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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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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 전장화구에게 보냄(與靜齋田丈華九 ○甲子五月)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5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5.TXT.0057
정재 전장화구에게 보냄
김용승의 일은 매우 불행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이 일은 누가 시킨 것입니까? 하나는 선사가 일찍이 인의(認意)를 두었다고 말한 것이고 다음은 선사가 일찍이 인교(認敎)를 두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스스로 후사를 담당한 사람의 입으로부터 나왔고, '홀로 앉았을 때 남들과 다르게 들었다'고 한다면, 동문 수천 명이라도 감히 잘못됨을 바로잡을 수는 없습니다. 이른바 오래도록 친자(親炙)주 180)를 받은 자들이 도리어 떼거리로 일어나 이 말을 옳다 여기고, 한두 사람 힘이 약한 졸필이 애써 분별하여 알리려고 해도 길이 없습니다. 김 씨처럼 직접 수학하길 오래도록 하지 않은 자가 어찌 오히려 선사의 심사에 의혹을 낳지 않겠습니까? 기개와 절개에 격분하여 나도 모르게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의 이 일은 누가 시킨 것입니까? 가슴이 아프고 아플 뿐입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김 씨의 처신을 논해 본다면, 명분과 관련이 있으니 다만 망령되고 그릇되다 말할 수만은 없을 따름입니다. 선사가 절해(絶海)에서 스스로 바르게 한 절개와 호적에 올리지도 말고 죽거든 시신을 바다에 던지라던 의리주 181)는 진실로 천지신이 살펴본 것이고 부녀자와 아이들도 아는 것입니다. 비록 김 씨라 하더라도 또한 어찌 이를 모르겠습니까? 만약 선사의 절의와 바른 말에 확실히 근거하여 통렬하게 변론함이 가면 갈수록 더욱 힘 있어진다면, 선사와 함께하기를 자처함에 어찌 두 사람 모두 유감이 없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한 사람의 속이는 말을 분별하는 것이 어렵다 해서 명분에 죄를 짓는 일을 하는 것입니까? 애석하고 애석합니다. 이것은 이미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 원통하고 한스러운 것은, 선사가 인의(認意)를 두었다는 설이 나라 안에 가득하여 곳곳마다 많은 사람들의 의론과 공언에 이르기를, "인의를 둔 것은 모 어른이고, 인의에 대해들은 것은 모공이라고 합니다. 고제라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면, 선생이 반드시 일찍이 인의를 두었을 것이니, 이른바 후사를 의탁한다는 것은 일을 의탁한다"는 것입니다. 별것 아닌 일에 크게 놀라고, 어리석게 앉아 있다가 서서 배척을 당하니 고가진신(故家搢紳)의 외롭고 맑은 충절과 유문(儒門) 장보(章甫)주 182)의 높은 행실과 탁월한 식견이 또한 마땅히 수시로 기록하고 논척(論斥)해야 하는데, 수천 명이 말하면 공론이 되고, 오래 전해지면 사실이 되니, 진실로 두렵고 염려스럽습니다. 이 속임수를 분변하지 못하면 선사께서 평생토록 지킨 절의가 없던 일이 될 것이니, 어찌 지하에서 원통하고 치욕스럽지 않겠습니까? 자손과 문인이 무슨 얼굴로 세상에 서겠습니까? 하물며 근래에 김 씨 일이 있은 후에 한층 더욱더 심해져서, 깨끗이 씻어 아무런 죄가 없게 되는 것은 거의 황하를 끌어당기고 태산을 흔드는 것과 같으니, 만약 죽을힘을 다하여 도모하지 않는다면 결코 어려울 것입니다. 생각건대 자손 중에는 오직 애장(哀丈)과 두 형 뿐이고, 문하에는 2,3명에 불과하니, 매우 외롭고 나약합니다. 장차 어찌해야 선사의 마음을 청천(靑天)의 밝은 해처럼 밝혀서 현혹된 전 국민을 크게 깨우치겠습니까. 흥분해서 말을 하다가 여기에 이르니 마음이 한심할 뿐입니다.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선사 발밑의 일원으로 한 푼의 은혜를 받았으니 두텁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선사의 무고함이 저를 통해 조금이라도 변론이 된다면 비록 수만 번 죽어 사라지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 보잘 것 없고 말이 가벼우며 문식이 천박하고 짧아서, 비록 이 일에 종사하고 싶더라도 그렇게 할 길이 없으니, 스스로 원통하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군자가 논의를 세움은 공적이고 바르며 조심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또한 변척하는 도는 핵심을 요약하고 확실한 증거를 잡아내야 하며, 절대로 노여운 상태에서 기세를 부려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과중하게 가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변척이 성사되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불복할 것이니, 바라건대 상중에 계신 어른께서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를 계기로 생각건대, 어른의 정신과 심력, 견식과 의리로 가학을 잇는 것을 큰 책임으로 삼지 않는다면 다시 누구를 기다리겠습니까? 하물며 어른의 창안백발은 다시 옛날 같지 않은데 구구하게 살 계획을 또한 어찌 구할 것이 있겠으며, 구하더라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경전과 문헌을 연구하여 관통함으로써 존양(存養)의 바탕으로 삼고, 후진을 수습하여 세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이것이 지하에 계신 선사의 혼령을 위로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이것이 선사께서 부탁하신 뒷일을 감당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주석 180)친자(親炙)
스승이나 존경하는 분의 가까이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백세 위에서 떨쳐 일어남에 백세 아래에서 이를 듣고 흥기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성인이 아니라면 이렇게 만들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직접 배운 제자의 경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奮乎百世之上, 百世之下 聞者莫不興起也, 非聖人而能若是乎. 而況於親炙之者乎〕"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181)선사가……절해
간재는 평생을 반일(反日)로 살았고 왜놈들이 싫어서 일본식 호적을 거부하고, 묻힐 곳이 없으면 시신을 바다에 던져버리라(不籍之事, 沈尸之誓)고 하였다.
주석 182)장보(章甫)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가 일찍이 공자를 뫼시고 앉았을 때, 공자가 이르기를 "평소에 너희들이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라고 하는데, 혹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居則曰不吾知也, 如或知爾, 則何以哉?〕"라고 하자, 맨 처음 자로가 대답하기를 "천승의 나라가 대국의 사이에 속박을 받아 전쟁이 가해지고 인하여 기근이 들더라도 제가 그 나라를 다스리면 3년에 이르러 백성들을 용맹하게 할 수 있고, 또 의리로 향할 줄을 알게 할 수 있습니다.〔千乘之國, 攝乎大國之間, 加之以師旅, 因之以饑饉. 由也爲之, 比及三年, 可使有勇, 且知方也.〕"라고 하였고, 염유가 대답하기를 "사방 6, 7십 리나 혹은 5, 6십 리쯤 되는 작은 나라를 제가 다스리면 3년에 이르러 백성들은 풍족하게 할 수 있거니와 예악에 대해서는 군자를 기다리겠습니다.〔方六七十, 如五六十, 求也爲之, 比及三年, 可使足民. 如其禮樂, 以俟君子.〕"라고 하였고, 공서화가 대답하기를 "제가 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를 원합니다. 종묘의 일과 제후들이 회동할 때에 현단복을 입고 장보관을 쓰고 작은 집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非曰能之, 願學焉. 宗廟之事, 如會同, 端章甫, 願爲小相焉.〕"에서 나온 말이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與靜齋田丈華九 ○甲子五月
金容承事, 不幸甚矣。 然此人此事, 是誰之使? 一則曰先師曾有認意, 再則曰先師曾有認敎。 出自自擔後事人之口, 而謂'是獨坐異聞', 則擧同門千數, 莫敢矯其非。 所謂親炙日久者, 乃反朋興而是其言, 一二人孱力單筆, 戞戞乎欲爲之辨白而無其路。 若金之親炙未久者, 豈不反生疑惑於先師心事哉? 氣節所激, 自不覺至此, 蓋此人此事, 是誰之使? 痛矣痛矣。 雖然若論金之所處, 則有關名分, 不可但道妄錯而已。 先師絶海自靖之節, 不譜沈尸之義, 實神祗之所鑑, 婦孺之所知。 雖金亦豈不知此? 使其確據先師之節義正言, 痛辨愈往愈力, 則爲師與自處, 豈非兩無憾爲者乎? 奈之何, 只緣一人誣言之難辨, 而行此得罪名分之事? 惜哉惜哉。 此則旣然矣, 最所痛恨者, 先師有認意之說, 充滿國中, 在在群議, 處處公言 曰: "有是哉, 某丈也, 彼哉, 某公也。 高足人而曰有矣, 則先生必曾有矣, 所謂託後者, 託是事也。" 大驚小怪, 坐嗤立排, 故家搢紳之孤忠淸節, 儒門章甫之高行卓識, 亦應劄記之論斥之, 千口成公, 久傳成實, 誠可畏可慮也。 此誣不辨, 則先師平生獻靖, 歸於烏有, 豈不寃鬱憤, 恥於泉下乎? 子孫門人, 何顏立於人世乎? 而况近日金事之後, 一節深一節, 一層重一層, 淸洗白脫, 殆若挽河而撼山, 如不盡死力圖之, 決乎難矣。 而念在子孫, 惟哀丈與二哥, 在門下, 不過二三人, 孤弱甚矣。 將何以明先師之心, 如青天白日, 大破全國人眩惑? 興言至此, 心爲之寒。 如侍生之無似者, 亦先師脚下, 一分子受恩, 不可謂不厚矣。 使先師之誣, 由侍生而得粗辨, 雖滅死萬萬無恨。 但人微言輕, 文識淺短, 雖欲從之, 末由也已, 只自痛恨。
君子立論, 務要公正審愼。 辨之之道, 又要要約精核捉得眞贜。 切戒乘怒動氣, 加人以些子過重, 如此則辨未及成, 而人先不服, 願哀丈之毋忽也。 因念以哀丈之精魄心力, 見識義理, 不以紹家學, 爲一大任, 而更待何人? 而况哀丈之蒼顏白髪, 非復昔日, 區區計活, 亦何足求, 求亦難得。 只有究貫經籍, 用資存養, 收拾後進, 少補世程, 是爲慰泉下之靈, 是爲擔後事之託也。 未審哀丈以爲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