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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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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재 소장에게 답함(答悅齋蘇丈 丁丑)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5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5.TXT.0016
열재 소장에게 답함
일전에 나아가 찾아뵌 것은 2년의 계획 끝에 나온 것인데, 마침 밖으로 외출을 하셔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서운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드님을 만났는데, 대접이 정성스럽고 응대가 명쾌하여 사람 마음을 대단히 흔쾌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어른과 닮은 사람을 보았다고 말할 만하여 이로써 위로를 삼았습니다. 이전에 얼핏 아드님께서 변형주 57)을 면하지 못했다는 소문을 듣고, 가정의 엄격한 교훈으로 이에는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오늘날 젊은 사람 중에는 간혹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비록 믿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와전임을 통렬히 변론하지는 못했는데, 오늘 이후에야 전통을 지닌 오래된 집안의 의방(義方)이 자연 다른 바가 있다는 것을 더욱 알았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뜻이 고상한 것도 쉽게 얻을 수 없으니, 더욱 위로가 되었습니다.
돌아와서 얼마 안 되어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만남이 어긋나서 매우 슬프고 한스러워 하셨다는 것을 자세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자세한 동정을 물으시고 아울러 더욱 편안히 왕래하라는 뜻을 보여주셨으니, 아, 저를 깊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젊은 사람이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는데 높으신 분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격하는 마음은 비록 깊으나 송구한 마음 또한 지극합니다.
시생은 몸에는 누더기 옷을 입고 밖으로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지경주 58)이니, 이러한 때에 이러한 모습은 족히 받들어 아뢸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이 몸과 네 명의 아들, 세 명의 동생, 한 명의 조카인 아홉 식구가 옛 의관을 현재도 보존하여 바꾸지 않고 있으니, 나라 안을 두루 돌아보더라도 아마 우리와 짝할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이러한 모양 또한 특이한 일이니, 이것이 영광이 될지 욕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또 논자들이 어떻게 보느냐를 막론하고 다만 앞으로는 잘 끝맺기가 어려운 것을 근심할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우리 어른은 올해 나이가 팔순에 다가섰습니다. 사람은 말년에 큰일을 하기 마련이고 또한 세상의 혼란함이 이러할 때에는 젊은이가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생과 우리 어른은 살아서는 의리를 함께 하고 죽어서는 함께 열전에 오르는 처지주 59)라고 말할 만한데, 한 번 만나서 문후를 하고는 걸핏하면 몇 년이 지나니, 지난날을 통해서 장래를 추론하건대 앞날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소의 문자 의리를 모두 강론하여 정하지 못했는데 이에 대해 어찌 영원한 후세에 다소의 유감이 없겠습니까? 삼가 우리 어른께서도 때때로 생각이 이것에 미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날 나아가 은혜를 받은 것도 사실은 이것에 있었는데 이미 이루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하교(下教)하신 대로 가을 사이에 정산에서 찾아뵈었어야 했으나 이 또한 그러지를 못하였습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찾아뵐 계획을 도모할 뿐입니다.
지난번에 아드님이 근래에 그린 존영(尊影)을 보여 주었는데, 아주 비슷한 것을 보니 단지 칠푼[七分]주 60)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초상을 정립한 모습으로도 단좌한 모습으로도 그리지 않고,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그린 것은 아마도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중세에 중국 사람들은 앉을 때 반드시 의자를 사용하였으니, 이미 의자에 앉은 이상 어쩔 수 없이 걸터앉게 됩니다. 그러나 주자가 의자를 사용하는 송나라 때에 살면서도 그 초상은 오히려 의자도 쓰지 않고 걸터앉지도 않았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본디 의자를 사용하지 않아서 의자의 사용이 근래의 사람들에게나 있는 데이겠습니까. 의자에 앉는 것은 우리나라 풍속에 없는 것이고, 걸터앉는 것은 또한 유자들이 잠시 동안도 불안해하던 것입니다. 이제 엄정한 유자의 복장으로 의자에 걸터앉은 초상을 후세에 전한다면 어찌 사실과 어긋나서 누를 끼침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영정 끝에 그린 사람을 기록한 것이 성명으로 하지 않고 별호로 했으니, 이것이 어찌 젊은 사람이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겠습니까? 일찍이 선사의 영정에 채용신(蔡龍臣)이 석지(石芝)라는 호를 사용한 것을 보고 늘 마음에 흔쾌하지 않았는데, 이제 또 이것을 보니, 아마도 또한 한 때 화가의 풍습인가 봅니다. 제 견해로는 마땅히 모두 고쳐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주석 57)변형(變形)
단발령에 의해서 상투를 잘린 모양을 '변형'이라고 한 듯하다.
주석 58)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지경
원문의 '호식(虎食)'은 《장자(莊子)》 〈달생(達生)〉에 나오는 말로, 노나라의 단표(單豹)라는 사람이 은거하여 깨끗하게 살면서 속세의 이끗을 다투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잡아먹힌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안으로 정신만 수양하고 밖으로 몸의 단련을 소홀히 한 것을 말한다.
주석 59)살아서는……처지
송나라 때 명신인 범진(范鎭)은 사마광(司馬光)과 우의가 두터웠는데, 사마광에게 "그대와는 살아서 뜻을 함께하고 죽어서 전을 함께할 것이다.〔與子生同志死同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치의집전(緇衣集傳)》 권3 〈일류장(壹類章)〉 중국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에서는 성향이 같은 인물을 한 열전(列傳)에 모아 엮기 때문에 한 말로, 이 말은 뜻을 같이 하였다는 의미이다.
주석 60)칠푼[七分]
초상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음을 말한다. 정이(程頤)가 《역전(易傳)》을 짓고서 문인들에게 주며 "단지 7분만 말한 것이니,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스스로 살피고 궁구해야 한다.〔只說得七分 學者更須自體究〕"라고 하였는데, 문인인 장역(張繹)이 그에 대한 제문을 지으면서 그의 말을 인용하여 "선생의 말씀으로 문자에 드러난 것은 7분의 마음이 있고, 단청으로 그려진 것은 7분의 용모가 있다.〔先生有言見於文字者 有七分之心 繪於丹靑者 有七分之儀〕"라고 하였다. 《二程全書 附錄 祭文》 글이나 그림으로는 그 사람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7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答悅齋蘇丈 丁丑
日前造拜, 出於兩年經營, 而適值駕外, 未承誨喩, 殊甚缺然。 然得見賢哥, 待遇款洽, 酬酢明爽, 大快人意, 眞可謂見其所似者, 以是爲慰。 前此似聞賢哥不免變形, 想以庭訓之嚴, 不至於此。 然在今日年少, 亦容有之, 故心雖不信, 亦不能痛辨其訛。 今而後益知故家義方, 自有所異。 弱冠志尙, 亦不易得, 尤以爲慰。
歸後來幾, 獲拜下狀, 審悉具道交違悵恨之極, 問訊此間動靜之詳, 並示駕益往還之安, 噫, 非愛我之深, 烏能致此? 然少者未遑, 尊者先施, 感雖深矣, 悚亦至矣。
侍生, 鶉結於身, 虎食於外, 此時此狀, 無足奉稟者。 惟是身及四子三弟一姪九箇, 舊冠現保無變, 環顧域中, 想少其儔。 此世此樣, 亦是異事, 未知此爲自榮耶自辱耶。 且無論論之者如何, 秪以前頭克終之難爲憂耳。
竊念吾丈今年迫八旬, 夫人之晩年, 大有事在, 且世亂如許, 少者之死亡, 亦無日矣。 侍生之於吾丈, 可謂生同義死同傳之地, 而一番靣候, 動輒數歲, 因往推來, 前頭可知。 多少文字義理之未盡講定者, 其何以不有多少遺憾於無竆也乎? 伏想吾丈, 亦時一念, 至於此也。 前日之進惠, 實在此, 而旣不得遂, 則當依下敎, 以秋間拜會凈山, 又不能。 然則不容不更圖進謁計耳。
頃得賢哥出示近寫尊影, 見其酷似, 不但七分而已。 但像不以正立, 不以端坐, 以踞坐椅上者, 恐未穩。 中古中國人, 坐必用椅, 旣坐椅, 則不得不踞然。 朱子當有宋用椅之時, 而其像猶不椅不踞。 况於我國之本不用椅, 而椅之用, 乃在近時人乎。 蓋坐椅, 國俗之所無, 踞坐, 又儒者之所斯須不安者。 今以儼然儒服, 踞坐椅上, 傳之後世, 豈不爲爽實而貽累乎? 且幀末之記寫者, 不以姓名而以別號者, 是豈少者敬長之道乎? 曾於先師影幀, 見蔡龍臣用石芝之號, 尋常不快於心, 今又見此, 豈亦一世畵家之風習歟? 淺見恐當并行改正, 未知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