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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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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심 황장종복에게 답함.【○현동 첨좌를 대신하여 지음】(答小心黃丈【鐘復 ○代 玄洞僉座作 ○】癸亥七月)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5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5.TXT.0001
소심 황장종복에게 답함.【○현동 첨좌를 대신하여 지음】
현산(玄山)주 1)에 풀이 무성하고, 화도주 2)에도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새 선사(先師)의 연사(練事)주 3)가 지나가 버렸으니 스승님을 잃은 슬픔주 4)은 더욱 간절하고 한결같습니다. 이즈음에 어르신의 편지주 5)를 받아 보니, 당당하고도 지극히 바른 의리와 분명하고도 이치가 극진한 말씀에서 선사의 도덕과 의절이 이로써 밝게 드러나 마치 해와 별을 모두가 보는 것과 같았으며, 한쪽 사람주 6)의 잘못되고 낭패한 일이 실정이 밝혀지고 벌이 마땅하여 거울처럼 선명하고 서릿발처럼 엄격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아, 집사의 한마디 말이 아니었다면 간재 문하의 한 조각 의체(義諦)주 7)는 거의 사라졌을 것입니다.
호남이 영남과 달리 하는 것은 총독부의 인가를 받지 않는다는 하나의 의리에 있으니 이것이 가장 큰 것이고, 이 외에도 또한 몇 가지 작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호남은 전편과 후편을 각각 편집하여 손수 편정(篇定)하신 고본(稿本)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영남은 합고(合稿)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한 가지이며, 호남은 감히 한 편도 첨가하지 않아 "썩은 시신을 지각이 없다며 속이는 것일 뿐이다." 하신 엄한 훈시주 8)를 따랐는데 영남은 사적인 것을 용납함을 면치 못한 것이 두 가지이며, 호남은 고인의 축장(築場)하는 뜻주 9)을 붙였는데 영남은 개의치 않은 것이 세 가지입니다.
이 몇 가지 이유에 대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면 저들과 우리들 사이의 잘잘못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수레를 돌려 바른 데로 달려가는 것이 쉬울 것 같은데, 어찌하여 서로를 이기고자 하는 투쟁심으로 성을 마주 쌓고 깃발을 내걸어서 한결같이 버티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서울의 묵인이 났다고 속이고 원고를 판매하는 적도에게 넘겨서 선사께서 지킨 것을 깎아 없애고 온 나라의 욕을 실컷 얻어먹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잘못을 뉘우치고 훗날을 좋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다시 강태걸(姜泰杰)의 일주 10)을 일으켜 어깃장을 놓았으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전체 원고를 발간하지 않고 절요본을 먼저 찍는 것을 의(義)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체 원고를 사서 읽을 돈을 빼앗아 장사꾼의 전대를 채워주는 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호남에서 발간하는 것을 깨뜨리고 싶어서 한 무리의 적을 내세워 막는 것을 예(禮)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장사꾼이 이를 했다 하더라도 이것을 주관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인가를 받았다는 이름을 피할 수 없고 스승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면할 수 없으니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 사체주 11)를 헤아리지 못하여 의리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더불어 보합주 12)을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나의 부끄럽지 않은 의리를 지키고 나의 마땅히 해야 할 직분을 닦을 뿐입니다.
주석 1)현산(玄山)
지명으로, 간재(艮齋)의 묘가 있는 익산 현동을 말한다.
주석 2)화도(華島)
지명으로, 본래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계화도(界火島)인데, 전우가 이곳에 정착하여 강학을 하며 중화(中華)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렀다.
주석 3)선사(先師)의 연사(練事)
선사는 돌아가신 스승을 일컫는 말로, 여기에서는 전우를 지칭한다. 연사는 연제(練祭)로, 본래 부모의 상을 치를 때 만 1주기에 지내는 제사를 뜻하며, 소상(小祥)이라고도 부른다. 간재는 1922년 7월 4일에 졸하였다.
주석 4)스승님을 잃은 슬픔
원문의 '산량지통(山梁之痛)'은 스승이나 현인을 잃은 슬픔을 말한다. 공자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태산이 무너지려나, 들보가 꺾이려나, 철인이 시들려나?〔泰山其頹乎, 梁木其摧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는데, 과연 7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
주석 5)어르신의 편지
원문의 '존함(尊函)'은 상대방의 편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주석 6)한쪽 사람
원문의 '일변인(一邊人)'은, 오진영(吳震泳)이 스승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꺼려해서 사용한 말이다.
주석 7)의체(義諦)
사물의 바탕이 되는 뜻이나 이유를 말한다.
주석 8)썩은……훈시
이 말은 《간재집(艮齋集)後編續)》 권5 〈시자손문인〔示子孫門人〕〉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고는 이미 정본을 대략 완성하였으니, 이 외에 한 편도 함부로 첨가하지 말라. 이러한 뜻을 자손과 문인은 삼가 어김없이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훗날 사사로운 안면에 구애되어 다시 변통할 방도를 행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자신의 아버지와 스승을 차마 죽은 사람 취급하여 썩은 시신을 지각이 없다며 속이는 것일 뿐이니, 제자들은 그리 알라.〔私稿旣已略成定本, 此外無得妄添一篇. 此意子孫門人, 不可不恪遵無違. 若異日有拘於顔私, 復行通變之道者, 是忍死其父師。而欺其朽骨無知爾, 諸子識之〕"
주석 9)고인의 축장(築場)하는 뜻
축장은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무덤가에 움막을 짓고 거상(居喪)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3년이 지난 다음 문인들이 짐을 챙겨 돌아갔다.……자공(子貢)은 다시 돌아와 묘 마당에 집을 짓고서 홀로 3년을 거처한 다음에 돌아갔다.〔昔者, 孔子沒, 三年之外, 門人治任將歸……子貢反, 築室於場, 獨居三年然後歸〕" 하였다.
주석 10)강태걸(姜泰杰)의 일
강태걸은 오진영의 제자이다. 오진영의 지시를 받아 간재 사고(私稿)의 선집(選集)을 만들어 서울로 가서 인가를 받는 일을 도맡아 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는 김택술(金澤述)과 최병심(崔秉心) 등을 진천서(鎭川署)에 고소하여 배일당(排日黨)으로 몰아세우는 데에 앞장섰다. 《사백록(俟百錄)》 권1 〈진걸화사(震杰禍士)〉
주석 11)사체(事體)
사리와 체면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주석 12)보합(保合)
《주역(周易)》 건괘(乾卦) 단사(彖辭)의 "하늘의 도가 변화함에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하여 큰 화기를 보전케 해 준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라는 말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答小心黃丈【鐘復 ○代 玄洞僉座作 ○】癸亥七月
玄山草宿, 華嶹秋入。 轉眄之頃, 奄經先師練事, 山樑之痛, 彌切惟均。 乃於此際, 獲拜尊函, 堂堂至正之義, 鑿鑿理到之言, 先師之道德義節, 以之昭著, 如日星之共睹。 一邊人之舛錯狼狽, 情得罰當, 不啻鑑明霜嚴。 噫, 靡執事者一言, 艮翁門下一副義諦, 幾乎熄矣。
蓋湖之貳嶺, 在不認一義, 此其最大者, 外此而亦有種種非細故者。 湖主各稿, 用手定本, 而嶺主合稿者一也。 湖不敢添入一篇, 遵欺其朽骨無知之嚴訓, 而嶺不免容私者二也。 湖寓古人築場之意, 而嶺之不以為意者三也。
於此數段, 平心究之, 彼我之是非不難知, 回車趍正, 似易易也, 柰之何爭心勝氣, 對壘揭幟, 一向抵賴? 至於誑出京, 默投稿販賊, 剝喪先師所守, 飽喫通國唾罵, 而猶不思悔過善後, 復惹出姜事, 以乖張之, 絶不可曉也。
蓋全稿不刊, 而先印節要, 得爲義乎? 奪購讀全稿之金, 充賈人之槖, 可謂仁乎? 欲破湖刊, 出一對敵而抵之, 可謂禮乎? 雖曰賈人爲之, 其主之者誰也? 認名不得避, 累師不得免, 可謂智乎? 人而不揆事體義理, 乃至於此, 則何可與論保合哉? 只得守吾不愧之義, 修吾當爲之職已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