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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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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재(김낙두) 족숙에게 답함(答涵齋族叔 甲子)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5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5.TXT.0034
함재(김낙두) 족숙에게 답함
지난번 편지에, "군사(郡事) 부군(府君)주 108)의 유적을 추모하여 감개의 뜻을 매우 지극히 하였는데, 길이 보존할 방도를 생각하고 있다." 하셨으니, 백번 받들어 읽음에 효를 생각하는 마음이 끝없음에 우러러 감복하였고 또 나의 마음을 먼저 알아챘음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기미를 알아보는 것을 명철(明哲)이라 이르고 발자취를 고상히 하는 것을 달절(達節)주 109)이라 하니, 일을 만나 의리를 취하여 몸을 잃지 않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부군이 고려의 세가로 종실인 창녕군의 사위가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뜻을 굽혀 높은 벼슬과 많은 복록을 취하는 데에 마음을 두었다면 주머니속의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시사가 어찌해볼 수 없음을 환히 알았으나 차마 종국(宗國)이 망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고 또 망복의 뜻주 110)을 보존하는 것이 중대하다고 여겼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도리를 다하여 선왕에게 의로운 뜻을 바쳤으니주 111) 그 의리는 기자의 명이(明夷)주 112)이며 그 자취는 노중련(魯仲連)의 동해(東海)주 113)와 같으니, 포은(圃隱), 목은(牧隱) 제현들이 나라를 위해 죽거나 발자취를 감춘 것에 비교해볼 때, 명성과 지위의 한미하고 현달함이 비록 같지 않음은 있으나 그 보존하고 실천한 것은 똑같이 나라를 근심한 열렬한 절의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위로 고인을 논하는 자들의 입에서 우열이 논해질 수주 114) 있겠습니까? 부군께서 하신 이런 일은 이치를 따른 것이고 분수를 다한 것이니, 단지 눈앞의 당연함을 보았을 따름입니다. 어찌 몸과 집안의 이익과 재앙 및 후손들의 흥망을 계산했겠습니까?
그러나 나 같은 후손은 지극한 은혜와 두터운 덕을 부군에게 특별히 입은 것이 있습니다. 우왕과 창왕 때에 나라에 일이 많아서 종신대신들을 일망타진하였습니다. 창녕군 한 집안도 죽거나 귀양을 다 갔는데, 만약 부군이 기미를 봄이 밝지 못하고 물러남이 용감하지 못했다가 결국 한번 죽음을 힘써서 그것 때문에 멸족이 되었다면, 우리 김 씨 수천 명 종족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겠습니까? 부군의 의리를 더욱 믿지만 의리는 홀로 의리가 될 수 없고 인과 더불어 행해야만 넉넉하여 구차스럽지 않습니다. 오직 성씨가 바뀌어 나라가 교체되는 때에【역성의 때】 사서에 궐문이 많고 문장 또한 꺼리는 것이 있어서 기전 송헌은 아득하여 징험하기 어려우니 단지 "망복의 뜻을 지니고 온전히 관향으로 돌아왔다"는 여덟 글자만이 쓸쓸이 예전 보첩 중에 있으니 그 후손들의 한스러움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매우 다행스럽게도 만수산주 115)의 충의록이 나와서, 부군이 여덟 번 판사를 지냈다는 것과 두문동 72현주 116)과 한 몸으로 도를 같이 했다는 것이 《충의록》중에 찬란히 빛나니, 공자의 옛집 벽의 문서주 117)와 범백숭의 무덤인형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옛 보첩중의 여덟 글자와 부절처럼 딱 맞아서 비로소 지극한 보배는 땅속에 묻혀 있을 수 없고, 신비한 물건은 하늘이 아낌없이 응하고, 실덕(實德)과 지행(至行)은 오래될수록 더욱 빛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두문동 72현은 조정에서 높이 포장하고 사림이 공적으로 칭송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명성이 자자하지만, 우리 선조의 의행과 고절은 사라져서 오백 년 동안 들리지 않으니 이것은 후손들이 널리 고증하고 근거를 대어서 힘을 다해 천양(闡揚)하지 못한 탓이니, 후손들도 똑같이 과실이 있는 것입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러 탄식하였습니다. 선조의 아름다움을 선양하는 것은 진실로 몸을 신칙하여 덕을 전진시키고, 서로 닦으며 힘을 써서, 효자들의 효도가 다함이 없도록주 118)함에 달려있지, 선조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상언(上言)하여 정려문을 하사하는 은전을 받고, 묘도문자를 청하여 묘를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옛날 성현의 충효성덕과 대절은 전모주 119) 전기 이하로부터 두루 기록되어 있으므로, 일찍이 세도를 위한 급급한 하나의 큰일이 아님이 없었는데 하물며 회옹(晦翁)이 '불인하다 책망한 것'과 우암(尤庵)이 '자식의 도리를 찬미한 것'은 진실로 편지에서 인용한 것과 같음이 있으니, 자손이 친절히 해야 할 업무에 있어서는 세도의 책임보다 급한 것이 있습니다. 이전에 겨를이 없어서 진실로 고증을 자세히 하지 못하고 충분히 징험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시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회옹이 기롱한 것을 장차 무슨 말을 하여 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제 강산이 변했으니 정려를 세워 표창하는 것은 이미 옛날의 광경입니다. 다만 문장으로 드러내는 한 가지 일만이 있을 뿐인데, 대인의 큰 덕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문필가들이 그 사람에 대해 쓰는 것을 어렵게 여기니 어찌해야 합니까?
주석 108)부군(府君)
죽은 아버지나 남자 조상에 대한 존칭이다.
주석 109)달절(達節)
보통의 규범에 구애되지 않으나 절의에 맞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15년 기사에 "성인은 천명(天命)에 따라 행동할 뿐 분수에 구애받지 않고, 다음가는 현인은 분수를 잘 지키게 마련이고, 그 아래 어리석은 사람은 분수를 지키려 하지 않는다.(聖達節 次守節 下失節)"라고 하였다.
주석 110)망복지지(罔僕之志)
망국의 신하로서 충절 의리를 지켜 새로운 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절개의 의미. 《서경(書經)》 〈미자편(微子篇)〉에, 기자가 "은이 멸망을 하더라고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겠다"〔商其淪喪 我罔爲臣僕〕는 내용에서 유래된 것이다.
주석 111)자정자헌(自靖自獻)
사람마다 각자 자신의 도리를 다하여 선왕께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서경(書經)》 〈미자편(微子篇)〉에 나오는 말이다.
주석 112)기자의 명이(明夷)
《주역(周易)》 〈명이괘(明夷卦) 육오(六五)〉의 "육오는 기자가 밝음을 감춤이니, 곧게 지킴이 이롭다.〔六五 箕子之明夷 利貞〕"에서 나온 말로, 은(殷)나라가 무도(無道)할 때 기자(箕子)가 밝음을 감추어 화를 면하면서도 곧음을 지킨 것을 말한다.
주석 113)노중련(魯仲連)의 동해(東海)
노중련은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사람이다. 유세(遊說)하는 사람이 진(秦)나라를 황제로 떠받들자고 하자, 노중련이 말하기를, "저 진나라는 예의(禮義)를 버리고 수공(首功)을 숭상하는 나라이다. 만일 진나라를 황제로 받든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겠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권83 〈노중연추양전(魯仲連鄒陽傳)〉
주석 114)우열이 논해질 수
원문의 '헌지(軒輊)'는, 수레가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을 헌(軒)이라 하고,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것을 지(輊)라 하는데, 망령되이 우열을 논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 115)만수산(萬壽山)
개성 북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석 116)두문동 72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개풍군 광덕산 기슭의 두문동에 들어가서 끝까지 출사(出仕)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고려의 유신 72인. 두문동 태학생(太學生) 72인이라고도 불렀다.
주석 117)공벽(孔壁)
한(漢) 나라 경제(景帝) 때 노 공왕(魯恭王)이 집을 확장하는 공사를 하는 중에 공자의 구택(舊宅)을 허물자 벽 속에서 《상서(尙書)》,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이 나왔는데, 모두 선진(先秦)의 과두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한다.
주석 118)선류불궤(善類不匱)
석류불궤(錫類不匱)의 오기인 듯하다. 석류(錫類)는 길이 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뜻으로 효자를 가리킨다. 《시경》 대아(大雅) 기취(旣醉)의 "효자의 효도 다함이 없는지라, 영원히 복을 받으리로다.〔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석 119)전모(典謨)
전은 《서경(書經)》의 요전, 순전이며, 모는 대우모, 고요모, 익직 등의 편을 가리킨다. 이것은 모두 제왕의 도리와 치국이 대도를 논하였다.
答涵齋族叔 甲子
嚮敎書, "追慕郡事府君遺蹪, 極致感慨之意, 思有以圖不朽。" 百回擎讀, 旣以仰服孝思之無竆, 又以幸我心之先獲也。 竊嘗聞, 見幾之謂明哲, 高蹈之謂達節, 遇事取義而不失身者次之。 府君以麗氏世家, 爲宗室昌寧君壻, 少有意於俯取峻秩鉅祿, 將囊探芥拾之易易也。 乃灼知時事之不可爲, 而不忍坐視宗國之淪喪, 且爲所存罔僕志之重且大。 爲歸鄕, 自靖獻于先王, 其義則箕子之明夷也, 其跡則魯連之東海也, 視圃牧諸賢之或殉或遯, 名位之微顯, 雖有不同, 其所存所履之, 同出於惻怛節烈, 豈容軒輊於尙論之口哉? 蓋府君之此擧也, 循理也, 盡分也, 只見當下之當然而已, 豈計身家之利禍, 來裔之興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