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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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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사익에게 답함(答吳士益 丁丑)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8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8.TXT.0010
오사익에게 답함
'불언지교(不言之敎)'는 형이 처음 서모(徐某)의 편지를 보자마자 즉시 저에게 편지를 써서 말하기를, "옹서(甕書)를 보고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으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의 뜻은 분명히 옹서의 편지만 봤을 때 이미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할 수 있었고 이에 이르러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론이 정해진 것이 이미 십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훈(田壎)의 대인설(代認說)주 38)을 들어 운운하였습니다. 저들이 서모의 편지가 나오기 3년 전에 대인설을 크게 써서 널리 알린 것은 형도 눈으로 익숙히 보고 귀로 넘치게 들은 것인데, "그 뒤로 몇 년 동안 의심과 긍정이 정해지지 않았다."라고 하여 마치 대인설을 의론이 정해진 뒤에 처음 들은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비록 다른 사람의 뜻을 잘 체득하는 자가 있어서 그로 하여금 보고 믿으라 하여도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일찍이 편견과 시기심이 없다는 것으로 형을 인정했습니다만, 지금의 모습으로 살펴보면 형도 조금 편견이 있음을 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또한 형이 그에게 사사로이 치우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는 명성과 문장이 사람들로 하여금 바람에 쏠리듯 하게 하여 그 언행을 물을 겨를도 없이 먼 곳에서 서로 바라보매 단지 사모할 만한 것을 보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할 나위 없이 졸렬하여 문장은 볼 만한 것이 없고 명성도 들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거처가 매우 가까워서 그의 과오를 자세히 알고 있어서 단지 미워할 점만 보고 사랑스러운 점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아무개가 어찌 참으로 선사를 무함할 이치가 있겠는가. 아무개가 어찌 스승의 무함을 변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저도 모르게 저쪽이 옳고 이쪽이 그르다는 뜻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앞뒤가 모순되고 시종이 어긋나는 것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이와 같다면 저는 스스로 슬퍼하고 스스로 한스러워할 겨를도 없는데 어찌 감히 다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형과 제가 이와 같은 큰 시비(大是非)와 큰 분합(分合)의 날을 당하여 30년 된 오랜 친구의 정의로써 편지 한 통을 써서 충심을 바쳤으나 효과는 보지 못하면 곧장 '더불어 말할 수 없다.'주 39)는 부류로 돌리는 것은 더욱 감히 할 수 없습니다.
보내온 편지에 '불언지교'의 명백한 근거라고 한 것은 단지 선사가 이유흥(李裕興)에게 보낸 임술년(1922) 편지를 가지고 마치 굳게 산을 등진 것처럼 한 것에 불과합니다. 형이 시험 삼아 자세히 살펴보면, 이 편지의 28자 중에 어떤 글자가 인가를 받아내려는 뜻이 있어서 이런 근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시류를 쫓아가는 음성 사람도 오히려 인가받는 것을 불쾌해 하여 바다를 건너 선사의 문집을 인쇄하려고 했다고 사람들에게 과장하였는데, 선사의 도의(道義)로 문인의 원고를 인간(認刊)하고자 했다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형은 기필코 깨끗하고 깨끗하여 본디 한 점의 흠결도 없는 선사의 편지에 음성도 불괘하게 여기는 '인(認)' 자를 더해서 감히 '불언지교'를 만들어 그가 자신의 혐의는 벗고 선사에게 전가하는 죄악을 돕고서야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형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하려는 이유는 한갓 이때에 인가받지 않으면 인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뒤 시법(時法)이 더욱 엄해진 날에는 바다를 건넌다는 말을 않고 본국 내에서도 인가받지 않은 인쇄가 많았다고 하는데, 제가 아는 바로는 《곤암집(困庵集)》 한 책뿐입니다. 그리고 금년 봄에 있어서는 선사의 편지를 받은 사람인 이유흥의 《성암고(誠庵稿)》의 인쇄도 인가받지 않았으니, 선사가 그때에 인가를 받고자 했다는 말이 어찌 근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음이 슬플 뿐입니다. 음성 사람의 이른바 서모에게 주려던 편지에서 전훈의 대인설 운운한 것은 최원(崔愿)의 읍고문(泣告文)을 말한 것이고, "문집 인쇄를 범론한 것이다."고 한 것은 김세기(金世基)의 읍고문(泣告文)을 말한 것이고, "병오년(1907)과 정미년(1908) 사이에 업자가 대신 인가받는 것을 범론한 것이다."고 한 것은 우형근(禹炯根)의 〈답현통(答玄通)〉을 말한 것입니다. 옛 성인의 책으로 《시경》, 《서경(書經), 《논어(論語)》, 《맹자》 같은 책은 오늘날 간행하여도 옛 성인에게 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목과 연호를 바꾸고서 전훈의 대인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단 말입니까? 《병암집》을 의논하여 간행하기 위해서 이런 가르침이 있었다고 하였는데,【음성이 이자승(李子乘)에게 답한 편지에 처음으로 전훈의 대인설을 언급하였지만 《병암집》을 의논하여 간행한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정재(靜齋)에게 답한 편지에는 출판업자가 스스로 인가받아 책을 간행한다고 하였지만 또한 《병암집》을 언급한 것은 없었습니다.】 선사가 이유흥에게 보낸 임술년의 편지를 교묘하게 끌어대어 그 설을 이었으니, 교묘하기는 교묘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서의 간행이 어찌 《병암집》이 될 수 있겠으며, 병자년과 정축년 사이가 어찌 임술년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대체로 그는 일시적으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계책을 만들고자 하여, 전에 했던 말을 돌아보지 않고 뻔뻔스러운 얼굴로 억지로 말을 하면서, 우매한 자가 속임을 당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아는 자가 간사함을 발견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형은 그를 믿고 의심하지 않고 근거로 삼아 실제로 여기었으니, 제가 매우 답답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몰래 비웃을까 두렵습니다. 형은 또 시험 삼아 생각해보십시오. 성인 문하의 학문은 단지 인(仁)을 구하는 데 있는데, 인을 구하는 방법은 '서(恕)' 자가 큰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주 40)이 '서'를 행하는 일이고 군자의 용심(用心)입니다. 비록 길을 가는 사람이라도 모두 요순(堯舜)의 도로 들어가기를 바라고 불의(不義)에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선사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주 41)으로 여겨서 자신의 원고에 매우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뜻을 같이 하고 도를 같이 하여 심법을 서로 전하는 문인의 원고에 시행했다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만약 음성과 형의 설이 후세에 전하여 믿게 된다면 선사는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통탄하고 통탄합니다.
송약재(宋約齋)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의심과 믿음을 분별함에 정증(正證 정확한 증거)가 없어야만 비로소 방증(舫證)을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하여 "청원하여 발간 배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고 말씀한 유서(遺書)의 정증을 버리고 묘적(墓籍)을 논한 것을 취하여 방증을 삼고자 한단 말입니까? 대저 묘에 문적이 없으면 심지어 무덤을 파고 시체를 태우게 되는 우려가 있으니, '아픔을 참고 훈계를 버리고서 어쩔 수 없이 쓴다.'는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원고를 인쇄하지 않는다면 누가 다시 그것을 상자에서 꺼내어 불에 태울 자가 있겠습니까? 유례(類例)가 같지 않으니 이것은 또한 방증이 될 수 없는 것인데, 마침내 이것으로 확대하고 미루어서 심지어 원고의 인간(認刊)과 관련한 '불언지교'까지 만들어낸 뒤에야 그쳤습니다. 그는 진실로 수완이 그러하지만, 형의 명철함으로 또한 감히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아, 이것은 또한 하늘이 시킨 일이지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다.
선사가 시대에 구애되고 형세에 압박을 받아 말계(末計)를 했다고 운운하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선사는 평소에 스스로를 대하고 남을 가르침에 반드시 제 1등의 도리로 표준을 삼았고 제 2등도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니, 어찌 다시 말계를 논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대개 중(中)은 일정한 체(體)가 없고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약 실제의 구애와 실제의 압박이 묘를 파내고 시체를 불태우는 변괴를 만난 것과 같다고 한다면, 아픔을 참으며 묘지의 문적을 만듭니다. 이것이 중이 있는 곳이 되고 곧 제1등의 도리가 되기 때문에 선사가 허락했던 것입니다. 이미 제1등의 도리가 될 수 있다면 상계(上計)라고 말할 수 있어도 말계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의 구애와 실제의 압박이 없어서 만약 원고가 상자 속에 그대로 있어 아무 탈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급하게 인간을 청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한다면 이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사가 일찌감치 유서를 두어 금지했던 것입니다. 이미 스스로 욕된 것이라고 하였으니, 계책도 올바른 계책이 아니고 말계도 될 수 없습니다. 지금 허락하여 중을 얻어 상계가 된 것은 폄하하고, 금지하여 스스로를 욕되게 한다고 하고 계책도 올바른 계책이 아닌 것은 저지하여, 똑같이 선사의 말계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허실(虛實)이 서로 뒤섞였을 뿐만 아니라 경권(經權)의 표준도 없어서 전혀 이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선사의 평생 학문에 대해 반드시 제 1등의 의리로 표준을 삼은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여 선사가 만년에 자신의 굽혀서 말계로 나아감을 면치 못하였으니, 사람을 두렵게 하여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형이 스스로 담당하지 못한 것이 음성의 흠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형은 이미 "선사의 말계이다."라고 하였고 또 "어찌 평탄하게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으로서 후세의 큰 가르침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흠으로 여기는 것은 마침내 선사에게 있고, 음성은 다만 스스로 담당하지 않고 피하지 않은 과실만 있을 따름입니다. 선사가 이미 험난하여 마땅히 행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서 후세의 법이 될 수 없는 말계로 사람을 가르쳤다면 본원이 이미 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제자가 스스로 담당하지 않고 피하는 것은 곧 떳떳한 일이니, 어찌 말류(末流)에게 꾸짖을 것이 있겠습니까? 이에 이르러 오늘의 시비는 남김없이 판명되어 더는 말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교롭게 일을 살피지 못하여 만에 하나라도 이와 같지 않게 되었을 때에는 형은 장차 그 몸을 둘 곳이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서모의 편지가 나오자 그가 고치도록 권하지 않고 곧장 선사를 무함했다는 것으로 큰 철퇴로 쳐야 한다고 운운했던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 편지가 나오기 전에는 애당초 행하설(杏下說)주 42)이 있었습니다. 부풍(扶風 부안)의 여러 사람이 누차 편지를 보내 고치기를 권했지만 끝내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최후에는 광천(狂泉)을 여럿이 마셨다거나 내시의 불알이니 중의 상투니 하는 말로 편지 한 장을 던져서 조소하고 업신여겼으니, 이것이 어찌 권하여 고칠 수 있는 자이겠습니까? 또 행하설 외에 계화도(繼華島)에서 있었던 말로, 정재(靜齋)는 "선사가 일찍이 경성(京城) 탑동(塔洞)에서 인쇄하는 것을 인의(認意)가 있었다."라고 하고 송병진(宋秉眞)은 "우리 선사가 일찍이 인교(認敎)가 있었다."라고 하여, 자연스럽게 면재(勉齋)와 송재(松齋) 두 문인의 과실을 전파하였고, 현암(玄岩)은 심지어 "선사가 만약 이런 뜻이 없었다면 문인들이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신헌(愼軒)은 이를 두려워하여 의론을 제창하여 변론하고 성토하면서 형을 동지로 여겨서 몇 사람의 처음 통문(通文)에 이름을 올렸는데, 후에 형이 하고 싶지 않다고 하여 59명의 통문 명단에서 이름을 빼냈습니다. 이때에 의론이 이미 이루어졌고 문장 또한 갖추어졌음에도 오히려 곧장 성토를 하지 않고 그가 스스로 고치기를 바랐습니다. 저와 정제도 편지를 보냈으나 효과가 없었고, 대상(大祥)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죄를 인정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최원(崔愿)과 김세기(金世基) 무리가 또 도로와 역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제창하여 "우리 선사는 원래 인교(認敎)가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음성(陰城)과 진천(鎭川) 사이에 거주하는 음성을 편드는 무리는 "선사가 분명히 인교(認敎)가 있었는데 마치 다반사와 같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고 날뛰어 천지에 가득 차게 되었으니, 이런 날에 이르러서 비록 변론하여 성토하고 싶지 않더라도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맹자가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다."주 43)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무릇 이런 일은 실재로 형이 계화도와 현암을 오고 가는 날에 역력하게 자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서모의 편지는, 성토를 한 뒤 3년이 지난 병인년(1926)의 겨울에 근소재(近小齋) 또한 음성이 선사를 무함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이전에 음성을 편든 것을 후회하여 비로소 이 편지를 내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불언지교'를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는데, 이에 더욱 행하설의 "헤아려서 하라."는 것이 인가하는 말로 선사를 무함한 것임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형이 이 편지를 보고, "옹서(甕書)를 보고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옹서는 바로 행하설입니다. 근소재의 이 편지가 나와자 그 효과를 먼저 형에게서 나타났다는데, 지금 갑자기 의론을 달리하니 매우 괴이합니다.】이 편지가 나왔으니 마땅히 다시 공개적으로 성토하여 [음성의] "말은 구별이 부족하고 문장은 표현이 허술하였다."고 한 것을 깨뜨려야 했는데, 편지의 주인을 성토하지 않고 다만 '대초(代草)' 등의 설만을 성토하였고, 고소(告訴)를 당하자마자 모두가 기운을 잃어서 힘을 함께 할 사람이 없고 윤고문(輪告文)도 상자 속에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 문장이 지어진 것은 정묘년(1927)이었고, 갑술년(1934) 겨울에는 현광(玄狂)이 저의 초소에 있었는데, [현광이] "이 윤고문은 끝내 그만둘 수 없는 것이지만 글에 미진한 부분이 있으니 이를 수정하고 윤색하여 여러분의 이름을 연명하여 발의하자."라고 하였고, 정재장(靜齋丈)도 동의했지만 끝내 발의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어떻게 그가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형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그에게 고치라고 권한 것은 이미 행하설 속에 있었는데 고치게 할 수 없었고, 이른바 큰 망치로 때린다는 것은 서모의 편지가 나오기 전에 먼저 있었으니, 형이 어찌 참으로 잊어버렸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고의로 이런 태도를 취하여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여 그 단서를 헤아릴 수 없게 한 것입니까?
오호라, 저는 이 일에 대해 생각하면 마음이 썩고 말을 하면 이빨이 시리니, 진실로 또한 괴롭습니다. 당초에 만약 노성하고 중망이 있어서 이 일을 몸소 맡아서 분명하게 변론하고 엄하게 성토하여 무함을 시원하게 씻을 몇 사람이 있었다면 저처럼 나이가 어리고 사람이 미천하며 문장이 졸렬하고 언어가 가벼운 자는 어찌 그 사이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그렇지 아니하여 온 사문(師門)을 돌아보아도 전혀 없었고, 겨우 황소심(黃小心) 한 사람이 있었지만 또한 피차간 사실에 관련된 문자에 대해 또한 자세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한심하지만 이미 선사의 제자가 된 자로서 어찌 감히 스스로 편의만을 취하여 그 책임을 사양하겠습니까. 아, 높은 갓을 쓰고 큰 허리띠를 두르고서 변론이 씩씩하고 문장은 걸출한 자가 숲 풀처럼 많지만 끝내 저처럼 자질이 졸렬하고 식견이 비루하여 가장 못난 자로 하여금 이 일을 맡게 하였으니, 오늘날 선비의 기풍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선사는 그대 혼자만의 스승이 아닌데 그대는 어찌 홀로 수고를 하고 무함을 밝히기도 전에 원한을 보복한다는 의심을 실컷 받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그에게 원래 원한이 없고 그도 또한 내가 혐의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 고의로 이런 설을 가지고 사람들의 귀를 혼란하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진짜로 원망할 만한 것이 있어서 내가 만약 원한을 보복한다는 의심을 피하려고 선사의 일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사사로움만 생각하고 공적인 것을 잃어버리는 죄가 또한 어찌 무겁고 크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형은 이를 듣고 그렇다고 여기겠습니까?
선사를 무함한 것을 보고도 오히려 화합한다면 죄는 처음 합한 데 있으니 기다리지 않아도 마침내 나눠질 것이고, 선사를 무함한 것을 보고 이에 나눠졌다면 의리는 마침내 나눠지는데 있으니 처음에 합한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을 논할 때에 선사를 무함한 것의 조만 및 분합의 선후를 따지지 않고 처음에는 합했다가 나중에 나눠진 것으로 죄를 준다면 이것이 어찌 일을 논하는 일정한 표준이겠습니까? 또 저의 일곱 자 몸뚱이는 저들에게 맡겨 어육이 된 지 오래됐으니, 어찌 양쪽의 문자가 한 번씩 주고받을 때마다 더욱 심해진 이후에 원수가 되는 것을 기다리겠습니까? 지난번 음성의 고소를 당하여 혹독함을 두루 겪고 죽음을 맹세할 때에는 진실로 다시 우리 형과 왕복하며 토론하는 오늘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뒤미처 생각해보니 온 몸이 다 써늘해집니다.
선사 학문의 대략은 '명변(明辯)' 두 글자뿐입니다.【《중용》의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는 것은 모두 명변 공부이며, 독행도 명변한 것을 행하는 것에 불과합니다.주 44)】 심성이기(心性理氣)의 변론 이외에 선사의 행사에서 찾아보면, 스승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으로 제일의 의리를 삼아서 김평묵(金平黙)의 뇌문(誄文)을 여러 사람의 의론이 통일되지 않았을 때에 배척하였고주 45) 이(李), 신(申), 정(鄭)을 동문으로서 함께 배운 반열에서 분리시켰으며, 임종에 이르렀을 때에도 부지런히 일삼은 것은 오직 이것이었습니다. 또한 일찍이 훈계하기를 "부사(父師)의 무함을 눈으로 보고도 변론하여 성토할 줄 모르는 자는 그 몸을 칼로 자르더라도 고통을 모르는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선사에게 배운 것이었고, 선사가 우리들에게 희망했던 것입니다. 지금 형은 여기에서 배우고 바란 것을 구하지 않고 마침내 다른 곳으로 가서 구하니, 저는 그것이 무슨 설인지 모르겠습니다.
음성이 지령(志令)을 끊지 않은 자를 배척하여 '선사를 배반하고 연원을 저버린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윽고 또 자신이 직접 범하였습니다. [이런 자에 대해] 형이 "과연 현광이 논한 바와 같다면 의심스럽고 괴이하다."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혹 여기에 대해 모두 믿지 못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까? 음성이 김성장(金聖章)에게 답한 편지와 음성이 김성구(金聖九)에게 보낸 편지의 원본이 여기에 있으니 다시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보고서 정말로 그렇다면, 김세기(金世基)가 선사를 무함하고 훈계를 저버렸다고 성토한 자는 전(田), 최(崔), 송(宋)이 아니고 바로 오진영이이며, 낙현(洛賢)을 망국(亡國)으로 배척하고 매옹(梅翁)을 위학(僞學)으로 배척한 사람주 46)을 노비가 되어 상전으로 섬긴 자는 김(金)이 아니고 바로 오진영입니다. 그러니 오진영은 어찌 김세기를 마땅히 전, 최, 송, 김을 공격하는 깃발과 창을 뒤돌려서 공격해야 할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이미 그렇다면, 오진영이 말을 놀리고 설을 꾸며서 이미 선사를 무함하였고, 반복하여 말을 바꾸어 또 무함을 성토한 사람을 저지했던 것을 모두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훈의 대인설 운운한 것에 대해 전에는 고서를 인쇄한 것이라고 한 것이 지금은 《병암집》이 되었고, 전에는 병자년과 정축년이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임술년이 되었는데, 형이 믿고서 증거로 삼은 것은 바로 이것과 한 종류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형은 바야흐로 음성을 선사보다 더 믿으니, 내 말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김의 편지를 다시 볼 날을 기다려서 정할 수 있겠습니까?
형은 오히려 현광이 논한 것으로 헤아려서, 그의 의론에 남과 내가 차이가 있고 앞과 뒤가 모순됨이 있다고 가설하여 비평하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끝내 형을 버리지 못한 이유입니다. 저번에 이런 의론을 가지고 동문 한 사람에게 보여주었더니 그 사람이 다 본 후에 말아서 한 쪽에 치워두고 더는 어떠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 사람의 마음이 모두 재가 되고 피부 속에 피가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는 누구와 더불어 말을 합니까? 푸른 하늘을 우러러 길이 탄식할 따름입니다.
김세기가 제게 뒤집어씌운 죄는 지령(志令)을 종처럼 섬긴 것이 첫머리의 대제목이 되는데, 저는 혐의를 벗었고 그가 실제로 범한 것은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 같으니, 그 밖의 나머지 허다한 흉악한 무함은 파죽지세처럼 변론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해소될 것입니다. 옛날에 직불의(直不疑)가 형수를 도적질 했다고 무함한 자가 있었는데 직불의는 이를 변론하지 않고 다만 "나는 본래 형이 없다."라고만 하였습니다. 아, 남이 형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자가 어찌 형수를 도적질한 여부를 알 수 있겠습니까? 남이 아비를 여의고 어미를 여읜 것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예의가 있는지는 여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주석 38)대인설(代認說)
《간재집》 간행을 대신 인가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석 39)더불어……없다
공자는 "더불어 말할 만한데 더불어 말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잃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 더불어 말한다면 말을 잃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다[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知者不失人亦不失言]"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주석 40)자신이……것
자공(子貢)이 종신토록 명심할 한마디 말을 청했을 때, 공자가 "그것은 '서'라는 글자일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주석 41)결단코……것
간재는 자손 및 제군에 고하는 글에서 "다른 날 시변이 조금 안정되기 전에 만약 저쪽에 청원하여 발간 배포할 계획을 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비록 혹 강권하더라도 너희는 아비와 할애비의 마지막 명을 맹세코 지켜서 조심하여 애써 따르지 말라[異時時變稍定之前, 若請願於彼, 以爲刊布之計, 決是自辱. 諸人雖或強之, 汝等誓守父祖末命, 愼勿勉從也]"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後編》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
주석 42)행하설(杏下說)
간재집의 간행과 관련하여, 간재가 은행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있을 때에 오진영에게 "힘을 헤아려 하라."고 명하였다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주석 43)부득이해서……것이다
맹자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맹자가 변론을 좋아한다고 일컬었는데, 맹자는 이에 대하여 답하기를 "내가 어찌 변론을 좋아하는 것이겠는가. 내가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다[予豈好辯哉? 予不得已也.]"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
주석 44)중용의……불과합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라고 하였다.
주석 45)저 김평묵(金平黙)이……변론하셨는데
김평묵이 임헌회의 제문을 지었는데, 임헌회를 호안국(胡安國)과 사마광(司馬光)에게 비유했다 해서 간재선생과 임헌회의 아들 임진재(任震宰)가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선언하고 제문을 돌려보낸 사건을 말한다.
주석 46)낙현(洛賢)을……사람
낙헌과 관계된 내용은 《간재집(艮齋集)後編)》 권6 〈논인수무분(論人獸無分)〉에 보이고, 매옹과 관계된 내용은 《간재집(艮齋集)後編)》 권4 〈여정헌풍(與鄭憲豐)〉에 보인다.
答吳士益 丁丑
"不言之敎",兄見徐書之初,卽書於弟曰: "視甕書,更覺分明,不可不謂之誣師。" 兄意明是但看甕書時已可謂誣師,而到此更覺分明也。論定旣如是者十年矣,今乃擧田壎代認說云云。彼輩大書布揚於徐書出三年前,兄亦熟眼而盈耳者,謂"以此而伊來幾年,然疑未定",有若代認說始聞於論定之後者。然天下雖有善體人意者,使之見信難矣。弟嘗以不偏忮許兄矣。以今觀之,恐兄亦不免偏些在也。不然,安得有此事? 雖然,亦非兄有心偏私於彼也。但以彼則聲名文華,使人風靡,不暇問其言行,而遠地相望,只見其可慕而己。弟則孱劣無比,文無足觀,名無足聞。居且密邇,詳悉其過惡,只見可惡而不見可愛。故語于心曰: "某也豈眞有誣師之理? 某也渠何能辨師誣?" 不覺是彼非此之意,日滋月長,以至於前後矛盾、始終叅差之至此也。旣然矣,則弟將自悲自恨之不暇,何敢復有言也? 第念兄與我,當此大是非大分合之日,以三十年久要之誼,一書獻忠而不見效,則輒歸之於"不可與言"之科者,尢有所不敢也。
來書所謂不言之敎之明據者,不過單將先師與李裕興壬戌書,若負嵎之固然。兄試詳之,此書二十六字中,何字有出認底意思而可作此據者也? 夫以陰人之樂於趨時者,尙謂認不快,以欲越海印師稿,誇張於人,曾謂以先師之道義,欲認印門人之稿乎? 兄必將潔潔淨淨本無些點底師書,加之以陰亦不快之認字意思,敢作"不言之敎",而助彼脫己嫁師之惡,然後快於心歟? 兄之所以必欲如此者,徒以此時非認不印而然。然其後時法愈嚴之日,舍曰越海,本國內亦多非認之印,以吾所知,《困庵集》一也。至於今春,卽此所受師書人李裕興?誠庵稿?之印,亦且非認,則其謂先師以其時而欲其認者,豈足以爲據哉? 哀哉嗤哉! 陰人所謂擬與徐氏書也,"田壎代認說"云云,崔愿【泣告文】之謂; "泛論印書",金世基【泣告文】之謂; "在丙丁間泛論業者代認",禹炯根【答玄通】之謂。古聖人書如《詩》、《書》、《語》、《孟》,今世刊行而古聖人不爲累者,忽然換題易年而曰不曰田壎說乎? 爲?炳庵集?議印而有是敎也。【陰答李子乘書,始有曰田壎代認說,而無《炳庵集》議印之云。答靜齋書謂冊商自認印書,而亦無《炳庵集》之云。】 巧引先師與李裕興壬戌書而承之,巧則巧矣。然古書之印安得爲?炳集?,丙丁之年安得爲壬戌乎? 只見其情狀之露也。蓋渠則欲爲一時眩人之計,不顧前言,靦顔强說,幸昧者之見瞞,恐知者之發奸。兄則信之無疑,據以爲實,非惟弟之深悶,亦恐彼之竊笑也。兄且試思。聖門之學,只在求仁,求仁之方,恕字爲大。"己所不欲,勿施於人",行恕之事也,君子之用心也。雖行途之人,皆欲其入於堯舜之道,而不欲其入於不義也。曾謂先師視爲"決是自辱"而深所不欲於己稿者,以之施於同志同道心法相傳門人之稿乎? 使陰與兄之說傳後而信之,先師爲何如人? 痛矣痛矣。
至於答宋約齋書,凡辨疑信者無正證,然後始覔旁證。今何若舍"請願刊布,決是自辱"之遺書正證,而欲取論墓籍者而作旁證也? 夫墓不籍,則至有掘塜燒尸之慮,含忍遺訣,不得已用之者,此也。稿不印,則誰復有發之篋而焚之火者乎? 類例不同,此又旁證之不得爲者,而乃以此輾轉因推,至作認稿不言之敎而後已。彼固伎倆則然,以兄之明亦敢爾乎? 嗚呼! 是亦天而非人歟?
先師時拘勢迫,末計之云,尢不成說。先師平日自待與敎人,必以第一等道理爲準,第二等且不屑爲,豈復有末計之可論? 蓋中無定體,隨時而在。如有實拘實迫,若墓之遭掘燒之變,則含忍而籍之,是爲中之所在,卽爲第一等道理,故先師許之。旣得爲第一等道理,則可謂之上計,而不可謂之末計也。無實拘實迫,若稿之自在篋笥而無恙,則何所急而請認也? 然且爲之,則是"決是自辱",故先師早有遺書而禁之。旣云"自辱",則計非其計,而末亦不得爲矣。今於所許之得中而爲上計者貶之,所禁之自辱而計非其計者抗之,同謂先師之末計,非惟虛實相蒙,經權無準,全不成理。認先師平生學問,爲未必準以第一等義,不免晩年之俯就末計,使人恐懼,不知所言。
兄雖以不自擔爲陰之欠,然兄旣云"先師之末計",又云"豈是坦然當行爲後世底大敎乎"? 然則是所欠者竟在先師,陰則只有不自擔不爲諱之過而己也。師旣以崎嶇不當行不可爲法後世底末計敎人,則本源己不正矣。弟子不爲之自擔而諱之者,乃其常事,何足責之於末流乎? 到此而今日之是非,可謂判明無餘而無復可言。好不省事,萬之一不如此時,兄將無所措其躳也。柰何柰何?
徐書之出,不勸其改之,直以誣師,大椎擧而擊之云云,是何說也? 前乎此書之出,而始有杏下之說也。扶風諸公累書勸改而終不答,最後以狂泉衆飮、宦僧睾髻之說,投一紙而嘲侮之,是豈可勸而改之者耶? 且杏下說之外,華島之語,靜齋以先師曾有認意京城塔洞之語,宋秉眞以吾師曾有認敎之說,自然播傳勉、松兩門人之過,玄岩至有言先師若無此意,門人豈敢有此語者? 愼軒爲是之懼,倡議辨討,認兄爲同志,錄名於數人之初通,後以兄之不欲而拔於五十九人之通矣。是時,議旣成矣,文且備矣,猶不遽討,而望其庶改。弟與靜齋又書而無效,至於祥事,竟不服罪而去。崔愿、金世基輩又公唱於道路驛場之間曰: "吾師元有認敎。"【至今則陰徒之在陰城、鎭川間者,言先師分明有認敎,有同茶飯云。】則萬口喧騰,漲天溢地,到此之日,雖欲不辨討得乎? 此正孟子所謂不得已者也。凡此事,實兄往來華島、玄巖之日,歷歷詳悉矣。若乃徐書,則聲討後三年丙寅冬,近小亦明知陰之誣師,而悔前右陰,始出此書,使人觀此"不言之敎",則益知杏下說"料量爲之"之爲認誣也。【兄見此書,謂"視甕書,更覺分明,到此地頭,不可不謂之誣師"云云。甕書卽杏下說也。近小此書之出,其效先發於兄矣,今忽異論,可怪可怪。】 此書之出也,宜其再行公討,以破"語欠區別,命辭疎忽", 不討書主,但討代草等說 而才經訴禍,擧皆喪氣,無人同力,輪告文徒在篋笥矣。是文之作在丁卯,而甲戌冬玄狂之在弟所也,謂"此告終有不可已者,而文有未盡,爲之加修潤,欲聯僉名而發之",靜丈意亦然,而竟未發矣。未知此文何自入彼眼也。此則兄所未詳矣。蓋所謂勸其改之者,已在杏下說而不得,所謂大椎擊之者,先在徐書之出,兄豈眞忘之? 抑故作此態,令人恍惚,莫測端倪?
嗟呼! 吾於此事,思之心腐,言之齒酸,良亦苦矣。當初如有老成重望身任此事明辨嚴討快雪誣者數三公,如弟之年少人微文拙言輕者, 何足有無於其間? 顧乃不然,環視一門,絶無焉,而僅有黃小心一人,亦於彼此事實文字有未詳盡者。吾雖無似,旣爲人弟,何敢自占便宜而辭其責乎? 噫! 峨冠博帶,雄辯傑文,林立如也,而竟使孱質陋識最出人下如我者任此事,今世士風亦可知也。或謂余曰: "先師非獨爲子之師,子何獨賢勞,誣未及白,而飽受報嫌之疑?" 余曰: "我於彼元自無嫌,彼亦非不知我之無嫌,而故將此說以亂人聽爾。使眞有可嫌者,我若避報嫌之疑而不盡心於師事,則其念私忘公之罪,豈不重且大乎?" 兄其聞此,以爲然否?
見誣師而猶合,則罪在始合而不待終分; 見誣師而乃分,則義在終分而始合不當。論今也,不問誣師之早晩、分合之先後,槩以始合終分罪之,是豈論事之定準? 且吾七尺之軀,任彼輩作魚肉久矣,豈待兩邊文字一書甚一書而後成仇哉? 曩遭陰訴備毒誓死之時,實不圖復與吾兄往復講論之有今日也。追思,渾身盡靑。
先師之學問大致,"明辯"二字是已。【《中庸》學、問、思、辨,總是明辯工夫,至於篤行,亦不過行其所明辯者爾。】 心性理氣之辨以外,求之行事,則辨師誣爲第一義,斥逐金誄文於衆議未一之日,分異李、申、鄭於同門共學之列,以至屬纊之時,孜孜焉所事者惟是。又曾有訓曰: "目見父師被誣而不知辨討者,是刀截其身而不知痛者也。" 此正吾輩之所學於先師,先師之所望於吾輩者也。今兄則不求所學所望於此,而乃之他而求之,吾不知其何說也。
陰之斥不絶志令者爲背先師負淵源,旣又身親犯之者。兄謂"果如玄狂所論,則可疑且可怪",豈或於此有未盡信者耶? 陰答金聖章書、陰送聖九之原本在此,可覆視也。覆視而果然者,金世基所討誣師背訓者,非田、崔、宋也,乃震也; 奴事爲上典於斥洛賢亡國梅翁僞學之人者,非金也,乃震也。震豈非世基之所當回倒攻田、崔、宋、金之旗戈而攻之者乎? 此旣然矣,則凡震之游辭飾說,旣以誣師,反覆變舌,又抗討誣人者,皆可知也。最是田壎代認說云云,前謂古書之印者,今爲《炳集》; 前謂丙丁之年而今爲壬戌,而爲兄所信據者,正與此一類矣。雖然,兄方信陰過於信師,吾言何能有力? 尙可待覆視金書之日而定之歟?
兄猶以玄狂所論入思量, 議論有人己二致,前後予盾,假設評辭。此吾所以終不舍兄也。向以此論,示同門一人,其人看畢,卷置一邊,更無如何之言。噫! 人心都灰,皮裡無血如此,此世吾誰與語? 仰蒼長吁而己。
世基所勒此漢之罪者,奴事志令爲劈頭大題目,而此之脫空,彼之實犯,旣如右所論,則餘外許多凶誣,勢如破竹,不辨自解矣。昔有誣直不疑以盜嫂者,不疑不之辨,但曰"我本無兄"。噫! 不知人之有兄無兄者,何以知其盜嫂與否? 不知人之喪父喪母者,何以知其有禮無禮? 此眞今古一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