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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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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금재에게 답함(答崔欽齋 丙辰)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6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6.TXT.0020
최금재에게 답함
지난번 조문을 오셔서 제가 거듭 재앙을 만나 정신과 혼백이 나가 있는 것을 보시고 이 때문에 학업을 느슨히 할 것을 염려하여 임창계(林滄溪 임영)가 김농암(金農巖 김창협)을 면려한 고사를 인용하여 위로하고 풀어주셨는데, 계속하여 두 통의 편지를 보내주어 지나치게 몸을 훼손하지 말라는 말과 능하지 못한 것을 더 노력하여 옥과 같은 훌륭함을 이루라는 말로 가르침을 주시니 제가 비록 못났다 하더라도 어찌 감격하여 울면서 저를 사랑하는 은혜에 보답하려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생각하니, 저는 어렸을 때 《효경》의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드러나게 한다"44)44)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한다 : 《효경(孝經)》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 나오는 말로, 효의 완성을 말한다.
는 말을 읽고 문득 기뻐하여 펄쩍 뛰면서 "이것이야말로 자식의 일이니 힘쓸만하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본 것은 단지 이른바 입신양명이라는 것이 학문이 넉넉하여 조정에 올라가 뜻이 군주와 부합하고 은택이 천하에 미쳐서 좋은 음식과 넉넉한 생활을 누리고 높은 벼슬자리를 갖는 영광이 부모에게 미치면 충분하다는 것만 알았으니, 바라며 힘쓴 것이 오직 이것뿐이었습니다. 나이가 17살이 되었을 때 선친이 저를 가르쳐 말하기를, "학문에는 도학과 문학의 다름이 있으니 도학의 학문은 근본이고 문학의 학문은 말단이다. 선비가 학문을 할 때에는 마땅히 근본을 먼저 하고 말단을 뒤로 해야 한다. 내가 간재 전우 선생이 당대의 도학의 스승이라는 것을 들었으니 너는 가서 인사를 드려라." 하셨습니다. 이에 제가 선친의 명을 받들어 명함을 들고 봉래산의 월명암에서 간옹을 뵈었는데, 매우 다행스럽게도 선생이 가르칠만하다 하시고, 곽임종(郭林宗)이 모용(茅容)을 방문한 고사주 45)를 인용하시고 외람되게도 저의 집을 방문하여 입도의 방법을 알려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선친이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간옹이 태산북두와 같은 명망과 상서로운 봉황과 같은 의용으로 네가 조금 문자를 안다 해서 누추한 곳을 왕림해주셨으니 그 영광됨은 네가 과거에 급제한 것보다 낫다. 이것은 기뻐할 만한 일이니, 네가 만약 몸을 깨끗이 하여 덕을 이루고 후세에 이름을 세워서 아름다운 호칭이 너를 낳아준 나에게 미친다면 다시 어떠하겠는가?" 하시고 마침내 폐백을 갖추어 영산으로 보내셨습니다. 제가 비로소 부귀영달 외에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드러내는 진체(眞諦)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선친을 섬기고 선친은 이것으로 저를 격려하여 거의 하늘이 돌봐 주고 보호해 주어 우리의 바람을 이룰 것 같았습니다. 집안의 운수가 쇠락하고 박하여 26세에 갑자기 부친을 잃으니 재앙은 뜻밖이어서 억장이 무너지고 원망스러움과 슬픔 속에서 홀연히 삼년이 지났습니다. 그리하여 이전에 날렵하게 전진하려 한 기개는 일시에 사라지고 눈앞에 빚 문서는 벗어날 길이 없어서 스스로 마음속으로 "선친이 평소에 불초에게 바란 것은 몸을 이루는 한 가지인데 불초의 학업은 진전이 없고 선인의 타고난 수명은 기다려 주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하루에 백번 천번 사력을 다하여 이룬들 어찌 구천에 계신 선친을 일어나게 하여 친히 보시게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 일은 한때 억지로 힘쓴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랴! 오직 제사를 받듦과 후손을 부탁한 것은 참으로 조종이 서로 전한 큰 계획이니 마땅히 보수하고 유지할 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고 또한 노인 봉양을 잘 마치지 못한 한스러움은 선친이 지하에서도 잊지 못해 걱정하시는 일로 불초에게 맡기셨으나 맛있는 음식은 떨어지고 가볍고 따뜻한 옷은 항상 부족하니, 이것은 선친의 뜻을 잘 잇지 못하는 것이다." 하고는, 이에 책 읽는 공부를 줄여 농사에 힘을 써서 노심초사하여 손과 발이 부르텄으니, 제 생각에, 이것은 노인을 봉양하고 집안을 보전하는 도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와 같이 했지만 수십 년 동안 기근의 재앙이 거듭 이르고 질병의 재앙도 끊이지 않아 대대로 이어온 가업이 쓰러지고 망가져서 물이 더욱 깊어져 구할 수 없는 것과 같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크게 깨달아서 말하기를, "《맹자(孟子)》에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으니, 이것을 구하는 것은 얻는 데에 유익함이 있으니, 내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구하는 데에 도가 있고 얻는 데에 명이 있으니, 이것을 구하는 것은 얻는 데에 무익하니, 밖에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마침내 빈부는 하늘에 정해져 있어 바꿀 수 없는 것이고 도의는 내 몸에서 구하여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겠다. 하늘에 달려있는 것을 구하는 데에 급히 하고 자기에게 있는 것을 구하는 데에 천천히 하였으니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젊은 시절의 실수를 후회하고 늙어서나마 공효를 거둘 것을 맹세하여 마음에 새기고 뜻을 떨쳐 공부를 통렬히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미 정력이 다시 옛날만 못함을 느꼈고 명리(名理)를 파고들어 연구할 때는 암흑처럼 깜깜하여 통달하기 어려웠으니, 이것이 진실로 가련한 일입니다. 일에 임하여 의리의 득실이 있는 데에 이르면 이미 실수하여 고통 받는 것주 46)에 깊이 징계가 되고 나서야 조금은 취사하는데 힘이 덜 들었습니다. 십 수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 아무 일 없이 이 일에 전심하도록 해준다면 거의 사도(斯道)에 거칠게나마 터득함이 있을지 알 수는 없습니다. 죄악이 쌓여서 하늘이 용서하지 않아 거듭 큰 재앙을 내리니 오관은 그 기능을 못하고 온몸은 일을 할 수 없어서 고통과 독함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게다가 안으로 가난하고 밖으로 금지 당함이 일시에 몰려들어 장황스럽고 구차스러워서 예모를 갖추지 못하니 거듭 끝없이 한스럽습니다. 살아계실 때 섬기는 일이 막막하고 것은 산 사람의 근심이고 배고픔과 추위로 나뒹구는 것은 진실로 존자께서 염려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죽어서 시신이 구학에 나뒹굴게 될 것을 잊지 말라'는 교훈주 47)에 뜻을 두어 백 번 꺾여도 뜻을 바꾸지 않기를 맹세하고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고자 하니, 이런 것들이 흉중을 어지럽히는 것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슬픈 것은 상위(喪威)를 겪은 이래로 정신이 혼미해지고 근골이 마비되어 사색의 구멍이 전부 닫히고 떨쳐 일어날 힘이 완전히 끊어졌으니, 비유하자면 서리를 맞은 약한 풀이 쓸쓸히 생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 이 몸은 젊었을 때는 노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고 중년에는 세상사에 뜻을 빼앗겨 허다한 세월을 먹어버렸습니다. 5, 6년만 지날 것 같으면 옛사람이 덕을 이룬 나이에 꽉 차게 되건만 돌이켜보면 흉중이 텅텅 비어 하나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제 쓰러지고 무너지게 된 것이 이와 같으니 절대 스스로를 강하게 하여 끝을 잘 마칠 희망은 없습니다. 줄곧 휩쓸려 가는 세속 속에서 보잘 것 없이 지내다가 아무 이름도 없이 죽어 부친과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고 천고의 죄인이 될까 두렵습니다.
주석 45)곽림종(郭林宗)이……고사
임종은 곽태(郭泰)의 자이다. 곽태가 모용의 집에 유숙한 다음 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훌륭하다.[卿賢乎哉]"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 《후한서(後漢書)》, 권68 〈곽태열전(郭泰列傳)〉 《후한기(後漢紀)》 권23 〈효령황제기(孝靈皇帝紀)〉에는 "'경이 이와 같으니 바로 나의 벗이다.[卿如此 乃我友也]'라고 하고는 일어나서 마주 대하고 읍(揖)한 뒤에 학문을 권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주석 46)실수하여 고통 받는 것
원문의 '절지굉(折之肱)'은 팔이 부러진다는 뜻으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정공(定公) 13년에 "팔뚝을 세 차례쯤 부러뜨린 다음에야 그 방면의 명의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三折肱 知爲良醫]"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는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극복하는 힘이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주석 47)죽어서……교훈
뜻을 세운 선비가 가난 때문에 지조를 굽히지 않음을 뜻하는 말로,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지사는 죽어서 시신이 도랑이나 골짜기에 있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라고 한 것을 말한다.
答崔欽齋 丙辰
昔蒙枉吊, 見澤述之荐罹喪禍隕神遞魄, 慮因此而廢弛學業, 引林滄溪勉金農巖故事, 慰釋之。 繼投兩函, 以勿過毀損, 增益玉成見敎, 鄙雖無似, 豈不感泣圖副愛我之恩乎? 仍念澤述幼時, 讀《孝經》"立身揚名以顯父母"之語, 輒欣躍曰: "此眞人子事, 可勉之矣。" 然當日所見, 但知所謂立揚者, 學優而登于王庭, 志孚君上, 澤被天下, 鼎茵之享, 爵秩之榮, 及於親則足矣。 希慕勉力者, 惟此而已。 年十七, 先人訓不肖曰: "夫學有道學文學之異, 道學之學本也, 文學之學末也。 士之於學, 宜先本而後末。 吾聞艮齋田先生, 當今道學之師也, 汝往拜之。" 不肖銜先人之命納刺, 謁艮翁於蓬山僧寺, 何幸先生以爲可敎。 至引郭林宗訪茅容故事, 枉屈獘廬, 告以入道之方, 先人喜甚曰: "艮翁山斗之望, 瑞鳳之儀, 因汝稍觧文字, 光臨陋地, 其爲榮耀, 勝汝捷得巍科比, 猶可喜。 汝若淑身成德, 名立後世, 稱美及於所生, 倘復如何哉?" 遂具贄送于寧山。 不肖始知榮貴外, 自有立揚顯親之眞諦也。 不肖以是事先人, 先人以是勖不肖, 庶冀天眷, 獲遂吾願矣。 門祚衰薄, 弱冠有六, 奄棄先人, 禍出不意, 崩心塞臆, 寃酷痛悼, 倏經三霜。 前日銳進之氣, 一時銷鑠, 目下之債帳, 無計可脫, 乃自語於心曰: "先人平日, 所望於不肖者, 成身一事是也, 而不肖之學業未進, 先人之天年不待, 今雖一日百千盡死力而成之, 安得起先人於九原而親見之? 況此事固非一時強力之所至者乎? 惟是祭祀之奉, 後昆之託, 實祖宗來相傳大計, 宜思所以保守維持之道, 且養老未終之恨, 是先人之耿結泉下, 而委諸不肖者, 而甘旨告罄, 輕煖恒闕, 此非所以善繼志也。" 於是分功於簡冊, 用力於稼穡, 焦思勞心, 胼手胝足, 意謂"此在奉老保家之道, 不獲已也。" 如是者數年, 饑饉之災荐至, 疢疾之厄不絶, 世顚之顛頓, 如水益深而不可拯也。 因憬然大悟曰: " 《孟子》有云: '求則得之, 舍則失之。 是求, 有益於得也, 求在我者也。 求之有道, 得之有命, 是求, 無益於得也, 求在外者也。' 乃知貧富一定於天而不易者, 道義求之於身而可得者, 急於求其在天者, 緩於求其在已者也, 豈不誤哉?" 乃悔東隅之失, 誓桑榆之收, 欲刻意奮志, 痛加工夫, 則已覺精力非復舊日, 鑽研名理之際, 窣窣乎其難通, 時固可憫。 至於臨事而有義理之得失, 則深懲旣折之肱, 而稍易力於取舍之間也。 假之以十數年, 無事得以專心此事, 則庶有粗聞於斯道, 未可知也。 罪惡攸積, 天不見容, 荐降大禍, 五官離其職, 百軆無所措, 痛苦荼毒, 已不忍言, 加以內窶外禁, 一時湊洽, 蒼黃苟簡, 不成禮貌, 重爲罔涯之恨也。 若乃生事之廓落, 是生者之憂, 飢寒顚連, 誠有如尊慮者。 然竊有志於不忘溝壑之訓, 誓百折而不回, 欲九死而靡悔, 此不足爲胸中氷炭。 但所可悲者, 自經喪威以來, 精魄迷奪, 筋骨痿薾, 思索之實全閉, 振發之力頓絶, 譬如受霜之弱草, 索然無生意。 自念此身少而嬉戯浪度, 中爲世故所奪, 喫得許多歲月。 若過五六年, 恰滿古人成德之期, 反顧胸中空空無一得。 今被靡頹墮, 又如此, 絶無自強克終之望, 深恐一向碌碌于流俗中, 而沒身無名, 辜負父師之望, 而成千古之罪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