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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승에게 답함(答金允升 甲子)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7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7.TXT.0013
김윤승에게 답함
대저 음성(陰城)을 엄호하는 여러 사람들은 "언어와 문자로 사람을 죄주는 것은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후 저들은 눈으로 유서(遺書)를 보고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서 강태걸(姜泰杰)이 인가를 받아 출간하는 것에 급급하여 인의(認意)와 인교(認敎)의 실제 근거를 만들었으니,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까? 진천(鎭川) 경찰서에 선사의 무함을 성토한 사람을 고소하여 창암(蒼巖)과 신헌(慎軒)이 다시 조사를 당하게 되어 재앙의 기미를 예측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까? 만약 그 인가와 그 고소가 음성(陰城)의 저 강태걸이 작성한 고소장 중의 오선생(吳先生)이 허락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처음에 오씨의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가 마지막에는 아무에게도 허락을 받지 않았다고 한 것이니, 어떻게 처리해야겠습니까? 비록 네가 아니라고 말하나 이미 너의 노래를 지었다주 42)고 하겠습니다.

함재장(涵齋丈 김낙두金洛斗)이 인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지극히 맑고 지극히 바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히 스스로 자립하여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들지 못하고 도리어 경존(敬存 최병심(崔秉心))에게 의지하여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을 위협하고 강제하여 선사를 무함하게 하였습니다.

영백씨(令伯氏)가 완청(完廳)에 가서 질문했음에도 침묵한 것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오진영과 성기운(成璣運)이 보루를 만들어 경존(敬存)을 기다린 것으로 또한 그 잘못을 잡아낼 수가 없었지만, 장소를 옮겨 간행하자는 의론을 먼저 제창한 것에 대해. 함재장이 어떻게 잘못을 억지로 지적하며 배척하여 쓰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음성의 죄가 위협의 여부라면 음성의 편지가 그대로 있으니 나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경존이 그 문도(門徒)을 시켜 침묵하게 만들어 문제를 일으켰고 사람들이 모두 그가 그랬다는 알고 있기 때문에 호당(湖黨)의 수죄(首罪)를 말할 경우에는 반드시 경존이라 말한다. 지금 우리 형이 경존을 엄호하고자 하여 그 사실을 바른대로 말하지 않고 도리어 함재장을 수석이라 하고, 경존은 처음부터 침묵을 도모했는지 알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형이 비록 이와 같이 말하더라도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호남 사람들의 주장은 '인가를 구걸하지 않고 선사의 무함을 변론한다.[不乞認辨師誣]'는 여섯 글자일 뿐입니다. 함재장이 이 여섯 글자에 약간의 흠결이 있어서 수석이 될 수 없는 것입니까? 경존이 죄가 없다는 것은 내가 영백씨에게 증명하여 알 것입니다. 비록 이를 면하지 못하여 경존이 스스로 죄를 인정한다고 해도 어찌 뒤집어씌워 호당의 수죄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 형이 반드시 침묵을 도모한 계획에서 경존을 빼내려고 하는 것은 경존을 보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존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를 빼낸다면 경존을 대신하여 들어갈 자를 어느 자리에 놓고자 하는 것입니까? 형은 옛 친구에게 돈독히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종장(宗丈)을 생각지 않고 모두가 미워하는 자리에 빠뜨리고자 한단 말입니까?

함재장이 보여준 그동안의 한결같은 절의는 순수하여 하자가 없었으니, 원래부터 절로 호남 사람의 수석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대개 형은 경존의 문망(文望)이 오래도록 전 호남에 드러났다는 것으로 호남의 수석이라고 잘못 인식하였고, 또 침묵을 도모한 것이 경존의 중죄라고 여겼기 때문에 함재장이 경존을 대신하여 들어갔다고 말하였고, 모두가 미워하는 자리에 그를 빠뜨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원래 수석이었던 함재장에 대해 침묵을 도모한 경존을 대신하여 들어갔다고 억지로 말하고 그가 모두가 미워하는 자리에 빠진 것을 우려하였으니, 그렇다면 영백씨가 실로 추종하여 침묵을 도모한 뒤에 몸소 완청에 질문하고서 다른 말이 없었던 것은 어찌 더욱 모두가 미워하는 자리에 빠뜨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함재장에 대해 간절히 근심하면서 영백씨에 대해서는 무심하단 말입니까?

우리 형은 오늘의 전쟁을 천하의 의전(義戰)라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그 수석이 된 자는 천추의 영광이라 말할 수 있으니, 반드시 종장으로 그 수석을 바꾸고자 한다면 이것은 옛 친구는 박대하고 종장에게는 은혜를 파는 것이 됩니다. 옛 친구가 유독 유감이 없겠습니까?

원수의 인간(認刊)을 배척하고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이 의전이 아니겠습니까? 수석이란 이름은 사실에 근거하여 정해지는 것이니, 무슨 은혜와 유감이 있겠습니까?

선사는 애당초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고 정재장(靜齋丈)과 경존의 간절한 청을 고달프게 받아서 다만 경존이 스스로 지은 글에 잠시 착함(着銜)을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선사에게 또한 무엇을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선사의 글에는 본디 《춘추》가 의리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정재와 경존의 간청을 괴롭게 받아서 허락했다.'고 말한다면, 자신의 《춘추》의리에 따르지 않고 다만 자손과 문인의 안면과 인정을 보고서 허락한 것이 될 뿐이니, 흡사 그 일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겠습니까? 위태롭고 위태롭습니다. 형의 말은 선사를 핍박하여 손상한다고 하겠습니다.

영남 사람이 설령 이런 잘못이 있었다고 해도, 만약 경존이 중간에서 문제를 만들지 않았다면 일이 이런 지극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인간(認刊)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겨서 문제를 일으킨 것에 대해 통렬히 문죄하는 것은 또한 우리가 선사를 존경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금은 음성의 강태걸이 인가를 받아 출간하는 일이 장차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깊이 유감으로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절절하게 인가를 받을 때를 살펴서 비루하게 그 실정을 슬피 호소하여 곤욕스럽게 경우 허락을 받았습니다.

영백씨가 완청에 가서 질문한 뒤에 만약 절절하고 비루하고 곤욕스러운 상황을 말했다면 함재 등 여러 어른의 맑고도 바른 의리로 어찌 기꺼이 침묵했겠습니까? 또 당시에 만약 절절하고 비루하고 곤욕스러운 실상이 있었다면 영백씨가 어찌 가리고 숨겨서 말하지 않았을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이 말이 영백씨가 완청에 가서 질문한 날에 나오지 않았다가 마침내 오늘 잘못을 찾은 이후에 있었으니, 또한 괴이합니다.

침묵이 잘못이 없다고 말하려고 감히 선사의 장례 일로 비겨 의론을 하였는데, 이것은 하자가 없는 일이 또한 하자가 있는 일이 된 것이니 옳겠습니까? 공자가 말씀한 '말재주 있는 사람[佞人]'주 43)이 바로 이런 부류인데, 우리 형이 마침내 이런 것을 배웠단 말입니까?

음성 사람들은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방도가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미 김경부(金敬父)를 시켜 완산을 한번 가라고 한 것과 영백씨가 당일에 말하지 않았던 비루하고 곤욕스러운 말 등에 대해 지금 우리 형은 잘못이 있다고 여기었습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잘못이 있는 것을 잘못이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은 음성 사람과 영백씨였고, 일찍이 말재주를 배운 자도 음성 사람과 영백씨였습니다. 어찌 이것을 가지고 먼저 배척하지 않으십니까? 【후에 음성 사람이 서모(徐某)에게 답한 편지를 보니, "선사의 성대한 덕은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기 때문에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도가 있으니, 장례를 지낼 때에 잘못이 없었던 것과 같다. ……"고 하였다. 〇정묘년(1927) 6월에 추가로 기록한다.】

함재장은 선사의 대상(大喪) 이후에 김용승(金容承)과 절교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저의 편지를 우선 놔두고 영백씨가 급히 음성에 편지를 보냈던 망령된 것이었습니까? 오히려 다시 함재장이 김용승과 절교했는지 여부를 모르겠다고 말씀하십니까? 함재장도 믿을 만 못하고 저도 믿을 만 못하고 영백씨도 믿을 만하지 못합니까?
주석 42)비록……지었다
《시경(詩經)》 〈상유(桑柔)〉의 "비록 내가 아니라고 말하나 이미 너의 노래를 지었도다.[雖曰匪予, 旣作爾歌]"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인데, 비록 스스로 잘못을 꾸며대며 말하지만 이미 사실을 밝혀 말하였다는 뜻이다.
주석 43)말재주 있는 사람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보인다. 자로가 자를 비읍의 수령을 삼자, 공자가 "남의 아들을 해치는구나!" 하였다. 이에 자로가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으니, 하필 글을 읽은 뒤에야 학문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그러므로 말재주 있는 자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였다.[子路使子羔爲費宰. 子曰賊夫人之子. 子路曰有民人焉, 有社禝焉, 何必讀書, 然後爲學. 子曰是故惡夫佞者]
答金允升 甲子
夫護陰諸人之言,不曰"以言語文字罪人, 非所以原心"乎? 今焉以後,彼目見遺書,而曾不爲意,汲汲乎姜認之刊,結成認意、認教之實據,如此而尚可以原心乎? 訴討誣人於鎭川署,蒼巖、愼軒再當調査 禍機不測,如此而尚可以原心乎? 如曰其認其訴,非陰伊姜告文中吳先生諾之,何以區處始之受吳諾,終之承誰諾? 雖曰非汝, 旣作爾歌。
涵齋丈之不欲認, 可謂至清至正。然不能自立別爲一論, 反倚敬存而脅勒石農以誣師。
令伯氏之探質完廳而不言黙之疵累也,故雖以吳、成之設壘以待敬存者,亦不得執其疵累,而先倡移刊之議,涵丈何得以強摘疵累而斥之不用哉? 陰罪之脅勒與否,自有陰書在,吾不須言。
敬存使其門徒圖黙以生梗,人莫不知其然,故語湖黨之首罪者,必以敬存爲言。今吾兄欲護敬存而不正言其實, 反以涵齋丈爲首席,以敬存爲初不知圖黙者。兄雖如此言之,人其信諸?
湖人主義,"不乞認辨師誣"六字是已。涵丈於此六字,有些子欠點,而不得爲首席乎? 敬存之無罪,吾證於令伯氏而知之,雖或不免是,敬存自罪,烏得以冒作湖黨之首罪乎?
吾兄必欲拔敬存於圖黙之計者,以其欲護敬存也。然護敬存而拔之,則代敬存而入者,欲置之何地? 兄可謂篤厚於故舊,然獨不念宗丈而欲陷於衆惡之地哉?
涵丈之前後一節,粹然無瑕,元來自在之湖人首席也。蓋兄以敬存之文望久著全湖 錯認爲湖人首席,而又以圖黙爲敬存之重罪,故謂涵丈代敬存而入,而謂陷之於衆惡之地。夫以元來首席之涵丈,強謂代圖黙之敬存而入,而憂其陷於衆惡之地,然則令伯氏之實從圖黙之後而躳質於完廳而無異辭者,豈不尤陷於衆惡之地乎? 何其憂切於涵丈,而恝然於令伯氏也?
吾兄以爲今日之戰,天下之義戰歟? 則其爲首席者,可謂千秋之榮光,必欲以宗丈易其首席,則是薄於故舊 而市恩於宗丈也,其爲故舊者獨無憾乎?
斥讐認辨師誣,非義戰乎? 首席之名, 依實而定, 恩憾何有?
先師則初不知其如此,而苦被靜丈與敬存之懇請,只假銜於敬存自撰之文也。先師乎亦何傷?
先師秉筆,自有《春秋》。今曰苦被靜敬之懇而許之,夫不由自家《春秋》,只看子孫門人顏情而許之者,無乃疑若知其事者乎? 殆而殆而。兄言之逼傷先師乎?
嶺人設有此失,若無敬存之中道生梗,則事不至此極。
只恨認刊之不順就而痛罪生梗,亦異乎吾尊師也。今則陰之姜認刊將成,願勿深恨也。
切切然瞷其納約之時,卑卑焉哀鳴其情,戛戛乎僅得其許。
令伯氏探質完廳之後,若言切切卑卑戛戛之狀,如涵齋諸丈清正之義,豈肯用其黙? 且當時若有切切卑卑戛戛之實,令伯氏豈有掩諱不言之理? 此言不出於令伯氏探質之日,乃在今日覔疵之後,亦可異也。
欲言黙之無累,敢將襄奉以擬議,是無瑕之事亦爲有瑕之事也, 其可乎? 夫子所謂侫人即此類, 而吾兄乃學此耶?
陰人之謂有脫絆之道,故已令金敬父完山一行,令伯氏之所不言卑卑戛戛等說於當日者,今兄以爲有瑕。然則早已把有瑕作無瑕者,陰人與令伯氏也; 早已學侫人者,陰人與令伯氏也。何不以此而先斥之也?【後見陰人答徐某書曰: "先師盛德,人所共尊,故有脫絆之道,如葵時無累云云。"○丁卯六月追識。】
涵齋丈自祥以後,未知其絕金與否。
鄙書姑置,令伯氏之馳書陰城,亦是妄歟? 尚復曰未知涵丈絕金與否乎? 涵丈不足信,此漢不足信,令伯氏亦不足信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