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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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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승종섬에게 답함(答金允升鐘暹 ○甲子)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7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7.TXT.0010
김윤승종섬에게 답함
가르쳐 주신 뜻을 대략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형이 나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저 또한 형의 주된 뜻을 분명히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른바 이쪽은 어느 쪽을 가리키며 저쪽은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요? 영남을 이쪽이라 말하고 호남을 저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감히 알 바가 아닌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호남을 이쪽이라 말하고 영남을 저쪽이라 말한 것이라면 형은 이 편지에 일삼을 필요가 없이 곧 전편을 반복하여 읽어보면 피차간의 여탈(與奪)이 극히 선명하니 의심난 것을 질문하여 채택하여 살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영남이 호남의 인가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버리고 경성 사람에게 인가를 구걸한 것에 대해 일찍이 분명한 말로 배척했었습니다. 음성(陰城)의 인교서(認教書)가 나오자 이것은 대의(大義)가 관련된 것이라 말하고 절절히 근심하고 힘들게 변론하여 한쪽의 지목을 후하게 받았지만 후회하지 않았고, 영백씨(令伯氏)가 스승의 무함을 변론하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 옛사람이 부들부들한 가죽을 차고 다니거나 활시위를 차고 다니면서 스스로를 경계한 고사주 31)를 끌어다가 직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대한 가르침을 받듦에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형의 몽매함이 진실로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김용승(金容承)은 이미 사문(師門)에서 스스로 물러난 자인데 그의 무죄를 변명했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다만 스스로 변명할 것은 있습니다. 내가 김용승을 따른 것이 그 죄를 알지 못했던 날에 있다고 했는데, 지난날에 이미 편지로 절교를 고하였는데 무슨 간섭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음성은 그가 연전에 한농노(漢農老)라고 부른 죄를 알고 있었고, 그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선사를 무시하는 죄를 알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그를 여러 해 동안 존경하고 믿어서 선사의 원고를 교정토록 청하였으니, 이것은 김용승을 당인(黨人)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용성이 음성에게 사과하면서 "사우간(師友間)으로 선사(先師)를 대하였다,"고 했는데, 사우간이란 말은 끝내 스승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음성은 서로 절교했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그대를 더는 성토하지 않을 것이다. 조용하게 잘못을 고치고 경향(京鄕)을 미치광이처럼 쏘다니지 말라."라고 했으니, 이것은 김용승을 당인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일 풍파가 일어났을 때에 추후에 와서 보고 김용성에게 여관에 물러가서 기다리지 않고 곧장 들어왔다고 질책한 뒤에, 다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가 이미 상제(祥祭)에 천리 길을 달려 왔으니 반드시 사죄하러 온 것이다. 붙들어 내보낸 뒤에 그 고문(告文)을 보고서 진퇴를 결정해야지, 먼저 멋대로 영전(靈前)에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김용승을 위하여 변명했다고 성토를 한다면 다만 받아들일 뿐이니 또한 다시 어찌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저와 김용승은 모두 중년입니다. 절교 여부와 변명 여부는 앞날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니, 또한 다시 무슨 변명을 많이 하겠습니까?
주석 31)옛사람이……고사
강하고 사나운 자는 억제하여야 하고, 두려워서 위축된 자는 기운을 충분히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한비자(韓非子)》 〈관행(觀行)〉에 "서문표(西門豹)가 성격이 급하여 무두질한 가죽[韋]을 차고 다녔고, 동안우(董安于)는 성격이 느슨하여 활줄[弦]을 차고 다니며 스스로를 급하게 하였다.[西門豹之性急 故佩韋以自緩已 董安于之心緩 故佩弦以自急]"라는 내용이 있다.
答金允升鐘暹 ○甲子
教意略綽一覽,非惟兄之不能洞悉我情,弟亦難以明見兄之主意。所謂此邊指何邊,彼邊指何邊? 謂嶺爲此,而謂湖爲彼乎? 則有非吾之所敢知者。謂湖爲此,而謂嶺爲彼,則兄必無事乎此書,乃將全篇反覆,則彼此之與奪,十分躍如,可得以質疑而冀採察焉。弟於嶺之舍湖不認而乞京認也,蓋嘗顯言斥之矣。逮夫陰城認教書之出也,謂是大義攸關,切切然憂之,苦苦然辨之,厚被一邊指目而不悔,至以令伯氏之不辨師誣,獻佩弦佩韋之讜言矣。今承盛教乃如此,兄之昧實至於此乎?
金容承旣是自退師門者,則分疏其無罪,果成說乎? 但自爲分疏者,則有之。蓋曰我之從金,在不知其罪之日,向旣以書告絕,則有何相涉乎? 陰城則知其年前呼漢農老之罪,知其心中久無先師之罪,猶與之多年敬信,至於請校師稿,此非黨金乎? 金謝過陰城,而曰"師友間處先師"云,則師友間終是倍師也。陰城不曰相絕,而曰"吾不復討君,其安靜改過,勿狂走京鄉",此非黨金乎云爾。當日風波之起也,追後來見,旣責金以不退舘俟之而直入,復言於衆中曰: "彼旣千里赴祥,則必其謝罪來者也。扶而出之,見其告文而進退之可也,先肆拳踢於靈前,則不可也。" 以此而爲爲金分疏聲討之,則只當受之而已,亦復何哉? 雖然弟與金俱是中年人,絕與不絕,分疏不分疏,觀前頭可知,又多何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