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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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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사익에게 보냄(與吳士益 戊寅)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8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8.TXT.0013
오사익에게 보냄
얼마 전에 여막에 가서 형과 40여 년간 오랜 사귄 친구로서 의례적으로 조문하고 위로를 했지만 심정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었으니, 졸곡(卒哭) 후에 한 번 방문하는 것은 그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저는 금년부터 온갖 병이 교대로 들어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작년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치지 못했던 안건을 미처 하나로 귀결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진실로 천추의 한이 될 것입니다. 열 번의 편지가 한번 만나는 것만 못하고, 형도 여막을 삼년 동안 지키면서 또한 "긴 세월에 아우가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어찌 대면하여 규명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병든 몸을 이끌고 더위를 무릅쓰며 어렵게 걸어가서 하루 밤낮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혀가 닳고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하여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던 정견(定見)을 회복하기를 바랄 수 있었습니다. 영재종(令再從) 오익부(吳翼夫)가 곁에 있으며 또한 말하기를 "만일 간옹(艮翁)이 인교(認敎)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크게 절의가 손상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형은 끝내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가까운 시일 내에 편지로 뜻을 보여주기를 청하였습니다. 또 형이 과연 속히 도모할지는 모르겠지만 빠른 세월은 사람을 위해 머물지 않으니 병든 몸으로 창가에 홀로 앉아서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으므로 이에 편지로 질문함을 면치 못합니다. 스스로 조급한 것이 남에게 증오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제가 죽은 뒤에는 또한 형을 위하여 저처럼 구제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작년에 형이 마지막 편지에 "이미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10년 전에 의론도 아니고, 또 '증거가 명백하여 꾸며서 지어낸 것도 아니다.'라는 저번 편지 중에 말한 것도 아니다. 저쪽을 따른 것도 아니고 또한 이쪽을 따른 것도 아니며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사를 무함한 의론이 아니라면 이는 선사가 '인교'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고, 증거가 명백하여 꾸며서 지어낸 설이 아니라면 이는 꾸며서 지어낸 것을 증명할 것도 없고 '인교'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교가 있다는 것은 선사를 무함한 것이며, 인교가 없다는 것은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닙니다. 인교가 있다는 것과 인교가 없다는 것, 선사를 무함했다고 것과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사이에 하나의 터럭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무릇 천하의 시비는, 이것을 따르면 저것을 위배하게 되고 저것을 따르면 이것을 위배하게 됩니다. 이제 "저쪽을 따른 것도 아니고 또한 이쪽을 따른 것도 아니며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든 것이었다."고 하였으니, 선사를 무함한 것도 아니고 선사를 무함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이에 무슨 하나의 별도의 의론이 있다는 것입니까? 만일 있다고 말한다면 기발할 것이니,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 때 고상한 의론을 듣지를 못했고 먼저 변론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의(盛意)가 과연 여기에 있는지를 일전에 서로 만났을 때 형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아서 마음이 심히 답답했습니다. 요컨대, 이 별도의 의론을 듣고서 서로 함께 설파(說破)해야만 비로소 일이 끝날 것입니다. 어찌하여 명백하게 보여주지 않고 다만 "천하의 의리가 무궁하다"는 말로 활시위만 당겨놓고 쏘지는 않는단 말입니까? 만약 형도 인교에 대해 분명하게 입장을 표명하여 오진영이 형에게 답한 편지의 말이 화반탁출(和盤托出)주 57)한 것과 같다면, 저 또한 마땅히 함구하고 붓을 놓아 다시는 이 문제로 형에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찌 반드시 이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시간과 편지 글을 낭비하며 완료하지 못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의리(義利)의 구분을 정밀하게 규명하고 선사의 마음을 깊이 인식하여 충고하는 뜻을 잘 헤아려 분명하게 회답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 선사를 무함하는 것은 큰 죄이고 사람을 무함하는 것도 죄입니다. 저는 형이 머뭇거리다가 똑같이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귀결될까 염려합니다. 형은 제가 너무 심하여 혹여 다른 사람을 무함하는 것으로 귀결될까 염려합니다. 둘이 서로 염려하는 것이 모두 다 생각이 있는 것이니, 깊은 교분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형은 갑자년(1924)에 화도(華島)에서 "유서(遺書)가 나왔으니 음성의 죄가 더욱 무겁게 되었다.[遺書出而陰罪益重]"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묘년(1927)에는 '불언지교(不言之敎)'를 가지고 저에게 편지를 보내어 "옹서를 보고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視甕書,更覺分明,到此地頭,不可不謂之誣師]"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익중(益重)'의 '익(益)' 자와 '갱각(更覺)'의 '갱(更)' 자를 보면 유서 및 불언지교를 보기 전에 이미 그가 선사를 무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형이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한 정견(定見)이 단지 10년 전 정묘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변고가 출현한 시초인 계해년(1923)에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이때에는 제가 진실로 형을 위해 염려할 필요가 없었고 형 또한 너무 심하다고 저를 염려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병자년(1936) 겨울에 오진영이 증거로 삼은 선사가 묘적(墓籍)을 허락했다는 것과 이유흥(李裕興)의 편지를 얻고서, "증거가 분명하여 꾸며서 지은 것이 아니다."고 말하고 14년 동안 지켜왔던 정견과 제가 묘적과 원고는 똑같은 사례가 아니라고 한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유흥의 편지에는 인가를 받으라는 뜻이 전혀 없었고, 이때에는 또 인가를 받아 인쇄하도록 한 적이 없었다는 의론이 많아서 끝내 이치에 맞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할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또 "증거가 명백하여 꾸며서 지은 것이 아니다."는 설을 버리고 마침내 "10년 전의 의론이 아니며 또 이전 편지 중의 설도 아니다. 저쪽을 따르지도 않고 이쪽을 따르지도 않고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들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론인지 모르겠습니다. 우암 선생(尤庵先生)은 일찍이 "양쪽의 사이에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자는 끝내 반드시 음(陰)과 이(利)와 흑(黑)으로 들어간다.'주 58)라고 훈계하였습니다. 제가 형을 염려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고, 형이 저를 염려하는 것도 의와 이, 음과 양, 흑과 백을 구별하는 것이 너무 심한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다 말하는 가운데에 또한 다른 것이 있습니다. 대저 형이 이처럼 하는 것에 대해 그 마음의 소재를 저는 실로 알지 못합니다. 이전의 견해는 거친 것이 있었지만 만년에는 더욱 정밀해졌다고 말한다면, 형은 젊었을 때에 고명함으로 세상에서 칭송하였으니 사람들이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전에는 분명한 증거가 없었는데 이후에 이를 보았다고 한다면, 제가 변론한 것과 형이 승복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시원하게 정견을 회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본디 별도의 의론이 있다."라고 하니, 그 마음의 소재를 저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40년의 오랜 교분으로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인륜의 변고이니 내가 어찌 감히 형을 의심하겠습니까. 다만 사실에 근거하고 자취를 따르다보니 의혹이 불어남을 면하지 못한 점은 있으니, 나의 밝지 못함을 스스로 한탄할 뿐입니다. 아, 나의 덕이 믿음을 주지 못하여 사람들의 구설이 아직도 여전합니다. 매번 의리와 관계된 것으로 친밀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고하면 말은 믿음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노여움을 사서 끝내 해를 당하니, 근래에 현암(玄岩)의 일 같은 것이 또한 한 가지 사례입니다. 이른바 "임금이 덕을 닦지 않으면 배안의 사람들이 모두 다 적국의 사람이 된다."주 59)라는 것이 이런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바야흐로 또한 후회하고 함구하여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끝내 측은과 수오의 마음을 천성적으로 타고 난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이 함정에 빠지는 것을 보고 차마 구하지 않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의 패악과 망령됨을 보면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침에 그러한 행동을 후회했다가 저녁이면 또다시 그러하다."주 60)라고 경계한 율옹(栗翁)의 말에는 비록 부끄럽지만,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의 인(仁)을 알 수 있다."주 61)라고 한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또한 생각해볼 만합니다. 또 형은 본바탕이 자애롭고 어질며 마음 씀씀이가 공평하고 용서를 잘합니다. 말을 하면 믿음을 받는 것은 비록 기필할 수는 없을지라도 노여움을 당하고 해를 받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이 점이 바로 형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감히 마음을 놓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사의 원고를 고치는 것은 또한 어떠한 대죄입니까. 다만 인가받았다고 무함함으로써 선사의 전체를 무너뜨리는 죄는 더욱 큰 것이기 때문에 항상 뒤가 되었을 뿐입니다. 일전에 형이 진주본(晉州本)이 수정본(手定本)을 고쳐서 선사의 예의(禮意)와 사실(事實)을 어지럽힌 것을 눈으로 보고 비로소 그 원고를 고친 죄를 알았습니다. 이미 그 죄를 알았다면 성토하고 변론해야 했고, 변론하고 성토할 수 없으면 또한 그만두어야 했는데, 마침내 한 장의 종이에 별도로 쓰기를 "장차 권순명(權純命)에게 묻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권순명과 오진영이 만약 "이리 고쳐야만 완벽하다."고 한다면 형도 장차 그렇게 여기겠습니까? 저는 형의 마음 씀이 이와 같은 부분에 대해 심히 복종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만약 본문을 완벽하다고 여긴다면 선사의 문장을 고칠 이치가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원래 이런 이치가 없기 때문에 일전에 형과 제가 선장(先丈)의 시고(詩稿)를 받들어 읽고 그 온당하지 못한 글자가 있더라도 끝내 감히 손을 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진영이가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에 대해 변론하고 성토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고 그에게 물어서 그 설을 듣고자 하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뜻입니까? 형이 제가 오진영을 변론하는데 힘쓰는 것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런 정력을 공부에 옮겨 쓴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라고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형은 우선 말씀해 주기 바랍니다. 시비(是非)를 밝히고 사정(邪正)을 분별하여 격물치지를 기르는 것과 사문(師門)의 도리를 보호하고 제자(弟子)의 직분을 닦아서 윤리를 다하는 것이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것 외에 공부로서 학문을 하는데 해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한번 듣고 싶습니다.
오진영이 지산(志山)을 대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꼭 말할 필요가 없고, 다만 갑자기 관계를 끊었다가 갑자기 달라붙기도 하면서 이를 통해 혹은 사람을 빠뜨리는 함정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유혹하려는 계제로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가증스러울 뿐입니다. 심술(心術)의 교활하고 험악함이 이와 같고 보면, 그가 인설(認說)에 대해 이미 불가하다고 여겨 자기 죄에서 빠져나갔다가 곧이어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고 하면서 선사에게 죄를 씌운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대체로 근본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언행이 있었던 것입니다.
근래 북도(北道)의 동문 천하운(千河運)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나와 천하운이 말을 나누다가 오진영의 편지에 인가를 받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다고 하였다가 또 "원래 선사의 불언지교를 따랐다."고 운운한 대목에 이르자, 천하운이 말하기를 "이런 이유로 나 또한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라고 비판을 하였다."고 운운하였습니다. 그가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다.'고 한 것은 바로 내가 "그의 말로 인해서 그의 죄를 정하였다.'고 말한 뜻입니다. 저 먼 고장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 공론이 있었습니다. 형은 호남에 살면서 이 중의 의리를 익히 들었고 그의 정상을 깊이 알고 있는데도 오히려 저의 변론이 비정하다고 하니, 진실로 무슨 소견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문(斯文) 이기완(李起完)은 자(字)가 원호(元浩)이고 임실군(任實郡)의 명망있는 선비입니다.【지금 재종제(再從弟) 오해준(吳海準)의 처종형(妻從兄)이다.】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남원(南原) 월곡(月谷)의 정모(丁某)는 나의 종질(從姪)의 사위입니다. 정모가 '오석농(吳石農)이 나를 보고 〈선사가 원래 원고를 인가받으려는 뜻이 있었다.〉 하였다.'고 운운하였습니다. 내가 듣고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정모에게 말하기를 '나도 일찍이 간옹을 모시며 덕을 보고 말씀을 들어서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간옹이 어찌 이런 말을 했겠는가.'라고 운운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완은 문인이 아닌데도 오히려 간옹의 마음을 알아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은 문인으로서 음성의 무함을 미워할 줄도 모릅니다. 아, 사람의 견해가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작년에 오진영이 송병진(宋秉眞)에게 "선사가 평소에도 원고를 인가받으려는 뜻이 있었다."고 하면서 아무개의 말과 모종의 일을 인용하여 증명을 하자, 송병진이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다면 간옹도 파쇄당할 것이다."라고 하니, 오진영이 감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는 성산(惺山) 임종두(林鍾斗)가 송병진에게 듣고 변문(辨文)에 올린 내용입니다. 오진영의 무리는 "송병진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가리고 숨겼습니다. 지금 그가 정모와 나누었던 말을 들으니, 이는 그가 다반사처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송병진에게 한 말도 숨길 수 없었으니, 만약 성토하는 군인을 지금 풀어 놓는다면 정모와 나눈 말도 감히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려 들 것입니다. 변론하고 성토하는 공로가 이와 같은 자가 있는데도 알고 있는 자가 매우 적으니, 진실로 개탄스럽습니다.
형은 매번 '강태걸(姜泰杰)이 기소한 일은 어찌 음성(陰城)이 시켜서 한 것이겠는가. 자취를 살펴보고 실상에 의거해보면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의 말씀과 같다면, 정재장(靜齋丈)이 오진영에게 보낸 편지가 어찌 검국(檢局)에 들어가서 강태걸을 증명하는 편지가 되었겠습니까? 오진영과 가장 친밀하다는 권순명(權純命)은 어찌 검국(檢局)에 들어가서 강태걸(杰)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하물며 강태걸은 오진영의 문인으로서 "오진영의 명을 받들어 인쇄한다."고 했던 말이 강태걸의 광고문(廣告文) 중에 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형은 늘 이와 같은 곳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공평하게 하려고 힘을 씁니다. 이것이 저가 따를 수 없는 곳입니다.
"선장(先丈)의 문자 일은 앞뒤의 의론이 서로 다름을 면치 못한 것은 혹 효사(孝思)에 유감이 될까 해서 편지 서두에 '송(悚)' 자를 썼던 것입니다. 보내온 편지에 …… 소견을 고치고 이치를 따르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는 것에 모두 탄식하고 우러르니, 매우 성대하고 매우 성대합니다." 이는 연전에 오진영이 저에게 답장한 편지 내용입니다. 내가 만약 전표(傳表)를 희롱하여 그에게 수정을 당한 것이 지금 그가 이 편지 중에 "앞뒤의 의론이 서로 다름이 송구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한다면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내가 만약 전표의 혐의 때문에 의리를 빌려서 보복하기를 지금 그가 이 편지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우러른다."라고 말한 것처럼 한다면 또한 그가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이는 또한 마땅히 그의 앞선 편지 중의 말로 지금 사람을 무함한 죄를 다스려야 할 뿐입니다.
주석 57)화반탁출(和盤托出)
음식물을 소반에 차려서 들고 나온다는 뜻으로, 일체 남기지 않고 드러냄을 이른다.
주석 58)양쪽의……들어간다
우암 송시열은 " 대개 인정이 이를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음과 양이 있고, 일에는 의와 이가 있으며, 물건에는 백과 흑 이 있는데, 이는 일상생활 속에 늘 서로 접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라."라고 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34 〈시제자손질손등(示諸子孫姪孫等)〉
주석 59)임금이……된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무후(武侯)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의 중류(中流)를 내려가다가 오기(吳起)를 돌아보고는 산천이 험고한 것이야말로 위나라의 보배라고 자랑하자, 오기가 "사람의 덕에 달려 있지, 산천의 험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통치자가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적국의 사람이 될 것이다.[在德不在險, 若君不修德, 舟中之人盡爲敵國也]"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 권65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주석 60)아침에……그러하다
《격몽요결(擊蒙要訣)》 〈혁구습장(革舊習章)〉에 보인다.
주석 61)허물을……있다
공자는 "사람의 허물은 각각 그 무리에서 나오는 것이니, 허물을 보면 인을 알 수 있느니라.[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이인(里仁)〉
與吳士益 戊寅
日者造廬,以哀兄四十年舊交,隨例吊慰,情有未盡,卒哭後一問,在所不已。亦以弟自今年,百病交侵,死亡無日,昨歲往復未了之案,不及歸一而逝,則誠爲千古之恨。十書不如一面,而哀兄守廬三霜,亦云"長歲月,非弟親造,何以面究?" 所以扶病冒熟,顚倒間關,得以一晝夜盡心輸誠,弊舌渴口,冀復"不可不謂誣師"之定見。令再從翼夫在傍,亦言"若言艮翁有認敎,則大損節義",而兄終不快答。歸時,請從近以書見意。又未知兄果能亟圖,而遽遽歲月,不爲人留,病牕獨坐,懷不知裁,玆不免以書質之。自知躁急,爲人可憎,然我死之後,亦無爲兄救拔如我者矣。昨年,兄之最後書云: "旣非十年前不可不謂誣師之論,又非前書中證據明非白撰之說。旣不從彼,又不從此,而別爲一論。" 蓋非誣師之論,則是謂師有認敎也; 非證據明非白撰之說,則是謂無證白撰而無認敎也。有認敎者,誣師也; 無認敎者,非誣師也。有認敎無認敎,誣師非誣師之間,間不容髮。凡天下是非,從此則違彼,從彼則違此。今曰"旣不從彼,又不從此,而別爲一論",則未知非誣師,非非誣師,非此非彼之間,有何別般一論耶? 如曰有之,厥亦可奇,願一聞之。那時未及聞高論,而先有所辨。然未知盛意果在於此,日者相晤,兄亦不明言,心甚爲菀。要之聞此別論而相與說破,然後始得了事矣。何不明白示及,而但以"天下義理無窮"之語引而不發乎? 若兄亦明言認敎,如震答兄書中語之和盤托出,則弟當緘口閣筆,不復以此爲兄告矣。何必如此支離,費得時日書詞而莫之了耶? 惟願精究義利之分,深識先師之心,善諒忠告之意,明以回示也。嗚呼,誣師大罪也,誣人亦罪也。吾則慮兄之依違而同歸於誣師。兄則慮弟之已甚,而或歸於誣人。兩相爲慮,俱皆有思,非深交,烏能至此? 然兄於甲子華島,不曰"遺書出而陰罪益重"乎? 丁卯,以"不言之敎"與弟書,不曰"視甕書,更覺分明,到此地頭,不可不謂之誣師"乎? 觀"益重"之"益"字,"更覺"之"更"字,則見遺書及"不言之敎"前,已知其爲誣師矣。是則哀兄謂震誣師之定見,非但在十年前丁卯而己,在變出之初癸亥矣。是時,吾固不須爲兄慮,而兄亦不以已甚慮弟矣。乃於丙子冬,得震所證先師墓籍之許及李裕興書,謂"證據明非白撰",而棄十四年所守之見及其被弟墓與稿之非一例。李書之絶無認意,是時亦多無認印之辨,而終無柰難不服於理到之言,則又棄"證據明非白撰"之說,而乃曰"旣非十年前論,又非前書中說,旣不從彼又不從此,而別爲一論"。吾未知"別爲一論"者,究竟何論,而尢庵先生嘗有"依違兩間者,終必入於陰與利與黑"之訓。我之慮兄,正在於此,兄之慮我,亦在於別白義利、陰陽、黑白之已甚。然則俱皆有辭之中亦有可異者存焉。大抵兄之所以如此者,其心所在,我實不知。謂前見粗在而晩覺更精也,則兄之早年高明,世所稱道,使人見信難矣; 謂前無明證,而後乃見之也,則弟之所辨,兄之所服,又如此矣。而猶不快復定見,而云"自有別論",其心所在,我實不知。雖然,以四十年舊交,而不知其心,則人倫之變,吾豈敢疑兄? 但據實因跡而不免滋惑則有之,自恨吾之不明而己。嗟呼,吾德未孚,人口舌是尙,每以義理之關,告於親密之地,則言不見信,反見其怒,而終之受害,如近日玄岩事亦一也。所謂"君不修德,舟中之人,皆敵國者",非此耶? 方且噬臍咋舌,誓不復然。然終無柰惻隱羞惡得之於天,見人陷溺而不忍不救,見人悖妄而不能不惡。"朝悔其行,暮己復然",栗翁之言,雖可慙; "觀過 斯知仁",孔子之訓,亦可思。且若哀兄者,慈諒成質,平恕爲心,言之見信,雖不能必,見怒受害,決無有是此。則自信爲兄知心之友,故敢放心言之耳。
改師稿,亦何等大罪? 特以認誣壞却先師全體之罪,有尢大者,故常爲後焉耳。日前兄目見晉本之改手本而變亂先師禮意事實者,始知其改稿之罪。旣知其罪則討之辨之,不能辨討則亦己焉矣,乃別錄于一紙曰: "將以問諸權純命。" 權、吳若曰"以此改之然後盡善"云,則兄將以爲然乎? 吾於兄之用心如此等處,深所不服。且若果盡善於本文,則天下有可改師文之理乎? 惟其元無此理,故日前兄與弟奉閱先丈詩稿,其有未稳字,終不敢犯手者,此爾。今於震之改師稿也,非惟不辨之討之,乃欲問諸彼而聞其說,此誠何意? 如聞哀兄以弟之力於辨震語人曰: "以此精力移用於工夫,則豈不善乎?" 有諸? 有之,兄且道! 明是非、分邪正以長格致,閑師道、修弟職以盡倫理,非工夫乎? 如有外此而可謂工夫不害爲學問者, 願一聞之。
震之所以處志山者,吾不必言,特以其乍絶乍附,或以爲陷人之穽,或以作誘人之機者,爲可惡耳。心術之巧險如此,則其於認說,旣以爲不可而脫己罪,旋以爲從敎而加先師者,益以明矣。蓋有是本源,故有是言行也。
近見北道同門千河運來訪。余與千語及震書旣以認爲誠有不可,又曰"原從先師不言之敎"云云。千曰: "所以吾此亦有自斧自削之評云云。" 其云"自斧自削"者,卽吾所謂"因渠言定渠罪"之意也。逖矣此方尙有公論如此,兄居湖南習聞此中義理,深知彼之情狀,而猶以吾辨爲非情,誠不知何所見也。
李斯文起完,字元浩,任實郡望士也,【今再從弟海準妻從兄】對弟言: "南原月谷丁某,吾之從姪女壻。丁言: '吳石農見我言先師原有認稿之意云云。' 吾聞之,不勝憤氣,謂丁曰: '吾亦嘗侍艮翁,觀德聽言而知其心矣。艮翁而豈有是耶云云。" 李非門人,猶知艮翁之心而不勝憤氣。兄乃以門人而不知惡於陰誣,嗟呼! 人見之不同乃如是乎?
震昔年對宋氏秉眞言"先師平日有認稿之意",引某言某事證之。宋曰: "若如此則艮齋破碎矣。" 震不敢復言。此惺山林丈【鍾斗】聞於宋而登諸辨文者也。震徒云"宋不知何許人"而掩諱之矣。今聞其所與丁某言者,則可知是渠茶飯語。而對宋之言掩諱不得,如使聲討之軍,至今用張,則與丁之言亦不敢露出矣。辨討之功有如此者,而識者甚少,良可歎也。
哀兄每言: "杰之起訴,豈陰所使然? 因跡據實,終有不然者。" 若如兄言,靜丈與震書,胡爲入檢局而作杰證書乎? 震所最親密之權純命,胡爲入檢局而作杰證人乎? 而况杰是震之門人而"承吳先生命而印之"之語在杰廣告文中乎? 兄每於此等去處,不能物各付物,而費力於有意爲公,此吾所不服處。
"先丈文字事,未免前後貳論,或得致憾孝思,書首所以下得悚字。來書云云衆咸歎仰於不少吝於改見從理,甚盛甚盛。" 此年前震之答弟書也。我若幻弄傳表,被渠釐正,如今渠說此書中"前後貳論爲悚"之云,何以區處? 我若爲傳表之嫌,而假義報復,如今渠說此書中"衆咸歎仰,甚盛甚盛"之云,又何以出於渠口也? 此亦當以渠前書中語治今誣人之罪己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