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열람
  • 디렉토리열람
  • 유형분류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4
  • 김성구에게 답함(答金聖九 丙寅)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4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4.TXT.0015
김성구에게 답함
나라가 파괴된 것이 비록 오래되었지만 오히려 다행히 우리 군주가 병이 없어서 신민(臣民)의 희망을 보존할 수 있고 광복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승하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진실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무어라 해야 하겠습니까? 소식을 들은 즉시 서재 뒤의 이른바 망제봉(望帝峯)에 올라가서 벗들과 함께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였고, 성복(成服)한 날에도 그렇게 하였는데, 마치 부모를 여윈 것 같았습니다. 고인(古人)의 지극한 정이 골수에 사무친 것을 진실로 느끼었고 실로 나라가 망한 깊은 원한이 더해졌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이와 같은데 그대로서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이하로 대대로 국은을 입었고 선영감(先令監)이 나라를 바로잡아 회복하는 뜻을 품었다가 한을 품고 죽었으니, 그 통곡하는 심정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다행히도 타고난 성품은 오래되어도 실추되지 않아 온 나라 백성들이 쓰러져 울면서 가슴을 치고, 심지어 천한 기생도 소복을 입고 어린 아이들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또 소식을 듣고는 독약을 먹고 일을 꾀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는 만 번 죽을 고비에서 하나의 생기가 되는 것이니, 하늘의 뜻은 또한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설사 세상에 큰일을 해낼 수는 없더라도 마땅히 힘써서 '의(義)' 자 하나를 가지고 후진들의 마음속에 퍼뜨려서 인륜을 부지하고 하늘의 뜻을 받드는 하나의 도를 도와야 할 따름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여주신 상제(祥祭)를 뒤로 물려서 행하는 절목은 삼가 보고서 잘 알았습니다. 그대의 고명함으로 지금 변례(變禮)의 대절에 대하여 널리 상고하고 정밀히 살펴 인정과 예법이 모두 완벽하기를 기약했으니, 식견이 부족한 제가 어찌 감히 더불어 논하겠습니까. 다만 그 중에 약간 타당치 않은 점이 있는데도 우러러 묻지 않는다면 실로 굽어 보여주신 훌륭한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대체로 연제(練祭)와 상제(祥祭)를 뒤로 물려서 행함에 있어 능묘(陵廟)에서 제향을 올리지 않으면 사가에서도 감히 성대히 제사지낼 수 없는 것은 진실로 그대의 말씀과 같아서 관례와 혼례에 길흉이 서로 교섭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능묘에서 이미 제향을 했는데 사가에서 제사를 폐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황제를 왜가 낮추어 왕이 되었고, 왕의 예도 오히려 금지시키고 겨우 3개월 만에 장례를 치르는 사대부의 예를 사용하게 하였으니, 어찌 이루 통탄하는 마음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국가가 망하지 않았다면 이번 대상(大喪)에 어찌 황제의 예를 완전히 따르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다만 황제의 예로써 우리 황제를 존중하는 것을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때처럼 하는 것을 알 뿐 다른 것은 따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만약 우리 군주가 살아있는데 혹여 정례(正禮)를 사용하지 않아 기한보다 빨리 장례를 치르고 기한보다 빨리 졸곡을 행한다면 신하들의 집에서는 연제와 상제를 졸곡 후에 행할 수 있습니다. 오직 왜에게 압박을 받아서 기한보다 빨리 장례를 치르고 기한보다 빨리 졸곡을 하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서 연제와 상제를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문을 보니, 인산(因山)은 5월 2일에 있고, 졸곡은 7월 2일에 있을 것이라 합니다. 이것은 기일보다 빨리 장례를 치른 자가 졸곡은 반드시 예월(禮月)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인하여 겨우 제후가 5개월 만에 졸곡하는 예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만 잘 모르겠으나, 선제를 황제로 칭한 이후에 상례와 관련된 모든 절목을 황제의 예를 순수히 사용했습니까, 아니면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까? 《문헌비고(文獻備考)》에 근거하면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인산 때 구우(九虞)주 54)를 지냈으니, 그것은 황제의 예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한을 넘긴 장례이니 5개월과 7개월의 구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후 명헌태후(明憲太后)의 상에 대해서는 성복 날짜와 인산의 개월 수를 상고할 데가 없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7개월의 제도를 행할 겨를이 없음을 정확히 알았다면 차라리 조정에서 5개월 만에 인산을 행한 전례를 따라서 연제와 상제를 행하는 것은 낫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번에 정한 인산, 우제, 졸곡 일자를 따라서 인산은 인산이고 우제는 우제이고 졸곡은 졸곡이라 하고서 연제와 상제를 행한다면 대단히 구차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기》 〈잡기(雜記)〉에 "대부는 3개월에 장사를 지내고 5개월 에 졸곡하며 제후는 5개월에 장사지내고 7개월에 졸곡한다."는 문구에 근거하여 천자는 마땅히 7개월에 장사지내고 9개월에 졸곡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대는 이것에 대해 일찍이 어떻게 보았습니까? 다른 예서(禮書)와 지난 역사를 고증해보건대, 기한보다 빨리 장례를 치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장례를 지낸 뒤에 즉시 우제를 지냈고 우제를 지낸 후에 즉시 졸곡을 했는데, 〈잡기〉의 설이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노주(老洲 오희상)는 "어떤 선배가 상제 당일에 술잔을 한 번 올린다는 의론을 하였는데, 내 견해로는 이것은 사가의 상례에서 제사를 폐한 그 날에 약간의 제수를 진설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왜가 금한 것이 없고 이는 분명하게 금지하는 조목이 있으니, 비록 서운하다고 해도 다만 날짜를 미루어 거행하는 사유를 고하는 것이 옳다."주 55)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설이 가장 타당하니 따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지금 세상에 더 이상 금령의 시행이 없으니 굳이 일체의 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단지 감히 하지 못할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차마하지 못할 것이 있을 듯합니다. 어떻습니까?
주석 54)구우(九虞)
천자가 지내는 아홉 번의 우제(虞祭)를 말한다. 천자의 경우에는 아홉 번의 우제를 지내는데 9일마다 한 번 지내고, 제후는 일곱 번의 우제를 지내는데 7일마다 한 번 지내고, 대부는 다섯 번의 우제를 지내는데 5일마다 한 번 지내고, 사는 세 번의 우제를 지내는데 3일마다 한 번 지낸다.
주석 55)어떤……옳다
《노주집(老洲集)》 권12 〈답박명벽(答朴命壁)〉에 보인다.
答金聖九 丙寅
國破雖久, 尚幸吾君無恙, 可以保臣民之望, 可以藉興復之機, 孰知一曙龍馭遽賓天? 實爲之謂之何哉? 承報即時, 上齋後所稱望帝峯, 同諸友生北望慟哭, 成服日亦然, 如喪考妣。良覺古人至情, 通塡骨髓, 實添亡國深恨。如賤子者且如此, 而在足下念仙清以下, 世受國恩, 先令監志存匡復, 齎恨泉下, 其痛其哭, 又當如何哉? 惟幸天彜久而罔墜, 舉國含生顚倒號擗, 至於賤娼服素, 童穉泣血。又有聞報仰藥, 圖事至死者, 踵相接也。此爲萬死中一點生氣, 而天意亦非偶然。吾儕縱不能有爲於世, 要當勉將一箇義字, 布播後進心田中, 用助扶人紀奉天意之一道而已, 如何如何?
俯示祥祭退行節目, 謹悉。以足下之高明, 今於變禮大節, 博考精覈, 期於情禮之俱盡, 顧此謏寡何敢與論? 但有些未穩于中者, 而不以仰質, 實負俯示盛意也。蓋退行練祥, 以陵廟廢享, 私家不敢盛祭者, 誠如盛喩, 而非有如冠昏之吉凶相涉也。陵廟已享, 而私家廢祭無義者, 非曰不然。但吾之帝, 彼降而爲王, 王禮猶禁, 而僅用士大夫三月葬禮, 則曷勝痛迫? 如使國家未亡, 則今番大喪, 其不純用帝禮乎? 吾但知以帝禮尊吾帝, 如國家未亡時而已, 不問其他可也, 未知如何?
若使吾君在, 而或不用正禮, 有赴葬赴卒之舉, 則臣庶家練祥, 卒哭後可行也。惟其爲彼所壓而赴葬赴卒, 故不可因行練祥也。
見新聞因山在五月初二日, 卒哭在七月初二日云。此因赴葬者卒哭必俟禮月之意, 而僅得爲諸侯之五月卒哭矣。但未知先帝稱帝後, 凡干喪禮純用帝禮乎? 抑未遑乎? 據《文獻備考》, 明聖皇后因山時, 九虞則知其用帝禮矣。然此是過期之葬, 則五月、七月之分, 不須言也。其後明憲太后之喪, 成服日數、因山月期無所考, 若的知朝家不遑七月之制, 無寧依朝家五月因山前例, 而行練祥可也。若依今番所定因山、虞卒日子, 而曰因山則因山, 虞卒則虞卒, 乃行練祥, 則大涉茍且, 未知如何?
或有據《雜記》, 大夫三月而葬, 五月而卒哭, 諸侯五月而葬, 七月而卒哭之文, 謂天子當七月葬, 九月而卒哭, 高明於此, 曾如何看? 定考他禮書及往史, 除赴葬者外, 皆葬而即虞, 虞而即卒哭, 惟雜記說如此, 何也?
老洲曰: "先輩有本祥日一獻之論, 愚見則此與私喪廢祭本日畧設有異。彼無所禁, 此則明有條禁, 雖缺然, 只告退行之由, 得正。" 淺見以爲此說峻正可從。如謂今之世無復禁令之行, 不必用一切法, 則非惟有所不敢, 恐亦有所不忍者耳, 未知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