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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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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구에게 답함(答金聖九 乙丑)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4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4.TXT.0011
김성구에게 답함
제가 아룁니다. 세월이 멈추지 않아 그대 선친 영감의 상사(常事, 小祥)가 이미 지났는데도 보잘 것 없는 제가 예절을 무시하여 아직까지 문상하지 못하여 상중인 그대가 상제(喪制)를 완화하여 슬픔을 완화하기 전에 만나 뵙고 위로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배척받고 절교를 당해야 마땅하다고 스스로 여겼는데, 특별한 편지를 멀리까지 보내셔서 사문(斯文)의 변란을 절절히 근심하시고 간절히 의리에 처하는 방법을 깨우쳐 주니, 넓은 도량으로 나와 남을 공평하게 생각하는 훌륭함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하겠습니까. 우러러 감사하고 굽어 송구스러워 무슨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몸은 비록 못났지만 또한 현인을 좋아하고 벗을 친애하는, 타고난 성품을 갖추고 있으니, 어찌 한번 달려가 찾아뵙는 것이 마땅히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몰랐겠습니까마는 몽매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일단 선사께서 끝도 없이 무함을 당한 이후로는 진실로 통한이 마음속에 사무쳤으니, 명백하게 분별하느라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득이하게 성토함에 이르렀을 때는 저들 또한 같은 동문이니, 어찌 안으로 마음이 상하고 밖으로 다른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겠습니까. 저들이 도리어 적반하장의 짓을 하여 우리를 멸시함에 이른 경우에는 길거리의 아이가 저지르는 패악질과 같았으니, 보는 자는 저절로 응당 시비를 판단하겠지만 당한 자는 어찌 이렇게 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다만 이로 인하여 우리 일문(一門)이 외부사람들의 모욕하는 매개체가 되어 버린 것이 지극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집에 들어와서는 전혀 즐거움이 없고 문을 나서면 위축되어 달려갈 곳이 없어서 발걸음은 백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이 많은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지도 몇 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상중에 있는 그대를 이처럼 저버린 이유입니다.
오호라, 음성(陰城, 오진영)의 패륜과 무함은 신과 사람이 모두 분노할 일이니, 그의 바르지 못한 모든 말은 굳이 다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다만 책을 발간하는 문제에 대해 이견을 제시했던 당초에 또 진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우쳐서 스승을 무함한 뒤에라도 뜻을 꺾어 복종시킬 수 없었던 것은 또한 저의 허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돌이켜 성찰하고 안으로 부끄러워하여 한 번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고, 매번 그 실상을 자세히 말하여 한 번 들음에 명쾌하게 판결되기를 원했으나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긴 편지와 짧은 쪽지를 보내오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 내용을 통해서 파악한 것은 명쾌하고 지킨 것은 바르며 기른 것은 두터우며, 음성의 죄를 살펴 단정한 것은 그 실정을 얻었고 천박하고 졸렬한 저에게 지시한 것은 타당성을 얻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듣기 원하고 따르기 바란 것이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다만 맹자가 양주와 묵적을 물리친 것을 인용하여 오늘날의 음성을 배척하는 것을 증명하고, '어찌 일찍이 저처럼 불필요한 일을 많이 했겠는가'라고 하니, 조금 타당함이 결여된 듯합니다. 공자가 옹저와 척환을 주인 삼았다주 35)고 한 것은 당시의 호사가들의 말인데도 맹자는 오히려 힘을 다해 변론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만약 그 말이 3천 명의 문도들이나 사숙한 항렬에서 만들어져 나왔다면, 맹자는 반드시 스승을 무함한 죄로 성토했을 것입니다. 양주와 묵적이 도를 해친 것은 진실로 크기 때문에 맹자는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만약 양주와 묵적이 모두 공자를 무함했다면 맹자는 또 반드시 하나씩 변론하여 재빨리 성토하고 성인을 무함한 죄로 단정하되 학술의 폐단만을 배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음성 사람이 선사의 대절(大節)을 무함하여 파괴시킨 것은 이미 옹저를 주인삼은 종류와 같은 작은 일이 아닌데도 여러 학자들이 일월처럼 추대하였으니, 당지(當地)의 해로움이 되게 한 것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묵적과 양주주 36)에 대해 추론하여 설파할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음성의 재앙은 양주와 묵적보다 다급하고 양주와 묵적이 하지 않은, 현인을 무함하는 것까지 더했으니, 그가 무함한 것은 또한 친히 가르침을 받은 스승이고 저 사람은 또한 훌륭한 제자였으니, 양주와 묵적의 죄에 비할 때 몇 배나 큽니다. 만약 음성 사람이 좀 더 일찍이 맹자의 세상에 출현했다면 맹자가 다만 양주와 묵적과 안건을 나란히 하여 함께 감처(勘處)할 뿐만이 아니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불필요한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은 본디 군자가 일을 처리하는 방도가 아니고, 억지로 하는 바 없이 순리에 따라 하는 것이 바로 일처리의 도리인데, 본래 밝은 지혜가 아니면 여기에 이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는 바 없이 순리에 따라 하는 것은 우임금의 치수(治水)만한 사례가 없으니, 산을 따라서 나무를 베어내고 하천을 깊이 파고 땅을 배치한 것처럼 순리대로 한다면 무슨 일이 많겠습니까. 이런 측면을 통해 일이 순리에 따르면 일이 많아도 없는 것과 같고, 만약 이치를 따르지 않는다면 일이 없는 것도 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난번에 의리로 성토한 것은 부득이한 것이었으니, 불필요한 일이 많다는 것으로 지목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냄새를 좇는 무리들이 하나하나 보잘 것 없는 재주를 지니고서 음성 사람의 문하에 개미처럼 모이고 이처럼 붙어서, 흑과 백을 제멋대로 주물러 이상하게 바꾸고 희한하게 꾸미고는 부처님에 보답하고 도를 전한다고 자처하고는 현인을 죽이고 바른 사람을 독살하는 데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원고를 가졌다는 것에 의지하여 일문을 옥죄고 시세에 의지하여 온 세상을 통제합니다. 앞으로 있을, 예측할 수 없는 괴이한 행동과 추잡한 말에 대해서는 주고받은 기록을 아울러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론하고 꾸짖기를 아마도 역시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니, 어떻습니까, 어떻습니까.
'오로지 이것에 연연하여 공평한 대본을 잊고 절실한 공부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진실로 때에 맞는 절실하고 마땅한 가르침입니다. 주자가 경계한 '오랑캐는 쉽게 쫓아낼 수 있으나 사심은 제거하기 어렵다'주 37)는 것이 어찌 이런 까닭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감히 이런 병폐가 없다고 보증하겠습니까마는 역시 반성을 완전히 잊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공평한 대본을 잃고, 또 절실한 공부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천지 끝까지 가는 듯 대의를 말하고 뱀과 새를 몰아내듯 사설을 배척했으니, 우리 도를 위해 침입을 격파하여 모욕당하지 않게 한 것은 뛰어났다 하더라도, 자신의 심신을 잘 다스려서 수많은 성인이 전수한 법을 계승하고 상제가 떳떳한 마음을 내려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결국 하나도 보충한 것이 없으니, 선사가 후학들에게 바란 것이 어찌 이와 같을 뿐이겠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평생토록 힘써야 할 것인데, 이제 먼저 내려주신 정문일침을 받았으니, 마치 차가운 물을 등에 뿌린 것처럼 갑절의 경계가 됩니다. 이는 백연(百淵)의 편지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미 그렇습니다.
선사는 그대의 선친 영감과 사귐의 도가 끊어지지 않았으니, 편지에서 이른바 '스스로 간옹(전우)의 수필(手筆)을 가지고 있으니 변론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분명하다'는 것은 본래 이 세상의 공론인데 저들이 그 사이에 어떤 의도를 지녀 사실로 말하지 않고, 심지어 그대의 선친 영감을 배알한 자가 전문(全門)의 정윤영(鄭胤永)이라고 지목했으니, 진실로 어떤 마음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또한 똑같이 배알했는데, 흠재(欽齋, 崔秉心)가 음성인을 배척할 때는 정윤영이라고 하고, 서송성(徐宋成)이 음성인을 비호할 때는 정윤영이 아니라고 했으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공리가 있겠습니까. 더욱 어떤 마음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상중에 있는 그대가 때에 맞게 잘 버티며 경전을 연구하여 의미를 밝히며 선친의 뜻을 계승하고 정론을 주장하여 세도를 바로잡기를 바랍니다.
저 사람들은 말을 할 때면 반드시 오씨(오진영)는 선사가 도를 전한 고제이니 어찌 감히 성토하고 비난하여 선사의 밝음을 손상시키느냐고 합니다. 나는 만약 선사가 오씨에게 도를 정말 전했다면 더욱 성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스승을 속인 죄는 어떤 것입니까. 만약 말학으로 이름 없는 자가 간혹 스승을 속이는 말을 했다면, 사람들은 모두 그가 무지하여 함부로 말했다는 것을 알아서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는다면 스승은 손상이 없고 속인 자는 죄가 있으며, 그 죄를 벌주어 복종시키는데도 그 사람이 복종하지 않아서 절교한다면 그것으로 끝이니, 온 나라에 성토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바 도를 전수한 것이 거짓으로 대의와 관계된 것이면 사람들은 반드시 "아무개는 그 스승이 심법을 전수한 사람이니 그의 말은 사실을 속인 것이 아닐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속인 자의 죄는 무거워서 진실로 말할 것도 없이 스승의 도가 남김없이 깨어지고 상실될 것이니, 눈을 크게 뜨고 담력을 크게 하여 변론하고 성토하는 것이 없다면, 어찌 지금과 훗날의 의심을 깨뜨리겠습니까. 옛날에 우암(송시열)이 군주에게 고하길, "설사 이 아무개가 진실로 이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김 아무개의 처지에서(김장생이 율곡의 제자이면서) 이를 증명한다면 이것은 아버지가 양을 훔쳤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인데, 더구나 전혀 이런 일이 없는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주 38)라고 했고, 또 "고명한 제자로서 이를 증명한다면, 아무개의 삭발은 끝내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주 39) 조씨【조위한이다.】와 장씨【장유이다.】가 잘못 듣고 잘못 말하고 잘못 기록한 사계(김장생)의 말에 대하여 우암은 오히려 두려워하였고, 율곡(이이)이 삭발한 것에 대해 변론하지 못한 것과 사계가 스승을 속였다고 잘못 뒤집어쓴 것을 절절히 애통하게 생각하고 증거를 끌어다가 훤히 밝혔습니다. 현재 오씨는 간옹(전우)의 고제라고 자처하면서 감히 함부로 일찍이 문집 출판을 인가받으라는 뜻이 있다고 하고, 스승의 뜻을 헤아려 구속받을 것이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후인들에게 길이 증명하려 합니다. 이것은 우암이 염려했던 바로 끝내 밝힐 수 없는 것이니 그 속임수가 더욱더 깊어졌으니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아버지가 양을 훔치지 않았는데 그 자식이 거짓으로 증명한 것이니, 그 죄가 더욱 중한데 성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당나라 요임금과 주공 같은 성인이 어찌 사흉·관숙·채숙을 임명하고, 남명(조식)과 율곡처럼 현명한 사람이 어찌 정인홍과 정여립을 격려했겠습니까? 만약 선사가 정말로 오씨에게 도를 전했다면 어떻게 그 밝음을 손상시키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것은 모두 저 무리의 말을 따라서 가설적으로 말했을 따름입니다. 만약 선사가 절에서 자면서 눈물을 흘리며 애도한 것은 병암 김공(김준영)이 죽은 뒤로부터 말과 문장에 여러 번 나타나 있습니다. 오씨에 이르면 비록 문사로 실력을 발휘함으로써 때때로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그 공리가 중할지라도 도의를 권했다고 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다시 전철(문장)을 밟아 뒤집어지니 꾸짖음이 엄하고 간절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말년에 이르러서 여러 제자는 스승에게 의망을 받지 못했고 제군은 편벽되었다는 반박을 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깊이 걱정하고 한탄하였습니다. 오씨가 만약 전할 만한 실상이 있었다면 어찌 근심하고 한탄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그렇다면 선사가 처음부터 오씨의 현명함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로 사람을 알아보았다는 현철함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어찌 오늘날 현명함을 손상한 여부를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보내신 편지에서 어떤 사람이 회옹(주희)이 순씨(荀氏)를 논한 일을 거론하여 말한 한 조목이 있었는데, 이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게 되었습니다. 회옹이 순씨를 논한 것은 어떠하였습니까? 처음에는 자신만을 온전히 하고 사무만 보았다고 그를 비난했고, 다시 부형과 사우 사이에 있었던 일종의 의론에 대해 그 본질을 문식하여 덮어 가렸다고 그를 꾸짖었으며, 끝내는 사설(邪說)이 멋대로 흐르는 것이 홍수와 맹수의 피해보다 심하다고 그를 성토했습니다. 우리 선사의 학문에 만약 이와 같은 일로 추론하여 논할만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사심을 따라 의리를 해치고 세상에 화를 끼친 것이 큰 경우로 그것은 기개와 절개가 없고 의리를 엄하게 따지지 않아서이니, 이미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오호라, 이런 악담을 멋대로 하는 자는 어디에서 그렇다는 것을 증험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오진영 한 명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문하 제자의 죄로써 그 스승을 의심한다면 구산(龜山)과 남명(南冥)도 일찌감치 면하지 못했을 것이니, 확실히 이것은 무리한 것입니다. 또 선사께서 평소 엄하게 의리를 강론하고 엄하게 절개를 닦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원고에 쓴 내용은 비록 외부사람들이 자세히 알 것이 못되지만, 다만 출간된 유서와 통문으로 보면 이 얼마나 절개와 기개가 있고 이 얼마나 분명했습니까? 저 악담을 하는 자는 이런 점을 버려 믿지 않고 오진영이 무함한 것만 진술하니, 그 험한 마음을 무엇으로 감당하겠습니까? 옛날에 만약 순숙의 근거할 만한 유훈과 행실로서, 원고 가운데 탁월한 부분의 인가(認可)를 철저히 금지하여 인가의 증거에 넣지 않은 내용을 회옹이 얻으셨다면 단지 순욱과 순상만 배척하고 순숙은 의심하지 않았을 것주 40)은 틀림없습니다.
상중에 있는 그대가 선사와는 비록 사생(師生)이라는 명칭은 없었을지라도 높이 존경하며 본받은 것은 진실로 사생의 분수를 정한 자보다 낮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의 밝은 견식 같은 경우는 아마 이들 무리의 말을 듣는다면 당연히 사실에 근거하여 배척하기를 제가 위에서 분변한 것처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고 다만 '오씨에게 사기를 당했으니, 어찌 간옹에게 해롭겠는가'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저들이 기롱한 것은 선사에게 절개와 의리가 없다는 것이고, 사람을 알아보는데 밝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니, 당신의 이번 대답이 어찌 합당하겠습니까. 변론할 꺼리를 버려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말이 먼저 막힐 것을 걱정하니, 진실로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우연히 살피지 못한 것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 편지를 본 자가 혹여 그대가 도리어 악담을 하는 사람들에게 동요되어 간옹에게 조금 불만이 있다고 의심을 산다면 피차간의 불행이 클 것 같습니다. 장차 어떻게 이런 의혹을 해소하겠습니까? 빨리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
주석 35)옹저(癰疽)와 척환(瘠環)을 주인 삼았다
공자가 제나라와 위나라에서 옹저(癰疽)와 척환(瘠環)을 주인으로 정한 일을 말한다. 그러나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주자의 주에 의하면, 공자가 노나라 사구를 하다가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가셨다가 다시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갔는데, 송나라 대부인 사마상퇴(司馬向魋)가 공자를 죽이려 하므로 공자가 화를 피하려고 미복 차림으로 송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이르러 사성정자(司城貞子)를 주인으로 정하신 것이다. 맹자의 말은 공자가 이렇게 곤액을 당하고 있는 때에도 주인 삼을 사람을 가리셨는데, 하물며 제나라나 위나라에서 아무 일도 없을 때에 어찌 옹저(癰疽)나 척환(瘠環)을 주인으로 정하는 일이 있었겠느냐고 했다.
주석 36)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묵적과 양주
맹자(孟子)가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한 묵적(墨翟)과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한 양주(楊朱)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언급한 말인데,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주석 37)오랑캐는……어렵다
주희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세상에 둘도 없는 큰 공은 세우기 쉽지만 지극히 은미한 본심은 보존하기 어렵고, 중원 땅의 오랑캐는 쫓아내기 쉽지만 내 한 몸의 사사로운 생각은 없애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不知不世之大功易立, 而至微之本心難保; 中原之戎虜易逐, 而一己之私意難除〕" 하였다.
주석 38)김 아무개……있겠습니까
송시열은 "설령 이이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김장생은 입증하지 않았을 터인데 더구나 전혀 이런 일이 없는 데야 더 말할 것 있겠습니까.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섭공(葉公)이, '우리 고장에 몸가짐을 정직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가 양(羊)을 훔치자 아들이 증인을 섰습니다.'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우리 고장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달라서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겨 주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숨겨 주니 정직이 그 속에 있다.'고 했는데, 가령 김장생이 과연 그런 말을 했다면 아비가 양을 훔친 것을 증명한 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設使珥眞有此事。亦不當自長生證之。況萬萬無此乎。昔。葉公曰。吾黨有直躬者。其父攘羊。其子證之。孔子曰。吾黨之直。異於是。父爲子隱。子爲父隱。直在其中。使長生果爲此。則與證父攘羊者何異〕"라고 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 <진문원공유고。잉변사우지무。우걸허손주석귀전독서소。(進文元公遺稿。仍辨師友之誣。又乞許孫疇錫歸田讀書疏。)>
주석 39)고명한……것입니다
송시열은 "신이 고(故) 참찬(參贊) 신(臣) 송준길(宋浚吉)과 같이 김장생의 말을 들었는데 그 말에, '일찍이 변형(變形 머리 깎는 것)의 여부에 대해 은미하게 율곡(栗谷)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답하기를 '비록 변형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빠졌었으니, 변형하지 않은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했으니, 율곡은 바로 이이의 별호(別號)입니다. 비록 절절히 조목조목 나누어 해명하지는 않았으나 머리 깎지 않은 실상(實狀)은 절로 드러났으니 이것이 참으로 이이의 기상(氣象)입니다. 또 헌신(憲臣)이 장유의 설을 인용하여, '머리를 깎은 것은 조적(粗迹 불확실한 증거의 뜻)이라서 변론할 가치조차 없는 말이므로 장생도 그렇게 말했다.'했으니,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또, '제신(諸臣)은 머리 깎지 않은 실상(實狀)을 갖추 진달했다.' 했겠습니까. 제신들은 머리 깎지 않은 실상을 갖추 진달했는데도 김장생만이 그렇게 말했다고 한 것은 또 무슨 마음에서입니까. 신은 삼가 김장생을 위해서 원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고명(高明)한 제자로서 그것을 증명했다면 이이가 머리 깎았다는 것을 끝내 변명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니, 이이가 당한 무망(誣罔) 역시 얼마나 극심한 것입니까.〔臣與故參贊臣宋浚吉。同聞長生之言則曰。嘗以變形與否。微稟于栗谷。則答曰。雖不變形。何益於其心之陷溺哉。所謂栗谷卽珥之別號也。雖不切切分疏。而其不爲落髮之實狀。自然形見。眞是珥之氣象也。且憲臣引張維說。以爲落髮是粗迹而不足辨。故長生亦言之若然。則何以又曰。諸臣備陳不落髮之實狀也。諸臣備陳不落髮之實狀。而獨長生言之云者。亦獨何心也。臣竊爲長生冤痛也。以高明之弟子而證之。則珥之落髮。終不可辨明。珥之所遭。何其甚也〕"라고 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진문원공유고。잉변사우지무。우걸허손주석귀전독서소。(進文元公遺稿 仍辨師友之誣 又乞許孫疇錫歸田讀書疏)>
주석 40)순욱의……않았을 것
주자는 일찍이 "순씨(荀氏)의 한 가문을 논해 보자면, 순숙(荀淑)은 양씨(梁氏 순제(順帝)의 처족)가 권세를 휘두르던 때에 바른말을 하였으나, 그의 아들 순상(荀爽)은 동탁(董卓)이 왕명을 전단하던 조정에 발을 담갔으며, 그의 손자 순욱(荀彧)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당형(唐衡 환제(桓帝) 때의 환관)의 사위가 되고 조조를 보좌하는 신하가 되었는데도 그르게 여길 줄을 몰랐다. 이는 굳세고 바르며 정직한 기상이 이미 흉학(凶虐)함에 꺾인 나머지 점점 자신만을 온전히 하고 사무(事務)만 볼 계책을 도모하였기 때문에 서로 그 속에 빠져들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생각건대, 그 당시의 부형(父兄)과 사우(師友) 사이에 자연 일종의 의론(議論)이 있었는데, 그 본질은 문식하여 덮고 가린 채 갑자기 그 말을 듣는 자로 하여금 그것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참으로 옳다고 여기게 하여, 반드시 깊은 꾀와 기이한 계획이 있어야 만에 하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라를 살려 내고 백성을 구제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러니 사설(邪說)이 멋대로 유행하는 것이 홍수와 맹수의 피해보다 더 심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答金聖九 乙丑
澤述白, 日月不留, 先令監常事已過矣。無狀蔑禮, 尚稽匍匐, 而哀執降制釋哀之前, 面慰莫遂。自分罪戾宜遭斥絕, 乃蒙耑狀遠投, 切切憂斯文之變, 懇懇喩處義之方, 非洪度平物我之盛, 何以及此? 仰感俯悚, 無容云喩。此身雖無似, 亦具好賢親友之彛, 豈不知一趍之當急? 而昧然至此也。一自先師之遭誣罔極也, 固痛恨之在心思, 所以辨白而未遑他矣。及其不得已而行聲討, 彼亦門墻內人, 豈不內傷心而外羞人也? 至於彼反荷杖而汙衊之, 則有同街兒悖習, 見者自應有眼, 遭者何用爲意? 但因此而一門之爲局外人侮囮則極矣。故入則忽忽然無樂, 出則蹙蹙然靡騁, 跡不出百里, 座不參稠中者, 有年矣。此區區所以負何於哀執者然也。鳴呼, 陰之奸悖誣罔, 神人之胥怒, 不須盡說其諸不正言。立異於刊議之初, 又不能誠心啟喩, 使之摧服於誣師之後者, 亦不可謂無咎, 故反省內疚, 未嘗自恕, 每欲備陳其實, 一聽明決, 而不敢爾也。忽此來喩, 長牋短幅, 不憚勤勞, 有以見所見者明, 所守者正, 所養者厚, 而勘斷陰罪者得其情, 指示淺拙者得其當, 此正吾之所願聞願從者, 何幸何幸? 但其引孟子之闢楊墨, 以證今日之斥陰, 而謂何曾如彼多事, 則恐有欠的當。夫謂孔子主癰疽瘠環, 時人好事者說也, 孟子猶苦辨不已, 如使此說造自三千之從ㆍ私淑之列, 則孟子必討以誣師之罪矣。楊墨害道固大矣, 故孟子闢之。然使楊墨幷誣孔子, 則孟子又必逐一立辨, 而疾討之, 斷以罔聖之罪, 不但斥其學術之獘也。今陰之所誣破先師大節, 既非主癰之類之小者也, 誰家日月之推戴, 其爲當地之害, 不比無君父之待推說者矣。蓋陰之禍急於楊墨, 而加以楊墨所無之誣賢, 其所誣者, 又乃親灸之師, 而彼又高第足也, 則其視楊墨, 罪浮幾層? 使陰早出於孟子世, 其不但與楊墨幷案同勘也審矣。至於多事, 本非君子處事之方, 行其所無事, 乃其道也, 而自非明智, 未易及此。然行所無事者, 莫如禹之治水, 而隨山刊木, 濬川敷土, 何等多事? 是知事之順理, 多事無事, 茍不順理, 無事不足貴。竊謂向番聲討義理之不得已者, 則恐不可以多事目之也。方今逐臭之徒, 箇箇挾雕蟲末技, 蟻聚蝨附於陰門之下, 繩鉤黑白, 變幻之粉飾之, 自處以報佛傳道, 驅人於戕賢毒正。又且挾全稿而牢籠一門, 倚時勢而箝制舉世, 前頭恠舉莠言, 有不可測者, 則幷以記箚往復, 隨變辨斥, 恐亦不可以已之, 如何如何? 不可專此戀著, 失了公平大本, 妨了親切工夫之喩, 眞及時切當之敎也。朱子所戒, 戎虜易逐, 私心難除, 豈非爲此故耶? 顧何敢保無厥病? 亦不至全昧反省。區區以爲既失公平大本, 又闕親切工夫。雖說得大義, 際天極地, 斥得邪說, 驅蛇逐鳥, 其爲吾道之折衝禦侮則優矣, 至於了當自家一副身心, 承千聖傳授之法, 答上帝降衷之恩, 則究無所補, 先師之所望於後學, 豈若是而已? 此實平生所兢兢者, 而今承頂針之先發, 其爲一倍警惕, 若冷水澆背, 不待百淵書而已然也。先師之於先令監, 交道不絕, 示喩所謂自有艮翁手筆, 不待辨而明者, 自是幷世之公論, 彼輩之用意其間, 而不以其實, 至目拜先令監者, 爲全門之鄭胤永者, 誠不知其何心也。且同一拜也, 而欽齋之斥陰也, 則胤永之; 徐宋成之袒陰也, 則不胤永之, 天下安有似此公理? 尢不知其何心也。餘惟祈制體, 以時支重, 研經明義, 繼述先志, 主張正論, 匡扶世道。
彼徒言必稱, 吳是先師傳道高弟, 何敢討斥以傷先師之明? 吾則以爲若先師實傳道於吳, 則尢不可不討。其誣師之罪也何也? 使末學無名者, 或有誣師之言, 人皆知其無知妄發, 而不之信。既人皆不信, 則師則無損, 而誣者有罪, 罰其罪而服其人, 人不服, 則割絕之斯已矣, 不須乎聲明國中也。至於所謂傳道者, 所誣關乎大義, 則人必曰: "某乃其師心法傳授之人也, 其言非誣實也。" 於是乎誣者罪重, 固不待言, 而師之道破喪無餘, 不有明目張膽而辨討之, 何以破今與後之疑也? 昔尢庵之告君曰: "設使李某眞有此事, 若自金某證之, 是證父攘羊, 况萬萬無此乎。" 又曰: "以高明之弟子而證之, 則某之落髪, 終不可辨明矣。" 夫於趙【緯韓】張【維】誤聽誤說誤記之沙溪言者, 尢庵猶恐, 栗谷之落髪未辨, 沙溪之誣師誤蒙, 切切然痛之, 援證佐而昭白之。今吳也處己以艮翁高弟也, 而乃敢肆言曾有認意, 而大書料量不拘, 而永證于後。是則尢庵所慮, 終不可明者, 厥誣愈深, 不可辨哉? 是則父不攘羊, 其子僞證者, 厥罪尢重, 可不討哉? 且唐堯周公之聖, 焉而任四兇管蔡? 南冥栗谷之賢, 焉而奨仁弘汝立? 使先師實有傳於吳, 顧何傷其明哉? 雖然此皆姑從彼徒之說, 而假設言之耳。乃若先師禪宿抱淚之悼, 自炳庵金公之沒, 累發於言文。至於吳, 則雖以文辭發揮, 時見愛重, 其功利爲重, 不計道義之責勸。余復蹈覆轍之, 斥既不啻嚴切矣。逮至末年, 以諸子未有擬望, 諸君未免偏駁, 蓋嘗深憂永歎於與人之書。吳若有可傳之實, 何庸憂嘆之至此乎? 然則先師初不許吳之明, 實不愧知人之哲。尚何論今日之傷明與否哉?
示喩有人舉晦翁論荀氏事, 有所云云一條, 看來不覺裂眦也。夫晦翁之論荀氏者, 何如也? 始以全身就事譏之, 又以一種議論文飾蓋覆斥之, 終說橫流洪水猛獸之害討之。我先師之學, 如有可以推此而論之者, 則徇私賊義禍世之大者, 其無氣節, 講義不嚴, 已不足言矣。鳴呼, 肆此惡口者, 于何而驗其然也? 非究不過一吳震泳乎? 如以門弟之罪而疑其師者, 龜山南冥早已不免, 的是無理也。且先師平日講義勵節之嚴, 口諸人筆諸稿者, 雖非外人之所詳, 但以遺書與通文之印布者觀之, 是何等氣節? 何等斬截? 彼惡口者, 舍此不信, 而震誣之是述, 其險心何可當也? 向使晦翁得荀淑遺訓與行事之可據, 如不入認譜, 切禁認稿之表表者, 其但斥彧ㆍ爽, 而不幷疑淑也必矣。哀執之於先師, 雖無師生之名, 尊仰取法, 實不在定分者以下, 若明見, 其聞此輩之言, 宜其據實斥之, 若區區之右辨也。顧乃不然, 而但'以見欺於吳, 何害於艮翁'答之, 彼之所譏, 先師之無節義也, 非不明於知人也, 哀執此答, 何所當乎? 舍不用可辨之資, 而自憂己言之先竆, 誠不敢知也。然哀執之偶爾未察, 豈有他哉? 但恐見此書者, 或疑哀執之反爲惡口所動, 有些不滿於艮翁, 則彼此不幸大矣。將何以解此惑也? 願亟賜囬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