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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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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재문제창에게 보냄(與羅在文濟昌 ○丙寅)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3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3.TXT.0038
나재문제창에게 보냄
상주가 선조고의 장례식 때 신주를 세울 수 없었던 것은 본래 저들이 압력을 가하여 서둘러 하관을 하느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니, 혹시라도 오늘날 세상에 예가 폐지되어 초래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나중에 신주를 만들 것을 계획했다고 하던데 아직까지 만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의 의미를 따져보면, 사람이 처음 죽었을 때 혼기가 흩어져버리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옷을 가지고 혼을 부르고, 속백(束帛)주 104)으로 죽은 사람을 받들어 그 형체를 돌이켜 광중 안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신혼(神魂)이 더욱 표탕하여 일정함이 없으면 속백은 오래 보존하여 길이 의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무로 만든 신주를 세워 대신하고, 우제를 지냄으로써 안정시킵니다. 만약 장례 지낼 때 나무 신주를 세우지 않은 채 혼백(魂帛)을 받든다면 삼년 동안 혼백을 묻은 뒤에는 신이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 하늘로 올라가고 땅으로 내려가서 구름처럼 떠돌고 바람처럼 떠다닐 것입니다. 자손들이 이점까지 생각한다면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가(禮家)들은 장사를 지낼 때에 나무로 만든 신주를 받들지 않는다면 장례를 마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장례에 나무로 만든 신주를 세우지 않았으면 아뢰는 글도 또한 감히 짓지 않았으니, 신과 인간 사이의 정과 예의와 관련된 중요성이 도대체 어떠합니까.
일단 갑오동란 때에 집집마다 신주를 묻은 뒤로부터는 이미 신주를 다시 받들 수 없고, 또 새로 만들 생각도 하지 못하여 하관하는 날에 이르러 새로 신주를 세운 사람은 천 명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만약 한두 명이라도 예를 중시하고 풍속을 불쌍히 여기는 선비가 큰 절차를 빠뜨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를 듣고서 마치 나무를 엮고주 105) 끈을 묶는주 106) 일처럼 케케묵은 설을 늘어놓으니, 단지 채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진부하고 우활하다 이릅니다. 이것이 수십 년 동안 짐승 같은 무리가 가득하고 예의가 사라져서 온갖 죄악이 하늘에 가득한 풍조 때문이니 갈대 하나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한 번도 이런 것을 가지고 강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니, 사람들에게 한갓 비웃음만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취향이 이쪽으로 가까이 오는 친구에 대해서만 더불어 말하여 간혹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주인 당신이 바야흐로 성현의 실학으로 자식들을 힘쓰게 하고 학교를 세우고 경적(經籍)을 쌓아 장차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어두운 시절의 한 점 빛과 같으니, 어찌 다만 이쪽을 향할 따름이겠습니까? 이것이 즐거이 그 일에 대해 고하여 그 아름다움을 빨리 이루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아마 역시 헤아려주시고, 기꺼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주석 104)속백(束帛)
묶어서 한 묶음으로 만든 5필(匹)의 비단을 이른다. 옛날에 빙문(聘問)이나 궤증(饋贈)에 사용한 예물(禮物)이다.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에 "소사(少師), 소부(少傅), 소보(少保)는 피백(皮帛)을 손에 든다."라고 하였는데, 한(漢)나라 정현(鄭玄)의 주에 "피백(皮帛)란 것은 비단을 묶은 다음에 가죽으로 싼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속(束)이라는 것은 10단(端)이다. 매단(每端)의 길이가 1장(丈) 8척(尺)인데, 모두 두 끝을 합하여 말면 총 5필(匹)이 되기 때문에 속백(束帛)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주석 105)나무를 엮고
나무를 엮어 새집을 만들어 산다는 뜻이다.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에 "상고 시대에는 사람들이 적고 금수는 많아서, 사람들이 금수와 충사의 피해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에 성인이 나와 나무를 엮어 둥지를 만들어서 피해를 면하게 하니, 사람들이 기뻐하며 그를 천하에 왕이 되게 하고는 유소씨라고 불렀다.〔上古之世, 人民少而禽獸衆, 人民不勝禽獸蟲蛇. 有聖人作, 構木爲巢, 以避群害, 而民悅之, 使王天下, 號曰有巢氏〕"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106)끈을 묶는
문자가 없던 태고 시대에 노끈으로 매듭을 맺어 부호를 삼아서 행했던 소박한 정치 형태를 말한다. 신농씨(神農氏)가 이 결승의 정사를 행하다가, 복희씨(伏羲氏) 때에 이르러 팔괘를 긋고 나무에 새긴 최초의 문자를 만들어서 서계(書契)의 정사를 행했다는 기록이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와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보인다.
與羅在文濟昌 ○丙寅
哀侍之不能立主於先祖考襄禮者, 固緣彼壓渴窆之未遑, 而或無爲今世禮廢之致也歟。 竊聞以追造爲料, 而尚未之及者, 何也? 盖原禮意, 人之始死, 魂氣離散, 故復之以衣, 奉之以束帛, 反其形歸窀穸, 神魂尢飄蕩無定, 而束帛不足以久存永依。 故立主生而代之, 行虞以安之。 若葬不立主, 而仍奉魂帛, 則三年埋帛之後, 神何所憑依? 上天下地, 其將雲遊風颺矣, 爲人子孫念到于此, 豈不痛傷? 故禮家以葬而不奉主者, 爲不成葬。 葬不立主, 告辭又不敢剏製, 其爲神人情禮之關重, 顧何如哉? 一自甲午東亂, 人家埋主之後, 既不能還奉, 又不思改造, 至於窀穸日, 新立者又千無一焉。 如有一二重禮悶俗之士, 爲言大節之不可闕, 則聽之爲蒼古之說, 有若構木結繩之事, 不惟不見採, 反謂之腐迂。 此盖數十年來, 蹄跡充斥, 禮義淪喪, 滔天之風潮, 非一葦之可抗也。 故弟則未嘗以此強喻, 夫夫徒取其譏。 惟於朋知, 趣味近向此邊者, 說與而或見從矣。 哀侍方勉子以聖賢實學, 齋黌之峙, 經籍之積, 將聳觀聽也, 則此黑窣地一点光, 豈但此邊之向而已哉? 此所以樂爲之告, 而亟成其美者也。 想亦見諒而樂聞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