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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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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신헌에게 보냄(與李愼軒 己巳)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6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6.TXT.0008
이신헌에게 보냄
지난 20일 사이에 함재 어른이 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김처중이 김용승과 함께 산북에 있는 견암(堅菴 김태희(金泰熙))을 방문하여 견암이 이미 김용승과 옛날처럼 잘 지내기로 하고 자신이 절교를 고한 과실을 사과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나 또한 갑자기 먼저 절교한 미진함을 사과하고 저들로 하여금 묘에 가서 고하여 죄를 자복한 연후에 옛날처럼 잘 지내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견암 일이 잘못이라는 것과 함재 어른의 뜻이 구차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장로(長老)는 후배들이 우러러 바라보아 법을 살피는 분인데 이제 의리를 보고 의리를 재단함이 이와 같으니, 세교(世敎)는 장차 무엇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김용승의 말에 "우리와의 절교를 주동하는 자는 김택술이고 나머지 늙고 귀 먹은 사람들은 그 바람에 취해 쓰러진 것이니 책망할 것도 못 된다." 했는데, 이 말은 이미 사실도 아니고 또한 제가 감당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두 분의 장로가 이미 이전의 견해를 바꾸어 나머지 사람들을 보전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이 말이 불행히도 들어맞게 되었습니다. 또 겉으로는 김용승과 절교하고 안으로는 음성 오진영 쪽과 친한 것이 호남을 성토하는 한 자루의 이야깃거리입니다. 이제 만약 그들이 죄의 자복을 고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과실을 사과하고 우호를 청한다면 음성 쪽의 이런 성토를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순전히 스승으로 섬기고 돌아가신 뒤에 사우(師友)로 대하니, 이미 배반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이 나오기 전에는 순전히 스승으로 섬기고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이 나온 뒤에 사우로 대한 것은 그 배반이 한층 더 깊어진 것입니다. 을축년(1925) 여름에 어른이 현암에서 김용승을 피해 오셔서 그가 회봉(晦峰 김봉환)과 한 말을 전해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말에, "신해년 유서가 엄하기는 엄하나 경신년 유서의 '말하기 어려운 일은 감히 지묵 사이에 드러낼 수 없는 점이 있다.' 하신 유훈주 8)은 너무나 모호하고, 임술년에 홀로 앉아 계실 때 명을 받았다는 것은 의당 분명 있었다." 하였으니, 이 말은 선사를 깊이 의심한 것입니다. 말을 들어보고 사람을 살핌에 정황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이 이와 같은데, 오히려 스승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먼저 스스로 과오를 사과하고 우호를 청한단 말입니까? 당일의 사실 같은 경우는 창암 어른(박민환)이 제창하여 말하기를, "김씨(김용승)와 절교하고 오씨(오진영)을 성토해야 한다." 하자, 여러 장로가 한 목소리로 동의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이보다 먼저 이미 마땅히 절교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급기야 그들이 스승의 영령에 고하는 것을 보다가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했으며 그들에게 묘 앞에 가서 고할 것을 권하였으나 또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우간'이라는 말을 발설하니, 다만 이전 편지의 의리만 쓸 뿐 다시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함께 앉아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연서의 끝에 이름이 들어갔습니다. 여러 장로들께서 이미 당시의 일을 주관하고 여러 장로들께서 먼저 당시의 의리를 무너뜨렸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주석 8)경신년……유훈
이 유서는 《사백록(俟百錄)》 권1 〈사무변명(師誣辨明)〉에 실려 있다. 원문의 '난언(難言)'은 의미가 다 드러나지 않아서 유서 내용의 "有難言之事 不敢形之於紙墨間者"를 참고로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與李愼軒 己巳
去念間, 涵丈來言: "近金處中同金容承, 過堅菴於山北也, 堅菴已與容承續舊好, 而謝其告絶之過。" 又言: "吾亦欲先謝遽絶之未盡, 而令彼告墓服罪, 然後續好如舊云。" 故鄙爲言堅事之誤錯涵意之苟且矣。 蓋長老者, 後輩之所仰望, 而觀法也。 今其見理裁義, 乃如此, 世敎將何恃哉? 金言"主絶我者, 金澤述也, 餘老聵者, 醉偃其風, 不足責", 此言旣非其實, 亦非鄙所敢當。 然自一二長老, 旣改前見, 而難保餘人, 則此言不幸而見中矣。 且外絶金, 而內親陰邊討湖之一柄話欛也。 今若不待其告服, 而謝過請好, 則陰邊此討, 安可逃乎? 蓋生前純師之, 死後師友之, 已不可不謂倍, 而認誣前純師之, 認誣後師友之者, 更深一層。 記昔乙丑夏, 丈自玄巖避金而來, 傳其與晦峰言者有曰: "辛亥遺書, 嚴則嚴矣。 庚申難言之訓, 已是模糊。 壬戌獨命, 宜其有之。" 此是深疑先師者。 聽言觀人, 情狀躍如如此, 而尚可謂非倍師, 而先自謝請乎? 若當日事實, 則鬯丈倡言曰: "可絶金而討吳", 諸長老同聲然之。 此漢則先是, 已投當絶之書, 及見其告靈, 而遭拳踢也, 勸其往告墓前, 又見其不聽, 而復發師友間之說, 則只當用前書之義, 而不必更提也。 但以在同座之故, 參於聯書之末矣。 自諸長老, 而旣主當日之事, 自諸長老, 而先壞當日之義, 竊所未曉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