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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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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사익에게 답함(答吳士益 丙子)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8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8.TXT.0007
오사익에게 답함
답장을 받들어 읽으니, 제 편지에 거론한 '중간에 끊어짐이 없음[無間斷]' 세 글자에 대해 반복해서 추론하고 연구하여 천인합심(天人合心)의 묘함에 이르러 극치에 도달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는 단초를 열었고 그대는 극치를 다했다.'라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실로 문답이 이와 같다면 서로 도와주는 것이 비록 옛날의 이른바 연주를 듣고 그 마음이 바다에 있고 산에 있다는 것을 알았던 지음(知音)주 23)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이를 미루어 나가서 그 나머지를 다 안다면 장차 아무리 미세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 없고 아무리 단단하여도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천하의 의리가 아무리 정미(精微)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끝내 규명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으며, 천하가 의회(疑賄 의심스럽고 불분명함)가 비록 변론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어찌 끝내 해결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에 고마움이 깊고 깨우친 것이 많았습니다.
다만 제 편지 중에 '기심편견(忮心偏見 시기심과 편견)' 네 글자로 온 세상의 사류(士流)를 병통으로 여긴 것을 논한 다음, 인하여 우리 문하가 분열된 이유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저를 책망하여 반성하는 것으로 귀결을 지었습니다. 비록 군자가 고식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주 24)에 감사하지만 그것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서로 돕는 지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장차 어떻게 함께 천하의 의회를 변론하고 천하의 의리를 규명하여 중간의 끊김이 없이 천인합심의 묘한 경지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멍하게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만드니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저는 이미 타고난 바탕이 아름답지 못하고 사욕도 극복하지 못하였으니, 평소에 안으로 보존하고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시기심과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 많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선사를 위하여 무함을 변론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만큼은 감히 그것이 공심(公心)과 정견(正見)에서 나왔다고 자신하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으며 저승에서 선사에게 절하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은 저와 30년을 함께한 오랜 벗이고 저는 이에 또한 13년간 한결같은 성심으로 대하였으니, 말미암을 바를 관찰하고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펴서주 25) 거의 이 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터인데, 형의 헤아리지 못함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저는 바야흐로 형을 시기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아서 더불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형은 내가 시기심이 있고 편견이 있다하여 더불어 말 할 수 없다고 여기니, 이른바 '친구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친구를 모른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아는 것은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중합니다. 마음이 이미 어두이니, 비록 의론의 일치가 있다고 한들 어찌 귀중하겠습니까? 또한 형이 지나쳤습니다.
이미 "대체(大體)의 시비(是非)는 진실로 정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착함과 악함의 큰 가름은 어찌 향초와 악초가 한 그릇에 있을 수 없고 얼음과 숯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이미 연전에 "선사를 무함한 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사람은 석농(石農)주 26)이라고 호칭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써 음석(陰城)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양쪽의 사람을 화합시키고자 하니, 이것은 향초와 악초가 한 그릇에 있고 얼음과 숯이 서로 용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대저 성현의 학문은 '명변(明辨)' 공부가 많은 부분을 차지고 또 역할이 큽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학문하는 다섯 가지 일로 애공(哀公)에게 고할 때에 '독행(篤行)' 한 가지 일 외에는 모두 '명변' 공부였습니다.주 27) 오직 그 실재의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행업(行業)에 드러난 것도 그러합니다. 《춘추》의 '선한 자를 포상하고 악한 자를 주벌하는 것'도 원래 '명변'의 일입니다. 이후의 현인도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맹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를 변론하고, 주자가 소식(蘇軾)과 육구연(陸九淵)을 변론하고, 우암(尤庵)이 흑수(黑水)주 28)를 변론 한 것이 모두 이런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사 간옹선생(艮翁先生)은 심성이기(心性理氣)의 변론은 진실로 큰일이었지만 사문(師門)과 관계된 일로는 가평(嘉平)의 김평묵(金平黙) 문장을 배척하여 물리쳐서 전옹(全翁 임헌회)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이 진실로 평생의 사업이었습니다.주 29) 때문에 숨을 거두시기 전 며칠 사이에 쓴 문자는 이 의리가 아닌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우리들이 함께 직접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 형은 이를 본받지 않고 양쪽을 화합시키려고 하니 그 또한 성현의 뜻과 다릅니다. 이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시기와 편견에 지나치게 징계하려다가 의식적으로 공정하게 하는 사심을 면치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공정이지 않은 사심은 진실로 사심이거니와 의식적으로 공정하게 하는 사심 또한 사심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음성의 《정절사전》에 운운한 것에 대해 비록 음성을 엄호하는 전순형(田舜衡)도 오히려 말이 되지 않는다 하였고, 음성과 당을 함께 하는 권순명이(權純命)도 오히려 의심스럽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또한 다시 어찌 하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또 "반드시 설왕설래 할 필요가 없으니 한갓 붓과 혀를 낭비할 뿐이다."라고 한 것은 더욱 괴이합니다. 우리들의 강론은 이로움을 위해서가 아니고 명예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서로 질문하여 오직 옳은 것을 취할 뿐입니다. 제 설이 고견에 탐탁하지 않다면 상대의 설을 따를 수 없고 나의 견해를 버릴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따를 수가 없고 무엇 때문에 버릴 수 없는지를 마땅히 분명히 말해서 그 곡절과 핵심을 명백하고 시원하게 해서 자신의 심사를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 도와주는 방법입니다.
또 도리는 무궁한 반면 사람의 식견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두 현인의 현명함으로도 이기를 논함에 무려 9차례의 왕복 편지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식견으로 모든 의난(疑難)에 결단코 한 두 차례의 의논으로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형이 알지 못함이 아닌데도 오히려 견고하게 벽을 세우고 자신의 견해를 묵수하여 의견을 주고받으려고 않으니, 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이 내가 시기심이 있고 편견이 있어서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인식한데서 나온 단안(斷案)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 이미 형이 저의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고 또 형과 더불어 말할 수 없으니, 지난번에 온 시대를 돌아보면서 오로지 우리 형만 바라보았던 뜻이 혼자만의 소리였음이 절로 부끄럽습니다. 형이 이미 이와 같다면 세상에 누가 다시 나의 마음을 알아주며 나와 더불어 말할 자가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붓을 태우고 벼루를 깨뜨려서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한 글자도 쓰지 않겠습니다. 비록 대단히 무료할 지라도 일을 줄이고 정신을 아끼는 것에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득히 남쪽을 바라보며 편지를 씀에 슬플 뿐입니다.
주석 23)연주를……지음(知音)
옛날에 백아(伯牙)가 고산(高山)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그의 지음(知音)인 종자기가 "좋구나, 아아(峨峨)하여 태산(泰山)과 같도다." 하였고, 유수(流水)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좋구나, 양양(洋洋)하여 강하(江河)와 같도다."라고 하였다. 《열자(列子)》〈탕문(湯問)〉
주석 24)군자가……것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군자는 도덕에 입각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반면, 소인은 그저 고식적으로만 사람을 사랑한다[君子之愛人也以德, 細人之愛人也以姑息]"라는 말이 보인다.
주석 25)말미암은……살펴서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공자는 "그 행하는 바를 보며, 그 말미암을 바를 관찰하며 그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펴보면, 사람이 어찌 숨기겠는가.[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라고 하였다.
주석 26)석농(石農)
오진영의 호이다. 김택술은 오진영의 호를 부르지 않고 '오(吳)', '음성(陰城)', '음인(陰人)' 등으로 폄하하여 부르고 있다. 음성은 오진영이 말년에 기거한 곳이다.
주석 27)공자가……공부였습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라고 하였다.
주석 28)흑수(黑水)
윤휴(尹鑴)가 여주(驪州) 여강(驪江)에서 살았으므로 그를 배척해서 일컫는 말이다. 즉, 여(驪)는 검다[黑]는 뜻이 있으므로 흑(黑)으로 바꾸어 소인(小人)임을 암시한 것이고 강(江)은 물[水]이므로 이를 합하여 흑수라 한 것이다.
주석 29)우리……사업이었습니다
김평묵이 임헌회의 제문을 지었는데, 임헌회를 호안국(胡安國)과 사마광(司馬光)에게 비유했다 해서 전우와 임헌회의 아들 임진재(任震宰)가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선언하고 제문을 돌려보낸 일을 말한다. 《간재집(艮齋集)前篇》 권2 〈답유치정(答柳穉程)〉
答吳士益 丙子
奉讀惠覆,其於鄙書所擧"無間斷"三字,反覆推究,以至於天人合心之妙而極焉。是可謂我發其端,爾窮其致。苟問答之若此,其相長雖古所謂海山知音,何以加此? 推此以盡其餘,則將無微之不入,無堅之不破。天下義理雖曰精微,豈有終不可究? 天下疑晦,雖曰難辨,豈有終不可決之理哉? 區區於此感荷者深,警發者多矣。
但其論鄙書中"忮心偏見"四字所病幷世士流者,而因言吾門分裂之由,終歸結於責弟以反省,雖感君子不以姑息之愛,然謂之相長知音如上所云,則未也。將何以與之辨天下之疑晦,究天下之義理,以致無間斷合天人之妙也哉? 使人憮然失圖,不知所以爲心。
噫,弟旣質之不美,私之未克,平日所存所發,宜其出於忮心偏見多矣。至於爲師辨誣一事,敢自信其出於公心正見,而仰對蒼天而不愧,歸拜先師而有所藉手也。兄於弟三十年久要,弟於此亦十三年一誠,觀由察安,庶可以洞悉此心,而兄之不諒,胡至於此? 弟方謂兄爲不忮不偏可與語者,而兄則認我爲有忮有偏不可與語,所謂"故人知君,君不知故人"者此也。人之相知,貴相知心,心旣昧矣,雖有議論之合,亦奚足貴哉? 且兄過矣。
旣云"大體之是非,固有在焉",則淑慝之大判,豈不若薰蕕之不同器、永炭之不相容乎? 故已於年前,以"不可不謂之誣師之書, 此人不當呼以石農"之言斥陰矣。今乃又欲兩邊之人與之和融,是欲薰蕕同器、永炭相容者也。
夫聖賢之學,明辨之功,爲多且大,故孔子以爲學五事告哀公也,篤行一事外,皆是明辨工夫。惟其實旨之若此,故著之行業者亦然。《春秋》之褒善誅惡, 元是明辨之事。後此之賢蓋莫不然,孟子楊墨之辨,朱子蘇陸之辨,尢菴黑水之辨,皆是也。至我先師艮翁先生心性理氣之辨固爲大事,而事有關於師門者,則斥退嘉金之文以辨全翁之誣者,實爲生平事業。故以至屬纊前數日所著文字,亡非此義,此吾輩之所共親睹者也。
今兄不此之法,而槩欲兩邊之合,其亦異乎聖賢之旨矣。此曷故焉? 殆過懲於別人之忮偏,而不免於有意爲公之私也。不公之私固私,有意爲公之私亦私也,可不畏哉? 惟其如是,故於陰撰鄭傳云云,雖以田舜衡之護陰,猶謂之不成說,權純命之黨陰,猶謂之可疑者,猶不覺其爲非,亦復如之何哉? 不寧惟是。又謂之"不須說往說來,徒費筆舌",則尢可怪也。吾人講論,非爲利也,非爲名也。虛心相質,惟是是取。鄙說有不槩於高見,則當明言爾說之不可從,我見之不可舍,如何而爲不可從,如何而爲不可舍,使曲折肯綮,明白通暢,吾之心事,人皆見之。是爲實心相與之道。
且道理無窮,人見有限。故雖以栗、牛兩賢之明,其論理氣,至有九度之往復。今以吾輩之見,凡於疑難,決非一二次商確而所能了案者。兄非不知而猶堅壁墨守,不欲復論者,非有他焉,吾知其現出認我爲有忮有偏不可與語之斷案也。
嗚呼! 旣不得知心於兄,又不得與語於兄,向者環顧幷世,單望吾兄之意,自慙孤掌之嗚也。兄旣如此,則世間誰復有知我心、與我語者? 從今以往,焚筆碎硯,不復作一字書於人已矣。雖甚無聊,覺得省事嗇神,爲不妨者耶? 悠然南望,臨紙冲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