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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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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족숙 창암에게 올림(上鬯庵族叔 丁卯四月)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5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5.TXT.0021
족숙 창암에게 올림
어제 용동(龍洞)의 분간(分刊)에 대해 광주(光州)의 통첩(通牒)이 와서 보았는데, 유영선(柳永善)의 이름이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용동과 진주가 서로 합친 것입니까? 당초에 용동이 간행을 진주와 달리 한 것은 이익을 다투어 설치했기 때문이라서 선사께서 손수 편정한 고본(稿本)을 따른다고 말한 것도 거짓이었을 뿐이니, 잠시 떨어졌다 잠시 합친 것은 본색이 저절로 드러난 것으로 괴상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별지에서 인용한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이 대전(大殿)에 올라가서는 서로 다투고 대전을 내려와서는 서로 즐거워했다는 일주 72)은 사례가 같지 않아서 대단히 어긋나고 망령스러우니,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기와 범중엄이 대전에 올라가서는 서로 다퉜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나라를 위한 것이나 다만 견해가 같지 않아서이니, 바로 공자가 조정에 있을 때에는 말을 분명하게 하신 뜻주 73)입니다. 그들이 대전을 내려온 이상 어찌 견해가 달라 말을 분명하게 했다는 이유로 서로 즐거워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당시에 조정에 같이 있었던 사람 중에 감히 송나라의 선황제가 오랑캐에게 항복할 뜻이 있었다고 무함하는 자가 있었다면, 한기와 범중엄은 반드시 법에 의거하여 죄를 바로잡기를 청한 이후에 그만두었을 것이니, 어찌 다투고 즐거워하는 것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음성의 오진영과 처음부터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이 관련되지 않고 다만 문집을 간행하는 일을 목판으로 할 것인지 활자로 할 것인지와 호남에서 할 것인지 영남에서 할 것인지를 다투었을 뿐이라면, 한기와 범중엄의 고사를 인용할 만합니다. 지금 음성의 오진영이 선사께서 인가를 지시한 일이 있다고 무함한 것은 바로 신하가 임금이 오랑캐에게 항복할 뜻이 있었다고 무함하는 것과 똑같은 죄입니다. 우리들이 이미 그 죄를 성토하여 바로 잡았는데 다시 그들과 서로 즐거워한다면 어찌 스승을 무함한 자와 똑같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을 무함한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는 것이 유영선 무리의 완고한 견해이니, 나머지 귀신 소굴 속에서 술에 취하고 잠든 사람들이야 또한 꾸짖을 것도 못 됩니다. 고매하신 회봉(晦峰) 어른에 이르러서는 가까운 근처에 살아서 의리를 익숙히 들었는데도 오히려 높다랗게 통수(通首)라는 지위를 차지하여 자기도 모르게 함부로 말하고 의리를 어그러뜨리는 죄과에 빠졌으니, 대단히 한탄스럽고 애석합니다. 우리들은 이 어른에 대해서 모두 같은 마을에서 대대로 맺은 정의가 있으니, 다른 동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족숙께서는 또한 동갑으로 허물이 없으시니, 부디 편지 한 장을 보내 구원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주석 72)한기(韓琦)와……일
《춘추좌전(春秋左傳)》 成公 2年 송나라 재상 위공(魏公) 한기(韓琦)는 "범희문(范希文)과 부언국(富彦國)이 함께 앞에서 정사를 논할 때에는 곧장 서로 다투다가도 각기 헤어져서 궁전만 떠나오면 마치 다툰 적이 없는 것처럼 서로 화기(和氣)를 잃지 않으니, 이는 마치 '수레를 밀어 주는 사람〔推車子〕'과 같아서 그 마음은 항시 수레를 가게 하는 데에 있을 뿐이요, 자신을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권1 희문은 범중엄(范仲淹)의 자이며 언국은 부필(富弼)의 자이다.
주석 73)조정에……뜻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공자가 종묘와 조정에 있을 때에는 말을 분명하게 하셨다.〔孔子在宗廟朝廷 便便言〕"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주희가 "종묘는 예법을 지키는 곳이고 조정은 정사를 행하는 곳이므로, 분명히 구별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반드시 상세하게 묻고 명확하게 말한 것이다.〔宗廟 禮法之所在 朝廷 政事之所出 言不可以不明辨 故必詳問而極言之〕"라고 해설하였다.
上鬯庵族叔 丁卯四月
昨見龍洞分刊, 光州通牒來到, 柳永善名, 參其中, 無乃龍晉之相合乎? 當初龍刊之貳晉, 爲爭利而設。 其云遵手本者, 假之而已, 則宜其乍離乍合, 本色之自現也, 無足恠者。 但其別紙所引, 韓范上殿相爭, 下殿相歡之事, 類例不倫, 極爲乖妄, 不容不辨。 蓋韓范之上殿相爭, 均之爲爲國而只是所見不同, 正孔子在朝便便之意也。 其下殿也, 豈有因異見便便之故, 而不相歡之理乎? 若使當時同朝者, 敢有誣宋之先帝有降虜之意者, 韓范必請據法正罪而後已, 豈容曰爭曰歡之可論哉?
吾儕與陰震, 初無認誣之關, 而只爭稿事之或板或活若湖若嶺而已, 則可引韓范之故事也。 今陰震之誣先師有認敎, 正臣子誣君降意之同罪也。 吾儕旣已討正其罪, 復與之相歡, 則豈非同爲誣師者乎? 以誣師爲細故, 柳輩之見固也, 其餘人鬼窟裡醉寐者, 又不足責。 至於晦峰高丈, 居在此近, 習聞義理, 而猶巍然居通首, 不覺陷於妄言乖義之科, 則甚可歎惜也。 吾儕於此丈, 均有鄕井世契之誼, 非凡他同門比。 叔主又同庚無間, 幸爲一書而救授之, 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