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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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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사익에게 답함(答吳士益 己卯)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8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8.TXT.0016
오사익에게 답함
편지에 형과 저가 음성 오진영을 대처하는 방법이 같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인성(人性)의 강유(剛柔)와 완급(緩急)이 서로 달라서 한 판에 찍어낸 것과 같을 수 없다고만 말했다면 혹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선사를 무함한 행위가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또한 장차 저로 하여금 형에 대해 알 수 없다는 탄식을 자아내게 할 것입니다. 그가 만약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할 의도가 없었다면 배척을 당한 날에 마땅히 즉시 태도를 바꿔 사과할 겨를도 없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비록 죽더라도 말을 바꾸지 않겠다."라고 하였고, 작년에 형에게 보낸 편지에 또 "선사가 참으로 천지가 청명한 날에 간행할 뜻이 있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명확하게 인의(認意)가 있었다고 말한 것이니, 이에 형은 비록 그를 보호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진영이 고치고 삭제한 것을 변명한 선사의 원고 가운데 신혁균(申赫均)에게 보낸 편지를 적어서 보여주었는데, 완전히 이치에 맞지 않고 다만 그의 심술이 증오할 만하다는 것을 볼 뿐이었습니다. 선사가 일찍이 국상(國喪)를 당했을 때에는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전례에 의거하여 성복(成服)하고 수최(受衰)주 67)하였지만, 순명비(純明妃 순종(純宗)의 비(妃) 민씨(閔氏))의 상(喪)에 이르러서는 수최하지 않고 다만 백의(白衣)에 백립(白笠)으로 성복했던 것은 예(禮)에는 원래 복(服)이 없고 임금이 명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을 입으면 예에 어긋나는 것이고 복을 입지 않았다면 명을 어기는 것이므로, 이에 예와 명의 사이에 참작하여 이와 같이 행하였던 것이니 그 의리는 정밀하고 그 뜻은 깊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변례(變禮)에 처하여 합당하게 처신한 것인데, 그의 말처럼 스스로 사민(士民)과 똑같이 하기 위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신혁균에게 답한 편지에 말하기를 "지금은 복이 없는데 복이 있게 된 경우로 대상(大喪)과 내상(內喪)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성복하는 날 단지 백의와 백립만 착용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지금 만약 복이 있어서 마땅히 복을 입어야 한다면 성복하는 날 나는 마땅히 전날의 국상처럼 수최해야 한다. 그러나 복이 없는데 복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단지 백의와 백립을 착용할 따름이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본문 가운데 이미 "스스로 사민과 똑같이 한다."는 말이 한 글자도 없고, 아울러 "스스로 사민과 함께 한다."는 뜻도 한 점이 없는데, 감히 말하기를 "전에는 관인(官人)으로 자처하여 수최하였고, 뒤에는 스스로 사민과 똑같이 여겨 수최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또한 어찌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여(相與)'의 '여(與)' 자 옆에 '흠(欠)' 자를 붙여서 어조사인 '여(歟)' 자를 만들고, '백의립(白衣笠)' 운운한 부분을 삭제하여 수최를 행한 문장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원고를 고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그는 곳곳마다 선사를 무함하였으니 어느 곳인들 그리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전 갑진년(1094)을 생각해 보면, 선사의 춘추가 64세로 근력이 강건하여 호남 수 백리 밖에까지 출행하였습니다. 명헌황후(明憲皇后 헌종의 계비)의 상(喪)에 받은 최복은 상자에 담아서 도중이라도 매달 삭망(朔望)에는 복을 입고 망곡(望哭)을 했습니다. 이는 천암(天巖)과 예천(禮川)에 갔던 날에 형과 나 그리고 여러 인사가 모두 똑같이 보았는데, 순명비의 상이 바로 그 해에 있었습니다. 그의 이른바 "선사가 '지금은 나이와 병이 모두 지극해서 비록 부모상일지라도 최복을 가지고 다닐 수 없다,'고 하였다."라고 한 것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비슷하겠습니까? 옛날에 '조자룡(趙子龍)은 일신이 모두 담(膽)이다.'주 68)라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보니 오영진은 일신이 모두 무함입니다. 이럼에도 형은 오히려 그사 선사를 무함한 것이 무심한 데에서 나왔다고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주석 67)수최(受衰)
상례(喪禮)에서,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슬픔을 줄여 나가는 절차에 따라 상복을 거친 것에서 점차 고운 것으로 바꾸는데, 옷을 바꾸어 새로 지어 입는 것을 '수최'라 하며, 수최는 '수복(受服)'이라고도 한다.
주석 68)조자룡은……담이다
자룡은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용장인 조운(趙雲)의 자이다. 조운이 담대한 작전으로 조조(曹操)의 대군을 물리치자 유비(劉備)가 "자룡의 일신은 모두가 담이다.[子龍一身都是膽]"라고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68
答吳士益 己卯
示喩兄我所以處陰震之不同。只言人性剛柔緩急之異而不能如印一板,容或可也,至謂彼誣出無心非害師,則又將使我發不可知之歎於兄也。渠若出於無心而不欲害師,則被斥之日,宜卽改謝之不暇,顧乃不然而曰: "雖臨死而不易辭。" 昨年與兄書又謂: "先師果爲天地淸明之日刊行之意耶?" 則是分明言有認意也,於是乎兄雖欲保渠,而不可得矣。

錄示震所分疏改刪師稿中申赫均之書,全不成理,只見心術之可惡也。先師曾當國喪,依渼湖已例成服受衰,至於純明妃喪,不受衰而只用白衣笠成服者,以於禮原來無服,而君上令之。故服之則違禮,不服則違令,於是參酌於禮令之間,而行之如此,其義精矣,其意深矣。正處變而得當者,豈爲自同於士民而然如渠說乎? 故答申書曰: "今則無服而爲有服,與大喪內喪有間,故成服日只用白衣白笠而己矣。" 其意若曰: "今若有服而當服,則成服日,我當受衰如前日國喪。惟其無服而爲有服,故只用白衣笠也。" 本文中旣無一字"自同士民"之語,幷無一點"自同士民"之意,而乃敢曰: "前則自處以官人而受衰,後則自同於士民而不受衰。" 此亦豈非誣師乎? 於"相與"之"與"字傍加"欠"字,作語助之"歟"字,而刪却"白衣笠"云云,使成受衰之文,此豈非改稿乎? 噫! 彼觸處誣師,何所不至? 念昔甲辰之歲,先師春秋六十有四,筋力康健,出行湖南數百里外。明憲皇后喪,所受衰服藏之,行中每朔望,服而望哭。於天巖、禮川之日,兄我及衆人士之所共目覩者,而純明妃喪,卽是歲也。渠所謂"先師曰今年病俱極,雖父母喪,莫能持衰"者,是豈毫髮近似者乎? 昔聞子龍一身都是膽也,今見震泳一身都是誣也。兄尙能保彼之誣師出於無心也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