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열람
  • 디렉토리열람
  • 유형분류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7
  • 조자정에게 답함(與趙子貞 丁丑)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7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7.TXT.0019
조자정에게 답함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훗날을 부탁한 제자가 악에 빠진 유현(儒賢)은 없다. 이로써 본다면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하고 원고를 고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자취로 나아가서 그 유죄 무죄를 논하지 않고, 다만 예부터 없었던 것으로 판단한다면, 천하에는 원래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변고가 없을 것입니다. 천하에 원래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변고가 없다면, 이것은 일원(一元)주 54) 12만 9600년을 통틀어서 줄곧 변고가 없다는 것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천하에 처음 보는 변고가 옛날에 없었으나 오늘 비로소 있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그것을 변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참으로 처음 보는 변고가 있었지만 현자가 사람을 알아보고 맡겼기 때문에 이러한 변고가 없다고 한다면 곤(鯀)에게 치수(治水)를 맡긴 것주 55)과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게 은(殷)나라의 감독을 맡긴 것주 56)은, 요(堯) 임금과 주공(周公)이 현명하지 않아서입니까? 만약 이는 국가의 일이지 유문(儒門)과 무관하다고 한다면 정인홍(鄭仁弘)주 57)은 남명(南冥)이 훗날을 맡긴 제자가 아닙니까? 남명은 유현이 되기에 부족한 것입니까? 여기서 그 설은 일찌감치 타파되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우(禹)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지혜가 밝음이라, 요 임금도 그것을 어렵게 여겼다."주 58)고 하였고, 공자가 말하기를 "주공의 과실은 또한 마땅하지 아니한가."주 59)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일이 일이나기 전에 사람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성현이 되는데 해가 되지 않은 것은 매우 명백합니다. 선사가 실로 오진영에게 훗날을 부탁했고 오진영이 악에 빠졌더라도 애당초 선사의 허물이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선사가 오진영에게 애당초 의발과 서책을 전하기를 근세의 여러 현인들처럼 한 것이 없고, 또 문장으로 근거가 되는 것이 원고 중에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처럼 일컬은 것도 없으며, 아울러 여러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명한 것이 없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대는 황소심(黃小心)을 '노성장덕(老成長德)'과 '공언정의(公言正義)'로 논정하였는데, 모인(某人)이 음성 오진영이 칭한 "황은 무식해서 말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을 들어서 답장을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진실로 무식한 견해입니다. 무릇 식견에는 문식(文識)과 견식(見識)의 차이가 있으니, 문식은 글자를 아는 것이고 견식은 의리를 아는 것입니다. 글자는 알지 못하지만 의리를 알면 유식하게 되는데 해가 되지 않고, 문자는 알지만 의리를 알지 못하면 무식하게 됨을 면하지 못합니다. 옛날에 정무공(貞武公) 오정방(吳定邦)주 60)은 광해군이 폐모(廢母)를 논의하는 자리에 나아가 말하기를, "신은 무부(武夫)로 다만 《사략(史略)》 1권만 읽고 단지 '점점 다스려 간악함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는 것만 알 따름입니다."고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명언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오정방은 음성 오진영의 헌조(顯祖)입니다. 황장(黃丈)이 참으로 문식이 없다고 해도 다만 그 설이 의리에 합하는지 여부만을 논해야 할 뿐이고 결단코 무식으로 단정해서 안 됩니다. 만약 정무공이 당시에 이이첨(李爾瞻) 무리가 "오는 무식해서 말할 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면 어찌 이치에 어긋난 말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물며 황장의 문장은 전중(典重)하고 평순(平順)하며 명백(明白)하고 절실(切實)하야 음성 오진영의 기이함을 숭상하는 문장이 능히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동문의 능숙한 자도 그보다 훨씬 뛰어난 자는 없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오진영이 한 것처럼 하지 않았던 까닭에 혁혁한 명성이 없었을 뿐입니다. 대개 의리와의 합치 여부를 논하고자 한다면 오진영이 행한 것은 짝할 만한 의리가 없습니다. 때문에 줄곧 근거 없이 말만 놀려서 사람의 눈귀를 현혹하고, 이내 모는 가난함에 손상이 되었고, 모는 사적인 일을 도모하였고, 모는 유감을 가지고 있고, 모는 사기를 당하였다고 하였고, 심지어 황장은 무식하다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황장이 만약 문장으로 이름이 났더라면, 그는 반드시 모는 시샘과 기교로 명성을 다퉜다라고 하였을 것이니, 그의 험악한 마음과 번지르르 입을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묵묵히 우리의 의리를 지키면서 선사의 무함을 분명하게 변론할 따름입니다.
모인은 어찌 한 번 생각지 않았단 말입니까? 오진영은 어렵지 않게 직접 선사의 원고를 고쳤고, 심지어 선사에게서 받은 조부의 묘지명(墓誌銘)도 고치고 첨가한 것이 많았으며, 또 그 당파 집안의 묘명(墓銘)도 고쳐서 묘갈명(墓碣銘)으로 만들기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을 본 전표(傳表)에 대해서도 죽도록 놔주질 않고서 한바탕 얘기꺼리를 만들었으니, 오진영이 염치가 없음은 진실로 당연하였습니다. 모인은 어찌 한 번 생각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전에 쇠몽둥이로 머리를 때린 죄를 갚고자 하여 감히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고자 한 것이란 말입니까?
주석 54)일원(一元)
송(宋)나라 소옹(邵雍)이 주장한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설에 나오는 용어로, 이 세계가 생성했다가 소멸하는 1주기(周期)를 말한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30년이 1세(世), 12세가 1운(運), 30운이 1회(會), 12회가 1원(元)이니, 일원은 모두 12만 9600년이 된다.
주석 55)곤에게……것
요임금이 곤에게 치수를 맡겼는데, 온 천하가 물에 잠겼다. 여기서는 요임금같이 어진 임금 밑에서도 신하가 잘못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말하고 있다.
주석 56)관숙(管叔)……것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우들이다. 무왕은 죽고 성왕(成王)이 어려서 주공(周公)이 섭정을 할 때, 주공이 관숙에게 은나라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주공을 모함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가 뒤에 성왕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이를 두려워하여 다시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성왕이 주공에게 명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함으로써 난을 평정하였다. 《사기(史記)》 권35 〈관채세가(管蔡世家)〉여기에서는 무왕이 주공에게 나라를 맡겼음에도 무왕의 아우인 관숙 채숙이 난을 일으켰다는 점을 말한다.
주석 57)정인홍(鄭仁弘)
15세에 남명 조식을 찾아가 학문을 닦고 수제자로 학통을 이었다. 조식은 정인홍에게 아끼던 칼을 물려주며 전심(傳心)의 증거로 삼았다. 산림(山林) 출신으로 드물게 영의정의 자리까지 오른 정치가였으나 끝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인물이다.
주석 58)사람을……여겼다
《서경(書經)》 〈고요모(皐陶謨)〉에 "아, 모두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요제(堯帝)도 어렵게 여긴 바이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바로 명철한 것이다.[吁, 惟帝其難之, 知人則哲]"라고 고요(皐陶)가 우(禹)에게 말한 내용이 나온다.
주석 59)주공의……아니한가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공이 관숙에게 은나라를 감독하도록 했는데, 관숙이 난을 일으켰다. 이에 주공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관리로 썼다는 허물과, 아우로서 형인 관숙의 난리를 다스렸다는 허물이 있게 되었다.
주석 60)오정방(吳定邦)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영언(英彦). 호는 퇴전당(退全堂).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내었다.
與趙子貞 丁丑
某人言: "自古無儒賢託重弟子之陷惡者,以此知震泳之不誣師亂稿。" 蓋不就心跡上論其有罪無罪,只以自古所無斷之,則天下元無創有之變也。天下元無創有之變,則是通一元十二萬九千六百年一直無變矣,豈非好事? 終無柰天下創見之變,是古所無而今始有,故謂之變也。若曰變固有創見者,賢者知人而託之,故無此變,則託鯀以治水,託管、蔡以監殷者,堯、周爲不賢矣乎? 若曰此國家事,非關儒門,則仁弘非南冥託重之弟乎? 而南冥不足爲儒賢乎? 於是乎其說早破而不詞矣。禹謂: "知人則哲,惟帝其難。" 孔子謂: "周公之過,不亦宜乎?" 以此觀之,不能先事知人,不害爲聖賢明甚。使先師實有託重於吳,而吳也陷惡,初不足爲累,而況先師之於吳,初無衣書之傳,如近世諸賢之爲,又無文字之據,如稱炳菴於稿中者,并無衆中公之命乎!
賢弟以黃丈小心之以"老成長德"、"公言正義"爲論定,則某人舉陰吳所稱"黃是無識不足言"之說而答,此皆眞無識之見也。夫識有文識、見識之異,文識識字也,見識識義也。不識字而識義,不害爲有識; 識字而不識義,不免爲無識。昔吳貞武公定邦,當光海廢母議也,進言曰: "臣武夫,只讀《史略》一卷,但知'烝烝乂不格姦'而已。" 至今稱爲名言。是爲陰震之顯祖也。使黃丈而眞無文識,只當論其說之合義與否,斷不可以無識而置之。如貞武當日,使爾瞻輩曰"吳是無識不足言",則豈非悖理之談? 而況黃丈之文,典重平順,明白切實,非惟陰震尚奇之文所不能及,同門能手無遠出其右者乎? 特以不衒其能如陰之爲,故無赫赫之名耳。蓋欲論合義與否,則渠之所爲,無義可對。故一直以無稽游辭,眩人視聽,乃曰某也以傷貧,某也以謀私,某也以挾憾,某也以見欺, 以至有黃丈無識之說也。黃丈而如有文章之名,則渠必曰某也以猜巧而爭名矣。其險心利口,何可當也? 只宜黙守吾義,明辨師誣而已。
某人何不試一思之? 吳也無難直改師稿,至於所受渠祖墓誌銘,亦多改添,且改其黨家之墓銘作墓碣銘,而於其所惡者,則抵死不舍於已決傳表題目之間,作一副大話柄。吳之無恥固宜然矣。某人何不試一思之? 無乃欲贖前日金椎碎頭之罪而不敢一毫有異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