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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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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신헌에게 답함(答李愼軒 甲戌)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6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6.TXT.0015
이신헌에게 답함
앞서 올린 편지는, 비록 스스로 실로 마음을 다해 고하고 덕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뜻에서 나왔다고 여기지만 귀에 거슬리는 말과 마음에 어긋나는 말을 듣기 좋아하며 즐거이 취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게 여깁니다. 이런 까닭으로 마음에 전전긍긍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번에 어른께서 노기를 내리고 마음을 평정시켜 기꺼이 그 의론을 서서히 살펴 반복하시고 편지를 보내주셨으며 또 충심어린 가르침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니, 이것은 비록 어른에게 바라는 바였으나 크게 기쁨이 넘쳐서 뜻밖의 보물을 얻은 것 같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천하의 의리가 비록 정미하여 보기 어렵고 피차의 소견이 비록 어긋나서 합치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어찌 끝내 규명하지 못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마음으로 자축하며 실로 한줄기 양맥이 많은 음속에서 발현된 것이라 여겼습니다. 더욱 마땅히 서로 십분 힘을 쓰고 실효를 거두기를 기약해야지 그럭저럭 범범하게 흘려보내 이미 드러난 양광으로 하여금 장차 식어서 얼마 후에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감히 다시 진술하니 삼가 재가해주기를 바랍니다.
호서에서 시행된 단발의 변고를 듣고 온 천지가 그물망에 걸릴 것을 생각하여 통곡하고 상심하였으니, 이것은 단발의 변고에 격분되어 온 천지가 그물망에 걸린 것을 상심해 통곡하는 지경에 이르면서도 실정에 지나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씀하십니까? 이미 통곡하고 상심하였습니다. 영남은, 가까우면 직접 가고 멀면 편지로 물어서 영당의 건립에 힘을 얻기를 바라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그 위치를 편안히 여기지 못하여 시험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와 같은 처신에 대해서는 마음을 보존한 것이 이미 은미하고 일을 시행한 것도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재 속의 뱀과 그림 속의 용이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눈동자를 찍지 않으면 또한 스스로 그러한 줄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는 보고 양은 보지 못했다는 이유가 있는데도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간파되는 자가 많으니, 이것이 맹자가 본심을 잃었다고 논한 까닭입니다. 제발 유념하여 자세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애초부터 마음이 중립인 자는 진실로 논할 것이 없으나 권순명·유영선·김용승 세 사람에 이르러서는 서로 절교할 의리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런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전에 이미 두루 방문하셨으니 어찌 오늘날에 와서 이상하겠습니까? 어찌 적을 다스림에 먼저 그 당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까? 권순명·유영선·김용승은 바로 조조의 순욱 같은 무리입니다. 더군다나 을축년 11월의 통문은 오진영의 지휘와 사주를 받아서 전후로 분주히 뛰어다닌 자들입니다. 어찌 먼저 다스려야 할 난적의 당으로 어른께서 함께 지어 연명한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이전에 비록 방문한 일이 있으나 지금 분명한 글을 드러내 밝히시니 어찌 이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립하는 자들은 말해도 고치지 않으니 치지도외하면 되지만 반드시 그들과 더불어 서로 좇으며 사이가 없고자 한다면 우리도 그들과 더불어 모두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분명하게 입언할 수 있는 자이겠습니까?
오진영을 위하는 자는 오진영의 당이 아닙니까? 어찌 그들을 한결같이 서로 절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큰 과실 작은 과실을 운운하는 것은 주제를 잃었으니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절교당한 자가 과실을 고쳤다고 말하니 과실이 있다고 어찌 절교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절교를 했다면 반드시 그 과실에 고치지 못하여 죄가 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죄를 지었다면 그 죄를 자복한 이후에 비로소 다시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 무리들도 또한 그렇습니다. 지금 모두 자복하지 않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이미 다시 용서하고 한편으로는 편지를 통하고자 하니,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합니까? 을축년에 스스로 지은 통문의 내용과 상반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사의 뜻은 영남당 수백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그 이름을 다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어느 곳에서 이와 같음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진작부터 이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무함하는 말이니 놀라울 뿐입니다. 내 뜻은 선사가 만약 다시 일어나면 오진영의 당 수백 명을 한결같이 죄를 줄 것이니 해로움은 묻지도 않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문의 화가 컸으니 어찌 숫자가 많다 하여 그 이름을 다 삭제하지 못하겠습니까? 정자가 "천하의 적도를 주벌함에 살육이 비록 많더라도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저 또한 "사문의 적도를 성토함에 이름을 삭제하고 절교하는 것이 비록 많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라고 하겠습니다.
"비위를 맞춘다"주 16) 운운 하신 것은, 조목에서 논한 것이 본문의 뜻과 서로 너무 차이가 나니, 다시 자세히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와 그대가 도가 같지 않음이 없는 것은 진실로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도모할 뿐입니다. 그러나 도모가 행해지지 않으면 비록 억지로 같게 하려 해도 분명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과연 믿음이 미쳐서 서로 뜻이 맞은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진영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에 이른바 "인가를 내면서 선사에게 미뤄 핑계를 댔다."는 것과 "원고를 교정하여 문자를 변개했다."는 두 가지 일을 보고 어른께서는 용서할 만한 죄라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전날의 성토가 있었습니까? 이미 성토했으니 힘써 주벌할 수 있으면 주벌하고 주벌할 수 없으면 마땅히 삼가 오진영을 피하는 것을 또한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제 어찌 편지를 보내 서로 통하여 도리어 오진영의 적도들에게 비웃음을 당한단 말입니까? 우습기도 하고 한스럽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도 오히려 구제하여 그칠 수 있으니,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제발 다시 생각하고 다시 힘써 경계하기 바랍니다.
주석 16)비위를 맞춘다
원문의 '승망풍지(承望風旨)'는 풍지를 승망한다는 뜻으로, '승망'은 의중을 살피고 엿본다는 뜻이고, '풍지'는 풍도(風度)와 지의(旨意)로 상대방의 표정과 뜻이다.
答李愼軒 甲戌
前書之呈, 雖自謂"實出忠告, 而愛人以德之意", 然逆耳之言, 拂心之辭, 喜聞而樂取者, 古今以爲難。 是以不免有兢兢於心。 乃者丈降氣平心, 肯與徐審反覆其論, 而賜之書, 且謂"忠誨", 此雖所望於丈者, 然喜溢之極, 如獲望外之寶。 苟如是也, 天下義理, 雖曰精微而難見, 彼此所見, 雖曰參差而難合, 豈有終不得究終不得一之理? 心竊自賀, 以爲"此實一線陽脈之發見於群陰之中者"。 更宜十分著力, 期收實效, 不可悠悠泛泛, 使已見之陽光, 將息而旋消也, 明矣。 敢復陳之, 伏惟取裁。
聞湖西薙變, 而想及天羅地網, 而痛哭傷心, 則是激觸於薙變, 而傷心於網羅, 至於痛哭, 而不覺情之過越者也, 何謂初無云耶? 旣已痛哭矣傷心矣。 嶺, 欲近則躳往, 遠則書問, 以冀得力於影堂之建, 則此非不自安其位而欲有所試而何? 凡於此等去處, 存心旣微, 行事未著, 有同灰蛇畫龍, 非迫視点睛, 亦不自知其然。 所以有見牛未見羊之故, 而不自覺知, 反爲他人忖度者多, 此孟子所以有失其本心之論者也。 千萬留念而致詳焉。
從初之心中立者, 固勿論, 至權柳金三人, 思之無相絶之義, 故未有此事。 前已有歷訪, 何怪於今日乎? 豈不聞治賊先治其黨與? 權柳金, 乃曹操之彧群也。 何況乙丑復月通文, 承震指嗾, 奔走先後者, 詎不爲亂賊之黨先治, 丈之同製聯名者乎? 前雖有訪, 今露明文, 安得不怪也? 其中立者, 喩之不改, 置之度外則可, 必欲與之相從而無間, 則吾亦與之俱化矣, 此豈可以明明立言者乎?
爲吳者, 非吳黨乎? 何可謂之不可一向相絶也? 大過小過之云, 失題矣, 不須論。 絶者, 改過之云, 過, 豈有絶之之理? 絶之, 則必其過有不可改而成罪者矣。 旣罪矣, 則服罪而後, 始可復容矣。 其黨亦然。 今皆不服, 而一則已爲復容, 一則欲爲書通, 何所據而然耶? 其柰與乙丑自製通文中語相反何?
先師之意, 其於嶺黨數百人, 必不盡割其名, 何處得見其如是, 而曰旣如是也。 此又一誣說, 可駭也。 吾意使先師復起, 而震黨數百人, 一向遂罪, 則勿問害已。 其始斯文之禍爲大, 豈可以多數, 而不盡割其名乎? 程子曰: "誅天下之賊, 殺戮雖多, 亦何害?" 吾亦曰: "討斯文之賊, 割絶雖多, 亦何害?"
承望風旨云云條所論, 與本文之意, 相燕越, 更爲看詳, 如何?
吾與子無不同之道, 固所望也。 是以有謀耳, 謀之不行, 雖欲強同, 必不可得矣。 第未知果能信及而脗然相合矣乎? 觀其擬與吳書中, 所謂"出認而推托先師", "校稿而變改文字", 兩件事, 丈以爲可容之罪乎? 則何以有前日之討也? 旣討矣, 則力能誅之則誅, 不能誅則亦當謹避震也, 亦能云爾。 今何與書相通, 反貽震賊所竊笑也? 可笑又可恨也。 及今猶可捄止, 則幸莫大矣。 千萬更思, 復厲之戒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