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열람
  • 디렉토리열람
  • 유형분류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5
  • 나재 종장에게 보냄(與懶齋宗丈辛未)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5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5.TXT.0051
나재 종장에게 보냄
지난번 망령되게 한 편지를 두 어른에게 동시에 드린 것은 정말로 두 어른이 논쟁을 풀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답장을 받고 어른의 뜻은 저의 좁은 견해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보여주신 함재어른의 편지의 뜻도 제 뜻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는데, 두 어른의 주장은 연나라와 월나라 마냥 서로 크게 차이가 나서 서로 의견이 합치될 가망이 없으니 이루 한탄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충언을 드리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일찍이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존장의 편지에 인용하신, 선사께서 편지로 수없이 가르친 중화와 오랑캐에 대한 엄방(嚴防)은 보잘것없는 저도 감히 이미 알고 있는 바주 168)라고 여깁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절개를 굽히면서도 관대를 갖추는 것은 오히려 그른 듯하다는 설을 둠에 이르러서는【절개를 굽힌다는 것은 오랑캐에게 벼슬하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 경학원(經學院)주 169)의 교사가 월급 백 원을 받아먹으면서 오히려 상투와 옛 의관을 보존하는 자가 있다.】 또한 잠시 기미에 임해 모습을 바꾸어 복수하는 의론을 위해서였으니, 이는 반드시 어쩔 수 없는 의리와 마땅히 그러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번거롭게 말씀을 드리지 않은 것은, 같은 집안이요 같은 문하에서 두 의론이 화합을 잃은 것도 이미 불행인데 다시 여기에 보태 세 갈래로 만들어서 분분하게 편지를 주고받으면 외부 사람들의 기롱을 야기하는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었으니, 그러므로 우선은 그만둔 것입니다. 삼가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재가한 어머니에 대하여 기년복을 입는 것은 그 어머니가 아버지와 끊어졌기 때문에 복을 낮춘 것이고, 본생부모(本生父母)주 170)에 대하여 기년복을 입는 것은 적통이 둘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복을 낮춘 것입니다. 본생모이면서 개가한 어머니의 경우는 양자로 간 집의 아버지와 애당초 끊어지고 말고를 논할 만한 것이 없고 또 적통을 둘로 하는 혐의도 없는 반면에 낳아 길러준 은혜는 본디부터 있었으니, 두 번 복을 낮추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선사께서 "본생모이면서 개가한 어머니에 대한 복은 대공복이니, 한 번은 출계(出系)하고 한 번은 개가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셨다는 말은 진주본에 실려 있습니다. 삼가 제 생각으로는, '한 번은 출계하고 한 번은 개가해서 복을 두 번 낮춘다.'는 글은 고모, 자매, 조카 때문에 말한 것인데, 이제 모자간에 인용하여 양자로 간 집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리에서 기년복을 입지 못하게 하니, 올바른 부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그러한 내용이 화도수정본에는 보이지 않아서 그것이 정론이 아니기 때문에 선사께서 친히 삭제하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종장께서 보내주신 기년복설을 받들매 선사의 전말에 대해 인정해 주셨으니, 더욱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석 168)이미 알고 있는 바
원문의 '이견지소릉(已見之昭陵)'은 '이미 본 소릉'이라는 뜻으로, 당 태종(唐太宗)과 위징(魏徵)이 나눈 대화에서 유래한 말이다. 소릉은 당 태종의 비 문덕황후(文德皇后)의 능인데, 태종이 황후를 못 잊어 망루를 세우고 늘 올라가 소릉을 바라보곤 하였는데, 한번은 위징과 함께 올라갔으나 위징이 눈이 어두워 잘 안 보인다고 하다가 태종이 소릉을 가리켜서야 마침내 "신은 폐하께서 헌릉을 바라보시는 줄로 여겼습니다. 소릉이라면 신이 진즉 보았습니다.〔臣以爲陛下望獻陵 若昭陵 臣固見之〕"라고 하여 태종을 깨우쳤다는 고사이다. 헌릉은 태종의 어머니 능이다. 《구당서(舊唐書)》 권71 〈위징열전(魏徵列傳)〉
주석 169)경학원(經學院)
일제강점기 때의 유교 교육기관으로, 원래 1887년(고종 24)에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칭했고 1894년(고종 31)에 폐지되었으나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총독부가 1911년 6월 15일에 조선총독부령 제73호 경학원규정에 따라 경학원을 부활하였으며, 천황의 하사금으로 설립되어 총독부의 식민 정책에 부합하는 교육 기관으로 전락했다.
주석 170)본생부모(本生父母)
양자로 간 사람의 친부모를 말한다.
與懶齋宗丈辛未
頃者, 妄意一書, 同進二丈者, 亶爲二丈釋爭地也。 今承下答, 乃知尊意, 旣非管見所測, 示及涵丈書意, 亦與鄙意有異。 而二丈所主, 則乃相燕越, 而無望相合, 豈勝可歎? 若知其獻忠之無效, 曾不如不爲之爲愈也。 尊喩所引, 先師許多書訓之嚴防華夷者, 區區亦敢謂已見之昭陵也。 非惟是已, 至有若涉屈節冠帶猶否之說【屈節指仕於夷狄, 今經學院敎師, 食月俸百圎而, 尙有存髻歸衣冠者】, 且爲暫時臨機變形復讐之論, 是必有不得已之義, 所當然之據矣。 然而不敢煩瀆者, 同宗同門, 二論失和, 已是不幸, 而復益之以成三岐, 紛紜往復, 惹招外譏不少, 故且已之。 伏惟有以諒之。
嫁母之服朞, 以其與父絶而降也; 本生父母之服朞, 以其無二統, 而降也。 若本生嫁母, 則於所後家, 初無絶否之可論, 又無二綂之嫌。 而其生育之恩, 則固自在, 恐不宜再降也。 而先師說"本生嫁母, 服大功, 一出一嫁, 不得不然"之云, 載於晉本。 竊以爲一出一嫁再降之文, 以姑姊妹姪而言, 今引用於母子之間, 而使不得服朞於無礙所後之地, 似非其類。 且以不見於華本, 意其爲未定論, 而親刪者矣。 今承宗丈朞說, 蒙可於先師之顚末, 尤可以無疑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