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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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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재 종장에게 답함(答懶齋宗丈 戊午)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5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5.TXT.0049
나재 종장에게 답함
우리나라의 성묘(聖廟)주 159)는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의 위차를 누가 정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예의(禮意)로 헤아려보건대 감히 트집을 잡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옛날 태묘의 협향(祫享)주 160)은, 태조의 신위는 서쪽 벽 아래에 안치하여 동쪽을 향하고, 군소(群昭)의 신위는 태조의 왼쪽에 두어 남쪽을 향하며, 군목(群穆)의 신위는 태조의 오른쪽에 두어 북쪽을 향하였습니다. 후세에 소목의 제도가 없어져서, 주오(主奧)주 161)가 동쪽을 향하는 것이 높임이 되는 줄은 모르고 다만 북쪽 벽 아래에서 남쪽을 향하는 것이 높임이 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공자의 신위를 성묘의 북쪽 벽 아래에서 남쪽을 향하는 자리에 안치하였으니, 공자의 자리가 이미 이와 같은 이상 배향(配享)하는 제위를 좌우로 나누어 배열해서 동서로 서로 향하게 한 것은 이치와 형세 상 자연스러운 것이고, 또한 군소군목(羣昭群穆)을 태조의 좌우로 나누어 배열해서 남북으로 서로 향하게 한 것과 같습니다. 대체로 이것이 소목법(昭穆法)을 온전히 사용한 것이라고 말하면 안 되지만 실제로 소목의 뜻을 보존하였다고 하면 괜찮으니, 이를 따라 행하는 것은 자연 의리를 해치지 않거니와 《가례》 〈사시제(四時祭)〉의 "부위(祔位)는 동쪽 서(序)에 두어 서쪽을 향하게 한다."라고 한 문장을 인용하여 배향하는 신위를 동쪽 벽에 배열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부주(祔主)가 사당에 있을 때 각각 본감(本龕 당사자의 감실) 정위(正位)의 동쪽에 거하여 서쪽을 향했다면, 제사를 지낼 때에 배설하는 자리도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다만 민가의 대청은 좁아서 정위와 부위를 똑같이 한 곳에 배설하면 정조(鼎俎)와 변두(邊豆)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적당하게 여러 부위를 동쪽 벽 아래에 나열하여 정위의 동쪽에 있게 합니다만, 이것에 근거하여 성묘의 위차를 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또한 소로 부위(父位)를 삼고 목으로 자위(子位)를 삼는데, 안자와 증자 처럼 동문과 형제의 항열에 있는 자를 소목으로 일컬어 좌우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습니다. 협향할 때에 태조를 주위(主位)로 삼아 군소와 군목을 좌우에 나누어 배열하고, 성묘 안에서는 공자를 주위로 삼아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좌우에 나누어 배열하니, 다만 주위와 배위를 정설하고 분설하여 피차가 서로 비슷함을 말한 것일 뿐이지 모두 소목과 부자의 윤리를 취하여 같게 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또 개원주 162) 석전례에서 선성(先聖)은 동향하고 선사(先師)는 남향하여 오른쪽을 높은 자리로 삼는다는 설을 인용하여 배위가 동향하는 것은 선성이 동향하는 자리를 침범하는 것이 된다고 말하니, 이 또한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선성이 동향한 것은 정통으로 서쪽 벽에 거하여 주오가 선사의 오른쪽에 있으니, 참으로 오른쪽을 높은 자리로 삼은 것입니다. 지금 이 배위가 동향한 것은 이미 북쪽 벽 정위의 아래에 거하였고 또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는 자리와 반열을 나누어 마주앉아서 정통의 완전한 존위를 차지할 수 없으니, 비록 오른쪽에 있으나 혐의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제 견해로는 영양사주 163)의 영정을 봉안한 위차는 아마도 바뀌지 않을 제도가 되어서 후인들의 의론을 끊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상(大祥)에 백망건을 쓰는 것은 《사례편람》 이후에 마땅히 다시 이론은 없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어느 복을 막론하고 이미 백립을 썼다면 모두 백망건을 써야 할 듯합니다. 대개 갓과 건은 똑같이 머리에 쓰는 것인 만큼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국상에서 흑망건을 쓰는 것은 진실로 이미 의심할 만한데, 근래에 기년복과 대공복을 당한 사람이 이미 백립을 쓰고도 흑망건을 바꾸지 않는 것은 또한 뒤섞임을 면하지 못한 듯합니다.
주석 159)성묘(聖廟)
공자(孔子)ㆍ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의 아버지의 신주를 모셔 놓고 제사 지내는 사당(祠堂)이다. 조선 시대 문묘(文廟) 안에 있었으며 계성사(啓聖祠)라고 일컬었다.
주석 160)협향(祫享)
협제(祫祭)와 같은 말로, 천자나 제후가 멀고 가까운 조상의 신주(神主)를 태조묘(太祖廟)에 함께 모아 놓고서 지내는 대합제(大合祭)를 말한다.
주석 161)주오(主奧)
오(奧)는 실(室)의 서남쪽 모퉁이로, 방 안에서 가장 깊숙하고 가장 으뜸이 되는 자리이다. 《예기(禮記)》〈곡례(曲禮)〉에 "자식 된 자는 거처할 적에 아랫목을 차지하지 않는다.〔爲人子者 居不主奧〕"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주오는 바로 이곳에 앉을 수 있는 자로, 가장 웃어른이나 신주(神主)를 말한다.
주석 162)개원(開元)
당나라 현종의 연호(713년 12월~741년)을 말한다.
주석 163)영양사(瀛陽祠)
정읍에 있는 영주정사와 영양사는 등록문화재 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후기 정읍 출신 유학자 박만환이 영주정사(講堂, 瀛陽祠)를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면서 중국의 오성육현(五聖六賢)의 영정(影幀: 채용신 작)을 봉안한 곳이다. 강당을 앞에 두고 뒤쪽 높은 곳에 사당을 건축하여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사우(祠宇) 형태를 보이고 있다.
答懶齋宗丈 戊午
我國聖廟, 先聖賢位次, 未知誰氏所定, 而揆以禮意, 恐不敢間然也。 古者太廟祫享, 太祖居西壁下東向, 群昭在太祖之左而南向, 群穆在太祖之右而北向。 後世昭穆之制廢, 不知主奧東向之爲尊, 但知北壁下南向之爲尊。 故孔子居聖廟北壁下南向之位。 孔子之位旣如此, 則配享諸位之分列左右而東西相向者, 理勢自然, 而亦猶群昭群穆之分列太祖左右而南北相向也, 蓋謂之全用昭穆之法則不可, 而實存昭穆之意則可矣, 遵此而行, 自不害義, 恐不當引家禮時祭, '祔位在東序西向'之文, 而列配享位於東壁也。 夫祔主之在廟也, 各居本龕正位之東而西向, 則祭時之設位, 亦自當如此。 而但以人家廳堂狹隘, 正位祔位, 同設一處, 則不足以容鼎爼邊豆。 故從宜而列諸祔位於東壁下, 使居諸正位之東, 其不當據此而改定聖廟位次也, 明矣。 且以昭爲父, 穆爲子, 而謂不宜以顏曾在同門兄弟之列者, 稱以昭穆而分左右, 則此有可說者。 祫享之時, 以太祖爲主, 而以群昭群穆分列左右。 聖廟之中, 以孔子爲主, 而以顏曾思孟, 分列左右, 蓋只謂主位配位, 正設分設, 彼此相類而已, 非幷取昭穆父子之倫, 欲同之也。 且引開元釋奠禮, 先聖東向, 先師南向, 以右爲尊之說 謂配位東向者, 涉先聖東向之位, 此又有不然者。 先聖之東向, 綂居西壁, 而主奧在先師之右, 誠以右爲尊矣。 今此配位之東向, 旣居北壁正位之下, 又與東邊西向之位, 分班對坐, 而不得據有綂全之尊, 雖則在右, 恐無所嫌也。 故淺見以爲瀛陽祠影幀奉安位次, 恐不得爲不易之制, 而絶後人之議也。
大祥白網巾, 便覽以後, 當更無異論矣。 鄙意毋論某服, 旣用白笠, 則恐皆用白網巾。 蓋以笠與巾, 同一頭著, 而不可以異同也。 我國國恤中, 黑網巾, 固已可疑, 近日遭朞大功者, 旣用白笠而不變黑網巾, 似亦免斑駁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