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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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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선명상구에게 보냄(與朴善明塽九 戊辰)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3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3.TXT.0014
박선명상구에게 보냄
3일 전 돌아가시는 길에 날이 급박하게 저물어 어찌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날씨가 갈수록 추워지는 요즘, 생활하시는 데에 신명의 가호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럭저럭 지내지만 가족의 근심이 계속 이어져 끝이 없습니다. 학사에는 학생들이 흩어져 떠나가서 당우(堂宇)가 온통 비어 쓸쓸히 홀로 앉아 있노라면 몹시 무료합니다. 세모에 슬픔을 느끼고 쇠약해지는 것은 인정상 그렇지 않음이 없거늘, 하물며 저처럼 실의에 빠져 50년을 살아오면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 생각해보니 아득히 옛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 17세에 일찍 과거에 급제할 것이고, 또 재성(才性)은 적지만 과거공부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듯 하니 자색 청색 인끈은 지푸라기 줍는 것 같이 쉽게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로 갑오년에 변란이 일어나 국가의 제도가 바뀜으로써 과거에 합격할 길도 없어지고 원대한 포부도 허사로 돌아가니 운명을 점친 자의 말을 증험하지 못했습니다.
소사(蕭寺, 사찰)에서 스승 구산옹(臼山翁, 전우)을 배알하고《좌씨전》을 강론한 인연으로, 구산옹께서 곽림종(郭林宗, 郭泰)이 모용(茅容)을 방문한 고사주 29)를 인용하여 몸소 저희 집까지 오시니, 선친이 저에게 "'대인(大人)을 보는 것이 이롭다'주 30)는 말은 덕으로써 말을 한 것이지 전적으로 지위로 말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영광이 어찌 과거에 합격한 것만 못하겠는가? 네가 마침 17세가 되었으니 역시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 헛되이 남의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로 하여금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게 하였으니, 덕을 세우고 도를 이루며, 선현을 잇고 후학을 인도하는 것은 설사 (그 성과를) 기약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경서에 힘쓰고 몸을 훌륭하게 하며, 인을 구하고 의를 따르는 것은 크게 뒤쳐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부친이 돌아가시고주 31) 26세에 가장의 책임을 지게 되니, 훌륭한 가업이 모두 사라지고 백발이 성성한 모친께서 당(堂)에 계시어 봉양하느라 7년 동안 몸소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경서를 읽는 날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우환과 곤고함이 좌우에서 볶아대어 옛날에 익힌 것도 수시로 잊어버렸으니, 새로운 지식을 어찌 논하겠습니까? 사람들이 "학문의 성취 여부는 운수가 있다"라고 한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거듭 상환(喪患)을 만나서 3년 동안 여막살이를 하고 돌아오니,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동서로 떠돌며 어느 곳에 이르러 정착해야 할지 계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땅이 없으니 부지런히 농사짓는 일과 어찌 친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다시 글을 읽으며 연구에 힘쓴 지가 1년여가 되었고, 이전에 했던 학문을 다시 다스려 점차적으로 옛것을 회복하였으며, 다시 정진하여 정미한 곳으로 나아가니 간혹 새롭게 얻은 부분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바야흐로 또 분비(憤悱)주 32)가 계속 이어져 기필코 터득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용사(龍蛇)주 33)가 재앙을 고하여 스승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맹인이 도와주는 사람을 잃은 것 같았으니주 34), 갈팡질팡 어디로 가겠습니까? 학업을 마칠 길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어떻게 마음을 가누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게다가 사문(師門)에 일이 많고 스승의 의리를 파괴하는 변란이 있음에 이르렀는데도 세상에는 믿을 만한, 훌륭한 문장이나 억센 주먹이 없었습니다. 저같이 졸렬한 사람도 차마 앉아서 보고 있을 수 없어서 함부로 제대로 말을 해야 하는 일에 참여하였지만, 저들을 복종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저들에게 노여움을 당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고 모멸을 수없이 당하였습니다. 이에 나를 돌이켜보고서 나에게서 허물을 구하니, 내 몸에 축적하고 있는 것이 부족하여 다른 사람에게서 허물을 구하고 비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운명과 사변이 반복무상하여 뜻과 학업을 성취하지도 못했는데 머리가 먼저 세어버렸으니 한탄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근년 이래로 조용한 곳에서 자신을 수양하며 만년을 마칠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학생들이 책상자를 짊어지고 이곳에 이르니, 다른 사람에게 베푼 선(善)은 없다 하더라도 독서한다는 명분은 오늘날 세상에 보기 드물기 때문에 그들을 허락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 지레 겁을 먹고(風聲鶴唳)주 35) 떼 지어 나오고 떼 지어 들어가며, 아침에는 유생의 규율을 배우고 저녁에는 세속의 습속을 답습하니, 불행히도 율곡의 이른바 '보탬은 없고 기롱만 산다'주 36)는 것에 가깝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교학상장(敎學相長)주 37)의 이익을 취하고자 해서이고, 또 7개월에 회복하는 씨앗주 38)이 있기를 바라서입니다. 만약 끝내 이와 같은 데서 그친다면 일찍이 그만두는 것이 더 나은 것만 못합니다.
또 학업을 전수하고 질문에 대답함에 밤낮으로 끝이 없어 틈을 낼 여유가 없으니 그 우열을 가려서 그들 중에서 서로 가르치게 하고 싶지만,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그들에게 후대하고 박대하는 혐의가 없지 않으니 고민만 할 뿐 끝내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분수에 있어서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기르는 공에도 진실로 큰 해로움이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을 해봐도 이 세상에 살면서 달리 잘하는 일은 없고, 오직 책상 위의 많은 경전을 읽고 천하의 많은 의리를 궁구하면서 마음속에 많이 응축한 것을 써내어 평생의 뜻과 바람에 응하려 하지만 진실로 이처럼 부질없이 사라질까 두렵고, 실로 이 생애를 잘못 보낼까 슬픕니다. 삼가 이후로는 채서산(채원정)이 손님을 거절한 법문(法門)주 39)으로 자신의 수양만 관리하고 다른 사람이 와서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야겠습니다. 그러나 간혹 간절하게 요구하며 그만두지 않는 자는 승척(繩尺)주 40)을 가지고서 규율하기를 마치 관씨(管氏)의 제자직(弟子職)과 진씨(眞氏)의 교자첩(教子帖) 및 석담(石潭)의 혁구습장(革舊習章) 등의 책처럼 하게 하여 하나씩 따라 실천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하면 잘하는 자는 훗날에 우뚝한 성취를 바랄 수 있고, 잘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 오래되지 않아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 방법은 거의 약간의 수고로움과 비난을 덜 수가 있고, 약간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궁한 처지에 한 해가 바뀌어서 온갖 생각이 재처럼 식었는데,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은 그 근심을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형님의 빼어난 견해는 제가 미칠 바가 아니니, 감히 이렇게 질문을 드립니다.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주석 29)곽림종이 모용을 방문한 고사
곽태가 모용의 집에 유숙한 다음 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훌륭하다〔卿賢乎哉〕"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 《후한서(後漢書) 卷68 〈곽태열전(郭泰列傳)〉 그런데 《후한기(後漢紀)》 권23 〈효령황제기(孝靈皇帝紀)〉에는 "'경이 이와 같으니 바로 나의 벗이다(卿如此, 乃我友也)'라고 하고는 일어나서 마주 대하고 읍(揖)한 뒤에 학문을 권하였다"라고 되어 있다.《후한기(後漢紀)》는 진(晉)나라 원굉(袁宏)이 각종 자료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사서(史書)로 모두 30권인데, 가정이 이 책을 많이 참고하며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석 30)대인(大人)을……이롭다
《주역(主役)》 〈건괘(乾卦)〉 구오(九五) 효사(爻辭)에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飛龍在天, 利見大人〕" 하였다.
주석 31)부친이 돌아가시고
원문의 풍수(風樹)는 풍목(風木)과 갗은 말로 생전에 어버이께 효성을 다하지 못해 사후에 슬퍼하는 마음을 말한다. 춘추 시대 때 공자(孔子)가 길을 가는데 고어(皐魚)라는 사람이 길에서 칼을 안고 슬피 울고 있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고 하고는, 서서 울다가 말라 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 권9
주석 32)분비(憤悱)
분발(奮發)과 같음. 《논어(論語) 〈술이(述而)〉의 "마음속으로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계도해 주지 않고, 표현할 길이 없어 애태우지 않으면 계도해 주지 않으며, 한 귀퉁이를 알려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나머지 세 귀퉁이를 반증하지 못하면 다시 알려 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에서 유래한 말이다.
주석 33)용사(龍蛇)
용사세(龍蛇歲)는 십이지(十二支)의 진년(辰年)과 사년(巳年)으로, 사람이 죽는 액운이 든 해를 말한다.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서 지내는데, 하루는 꿈에 공자가 나타나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올해는 진년이고 내년은 사년이다.〔起起, 今年歲在辰, 來年歲在巳〕"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 참술(讖術)로 맞추어 보고 자신의 목숨이 다할 줄 알았더니, 실제로 그해 6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5 〈정현열전(鄭玄列傳)〉여기에서는 스승인 전우의 죽음을 의미한다. 임진왜란을 용사(龍蛇)의 변(變)이라고도 하였다.
주석 34)맹인이...같았으니
《예기(禮記)》 〈중니연거(仲尼燕居)〉에 "예법이 없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소경이 아무 도움 없이 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갈팡질팡하여 과연 어디로 가겠는가.〔治國而無禮, 譬猶瞽者之無相, 倀倀乎其何之?〕"라는 구절을 줄여서 인용한 표현이다.
주석 35)풍성학려(風聲鶴唳)
겁을 집어먹은 사람이 당치 아니한 사물에도 놀라는 것을 의미함. 중국 동진(東晉) 때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비수(淝水)에서 대패하고 바람의 소리와 학(鶴)의 소리를 듣고도 진(晉)나라의 추병(追兵)이 아닌가 하고 놀랐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주석 36)보탬은 없고 기롱만 산다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 〈서(序)〉에서 "내가 스승이 될 만한 게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처음 학문하는 사람들이 방향을 모르고, 굳은 의지도 없으면서 그냥 배우겠다고 한다면 피차에 도움 될 것이 없고 도리어 남의 조롱만 사게 될까 걱정스러웠다. 〔余慙無以爲師, 而且恐初學不知向方, 且無堅固之志, 而泛泛請益, 則彼此無補, 反貽人譏〕라고 하였다.
주석 37)교학상장(敎學相長)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학문을 해 본 다음에야 자기의 재주가 부족함을 알게 되고, 가르쳐 본 다음에야 어려움을 알게 되나니, 부족한 줄을 안 다음에야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며, 어려움을 안 다음에야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이 서로 증진한다.' 한 것이다.〔學然後知不足, 敎然後知困, 知不足然後能自反也, 知困然後能自强也. 故曰:敎學相長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38)7개월에……씨앗
《주역(周易)》 〈복괘(復卦)〉괘사(卦辭)에 "칠일 만에 되돌아오니, 갈 데가 있는 것이 이롭다.〔七日來復, 利有攸往〕" 했는데, 7일(日)의 일(日)은 월(月)의 뜻으로서 7개월 만에 음양이 서로 왕래 소장하다가 동짓달에 하나의 양(陽)이 발생하는 것을 이른다. 이는 양도(陽道)가 회복되는 시초로, 암울한 시대가 가고 문명의 시대가 오거나 소인의 득세가 끝나고 군자의 시대가 오는 것을 상징한다. 전우(田愚)가 "이 아이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실로 7개월 만에 회복될 씨앗입니다. 제가 본래 사도(師道)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역시 어찌 후배를 권면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此雖年少, 實七日復之種子. 愚固非有師道, 亦豈無奬勸後進之心〕"하였다. 《간재집(艮齋集)後篇》 권2 〈답신백삼(答愼伯三) 원성(元晟) ○갑인(甲寅)〉
주석 39)채서산……법문
채원정이 서산에 머물 때 주자가 찾아가 만나보려고 했으나 채원정이 한결 같이 손님을 심하게 거절해서 만나보지 못했던 일을 가리킨다. 《朱子大全(주자대전)》 〈答蔡季通(답채계통)〉
주석 40)승척(繩尺)
표준의 의미이다.
與朴善明塽九 戊辰
三昨歸程, 得無迫曛見惱? 天寒比劇, 起居有相。 弟狀且過, 而眷憂相續, 了無涯岸。 社生散去, 堂宇一空, 悄然獨坐, 殊甚無聊。 歲暮感悵向衰, 人情盖莫不然, 矧如弟之佗傺半百, 一無所成者乎? 追思曾經, 蒼蒼然若說古史。
幼時談命者謂年十七當捷巍科, 且薄有才性, 於功令之業, 若不甚難, 紫拕青紆, 擬將拾芥。 夫何變生青馬, 國制更張, 龍點無路, 鵬圖歸虛, 談命者說不驗矣。
夤緣蕭寺拜臼山翁而講《左氏傳》, 臼山翁引郭林宗訪茅容故事, 躳駕弊廬, 先人謂不肖曰: '利見大人, 有以德言者, 不專言位也。 今日光榮, 何下捷科? 汝適丁十七, 亦信談命者之不虛喫人飯。' 於是使之專意學問, 立德成道, 繼往開來, 縱不敢期, 劬經淑身, 求仁由義, 不欲多讓。
風樹不待, 卄六當室, 青氊掃地, 白首在堂, 七載躳耕, 溫經無日。 加以憂患困衡, 左煎右熬, 舊得隨失, 新知奚論? 人之言曰"學之成否, 有數存焉", 信矣。 逮夫荐遭喪禍, 三載守墓而歸, 則家益剝落, 東漂西泊, 何所止届, 無計可爲。 然甘旨之供無地, 稼穑之勤奚親? 乃復尋數窮研之是務者爲有年, 申理前業, 漸次復舊, 進而向精微去處 或不無一斑新得矣。 方且憤悱相尋, 期期不得不措也。
龍蛇告厄, 泰山奄頹, 瞽者失相, 倀倀何之? 慨卒業之無所, 不知何以爲心。 重以門墻多事, 至有破敗師義之變, 而世無大筆ㆍ麁拳之可恃者, 則如吾之孱劣, 不忍坐視, 妄與能言之役, 不惟彼之不服, 反遭其怒。 幾殞性命, 飽喫汙衊。 反以求之, 以所藏乎身者未足, 以求人非人故也。 復誰怨尢? 運命事變, 反覆無常, 志業未就, 髪先星星, 可勝歎哉?
比年以來, 欲靜處自修, 爲收之桑榆之計, 忽有四面負笈之沓至, 顧無及人之善, 以讀書之名, 今世罕聞也, 故許之。 則率多風聲鶴唳, 旅進旅退, 朝受儒規, 暮蹈俗習, 栗翁所謂無補貽譏者, 不幸近之。 夫所貴乎教學者, 欲其取相長之益, 且望其卓然有七日種子者, 若終如此而止, 不如早已之爲得。
且傳課酬問, 匝晝連夜, 無片隙可乘, 欲揀其優劣, 使自中相教, 則一視之下, 不無厚薄之嫌, 只得忍煩耐惱, 終無善策。 於自己分上, 研理養心之功, 實有大害。 自料生乎斯世, 無他能事, 惟欲讀了案上多少經傳, 究了天下多少義理, 寫了齊中多少蘊抱, 用酬生平志願, 誠恐若此乾沒, 實悲枉過此生。 窃欲從茲以往, 用蔡西山拒客法門, 只管自家進修, 不許別人來學。 其或懇求不已者, 純用繩尺而律之, 如管氏弟子職, 真氏教子帖, 石潭革舊習章等書, 使之一一循蹈。 其能者可望他日之卓然, 不能者自應不久而退。 此法庶可以省得幾分勞攘, 取得幾分效益矣。
竆途換歲, 萬念灰冷, 惟此一事, 耿耿難裁。 吾兄超詣之見, 非弟所及, 茲敢質之。 未知何以見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