。然是果何意? 誣師而使有六十而未持親喪之妄言,改稿而使參酌禮令得中之義歸於不明者,不敢曰可斥可惡,而但曰可疑。可疑者,是果何意? 雖然,以兄之明豈有失照於此也? 特於誠意、好辯兩章,功有所未至,願於此加之意焉。近讀朱子與呂伯恭書,有曰: "世衰道微,邪詖交作,其他紛紛,固所不論。而賢如吾伯恭者,亦尙安於習熟見聞之地,見人之詭經誣聖,肆爲異說,而不甚以爲非。則如某者誠亦何心安於獨善,而不爲極言覈論以曉一世之昏昏也? 使世有任其責者,某何苦譊譊若是耶?" 此正道得吾之心事也。當此之日,賢如吾士益者,見門人之誣師改稿,肆爲奸悖,而不深以爲非,則如澤述者,誠亦何心自占便宜,而不爲之極言覈論以辨明也? 使同門君子有任其責者,澤述亦何苦而譊譊若是耶? 且吾之譊譊,獨於哀兄而不置者,亦有說焉。竊觀來書,似有厭聞之意,兄其過矣。 盍思夫山齋長課互作師生於小少之日,瀛契講信迭爲賓主於三紀之年? 雖有巧者欲行間而無隙可乘,構釁而無跡可因,其親也豈但同門舊要而己哉? 每嘗妄謂古人成敗榮辱俱我任之之意 亦可推用於情重之友。故自吾門有變之前,早己因事直規而得兄之感謝,則亦可知今日之心非出於請援助黨也。且若兄之爲人,如一種自是己見者及朝漢暮楚輩,則此亦相忘於江湖久矣。乃不然而心欲其公,見欲其精,論欲其反覆而歸於中正。是以始之欲詳審於湖陰而無所可否,見弟質之以不言之敎,而曰"不可不謂誣師"。次之謂震作《鄭傳》後,論無害義,以弟辨爲不然,被弟累告而改見。三之見震擬與人書變說爲不誣,而有多少往復,竟亦還守謂誣之舊見。蓋投藥見效而慰我心者,莫兄若也。此弟所以見過而樂告者也。然而不能無三思之惑、再數之失,又作"出無心非害師"之說,而欲棄初雖無心終至害師之前論。頻復頻失,苦我心而長我說者,亦莫如兄也。雖然因往推來,又以知兄不遠復之有日也,則雖欲不譊譊,不已得乎? 嗟乎! 哀兄吾儕俱屬晩境,改過就德,日急一日,而弟之餘日無多,又有如書首所陳者。凡此縷縷,幸視爲故人將死善言而喜聞之,如何如何? 雖音未盡而辭不窮,柰力旣疲而筆亦秃何? 只得之此而已。
兄書謂: "遺書、面命,勢不兩立,故不可不謂誣師,非曰不然。" 若究言之,則可謂淺知先師也。震所謂面命之爲誣,何待遺書之出? 弟則早草輪告文於遺書未出之前,【甲子七月通文,是因弟輪告本草而僉議加减者。】 而以先師平日獻靖之義明其無認意,引大稿中"今之士請願於彼, 得存校宮,自居以尊聖之功,可謂無恥之甚"者一節語而證之矣。未知兄於此不以深知先師許之也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