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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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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재선생에게 올림(上艮齋先生 壬戌)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2.TXT.0016
간재선생에게 올림
《중용》 32장의 대본(大本)주 65)은 체용(體用)을 갖추고 있고, 정(靜)과 동(動)이 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용장구》에 의거해보면, 처음에는 의심할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반드시 대본을 정(靜) 한쪽에 소속시켜놓고, 1장(首章)에 나오는 대본(大本)과 똑같이 보려 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문장을 보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 설과 같다면 《중용장구》에서는 마땅히 '성의 본체'라고 말해야지, '성으로 여긴 바의 전체'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그 중(中)을 다하여 터럭만큼의 치우침이나 기울어짐이 없다.'고 해야지, '터럭만큼의 인욕의 거짓으로 뒤섞인 것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주 66) 이것은 이미 비교적 분명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주자어류》에서 대본(大本)은 중(中)이고, 대경(大經)은 용(庸)이라는 가르침 또한 족히 하나의 큰 증거가 될 수 있으니, 《주자서절요기의(朱子書節要記疑)》》주 67)에서 낸 차(箚)는 진실로 바꿀 수 없는 의론입니다. 얼마 후 《사서비지(四書備旨)》를 보니, 역시 대본을 세우는 것으로써 성을 다할 수 있다고 여겼고, 하나의 사심도 섞이지 않아 만리(萬理)를 다 갖춘 것으로써 성을 다하는 일로 여겼습니다. 또 사욕이 그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없고 만리(萬理)를 다 갖춘 것으로써 "고요하고 깊은 그 연못이여"를 풀어내니, 만약 사욕이 없는 것으로써 성을 다하는 진성(盡性)을 미발(未發)에 소속시킨다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제가 이 한 의미에 대하여 감히 《중용장구》를 버리고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중용장구》를 버리고 대본을 미발에 소속시키지 않은 자이니, 견식이 어떠함을 막론하고 문리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단(四端)과 도심(道心)이 반드시 절도에 맞는 것은 아닙니다.주 68) '친상(親喪)에 슬피 우는 것이 도심이 아니겠는가'마는 그러나 간혹 몸을 훼손하여 목숨을 잃는 데에 이르거나 슬픔이 상정(常情)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것은 발하여 절도에 맞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불선함을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의 악을 미워하는 것이 어찌 도심이 아니겠는가'마는 그러나 간혹 자신의 부끄러움이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서 깊이 자리를 잡거나 잠시 부끄러움을 알지만 안으로 깊이 살피지 않는다거나, 죽을 자를 죽이지 않고 죽이지 않아야 할 자를 죽인다면 이것은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손님과 주인이 올라가는 것을 양보하는 것이 어찌 도심이 아니겠는가'마는 세 번 양보하는 것은 중절이지만, 간혹 한두 번에 그치거나 많게는 4-5번에 이른다면 이것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인과 못난 사람을 알아서 시비를 구별하는 것이 어찌 도심이 아니겠는가'마는 그러나 그 덕의 고하를 알아서 옳다고 여기는 것이 그 실상에 걸맞고, 그 악의 대소를 알아서 비난하는 것이 그 정상(情狀)에 들어맞은 연후에 절도에 맞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악이 적다고 헤아리는 것에 실수가 있다면 이것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루어 말해가면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사단에 절도에 맞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과 도심에 과불급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드러납니다.
주석 65)《중용(中庸)》 32장의 대본(大本)
"오로지 천하의 지성자만이 천하의 대경을 경륜할 수 있으며, 천하의 대본을 세울 수 있으며, 천지의 화육을 알 수 있으니, 어찌 다른 것에 의지할 필요가 있는가? 정성이 돈후하고 절실함은 仁이며, 깊고도 깊음은 연못이며, 광대함은 천이다. 진실로 총명하고 성자의 지혜로써 천덕에 통달한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唯天下至誠, 爲能經綸天下之大經, 立天下之大本, 知天地之化育. 夫焉有所倚? 肫肫其仁, 淵淵其淵, 浩浩其天. 苟不固聰明聖知達天德者, 其孰能知之?〕"라고 하였다. 《중용(中庸)》 32장
주석 66)터럭만큼의……안 됩니다
"대경(大經)은 오품(五品)의 인륜이요, 대본(大本)은 본성에 간직하고 있는 전체(全體)이다. 오직 성인의 덕은 지극히 성실하고 망령됨이 없기 때문에 인륜에 있어, 각기 당연함의 실제를 다하여 모두 천하와 후세의 법이 될 만하니, 이른바 경륜이란 것이다. 본성(本性)의 전체에 있어, 한 털끝만한 인욕(人慾)의 거짓도 여기에 섞임이 없어, 천하의 도에 온갖 변화가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오니, 이른바 세운다는 것이다. 천지의 화육에 있어, 또한 그 지성무망(至誠無妄)함이 묵묵히 합함이 있고, 단지 듣고 보아 알 뿐만이 아니다. 이는 모두 지성무망(至誠無妄)한 자연의 공용이니, 어찌 딴 물건에 의지한 뒤에야 능한 것이겠는가〔大經者, 五品之人倫, 大本者, 所性之全體也. 惟聖人之德, 極誠無妄, 故於人倫, 各盡其當然之實, 而皆可以爲天下後世法, 所謂經綸之也. 其於所性之全體, 無一毫人欲之僞以雜之, 而天下之道千變萬化, 皆由此出, 所謂立之也. 其於天地之化育, 則亦其極誠無妄者有黙契焉, 非但聞見之知而已. 此皆至誠無妄自然之功用, 夫豈有所倚著於物而後能哉.〕"《중용장구(中庸章句)》 〈32장〉
주석 67)《주자서절요기의(朱子書節要記疑)》
이황(李滉)이 처음으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 소를 붙인 책이다.
주석 68)사단과……아닙니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53 〈맹자(孟子)3 공손추(公孫丑)〉에 "측은(惻隱) 수오(羞惡)에도 역시 중절과 부중절이 있다. 만약 측은지심이 발해서는 안 되는데 측은지심이 발하고 수오지심이 발해서는 안 되는데 수오지심이 발하면 곧 중절하지 못한 것이다.〔惻隠羞惡也有中節不中節. 若不當惻隠而惻隠, 不當羞惡而羞惡, 便是不中節.〕"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上艮齋先生 壬戌
《中庸》三十二章大本, 該體用兼動靜。 據章句, 初無可疑, 其必欲屬之靜一邊, 而與首章大本同看者, 未知其看文字何法也? 若如其說, 則章句當曰'性之本體'而不當曰'所性之全體', 當曰'極其中而無一毫之偏倚', 不當曰'無一毫人欲之僞以雜之矣。' 此既較然明者。《語類》大本中也, 大經庸也之訓, 又足爲一大證案。 則記疑所箚, 信其爲不易之論也。 俄見四書備旨, 亦以立大本爲能盡其性, 一私不雜, 萬理畢該, 爲盡性之事。 又以私欲罔間萬理畢具, 釋淵淵其淵, 如以無私而盡性, 屬之未發, 則其果成說乎? 小子於此一義, 敢以爲舍章句而爲說, 則已不舍《章句》, 而屬大本於未發者, 未論見識之如何, 即其文理之未逹也。
四端道心之未必中節。 如'親喪哀哭, 豈非道心', 然或毀至滅性, 哀不及情, 則是發不中節。 '羞己不善, 惡人有惡, 豈非道心,' 然或長留胷中而作有所, 一時知恥而不內省, 或可殺者不殺, 不可殺者殺之, 則是發不中節。 '賓主讓登, 豈不是道心,' 然三讓是其中節, 或止於一再, 多至四五, 則是過不及也。 '知賢不肖而是非之 豈非道心,' 然知其德之高下, 而是之稱其實, 知其惡之大小而非之得其情, 然後乃爲中節, 不然惡少失其權量, 則是過不及也。 推類說去, 莫不皆然, 四端之有不中節, 道心之有過不及, 若是其著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