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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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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재선생에게 올림(上艮齋先生 壬戌)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2.TXT.0014
간재선생에게 올림
김감역이 쓴 매산(홍직필)의 제문을 베껴서 올려드리고, 아울러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저의 견해로는 그 문장이 매옹을 기롱하고 비웃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자헌대부, 성균관 좨주'라는 아홉 글자를 사용하였지만, 그것은 좋은 제목이 아닙니다. 아래 문장에서 벼슬자리는 빈사(賓師)에 이르렀고, 귀함은 열경(列卿), 공경대부(公卿大夫)에 올랐으며, 옹수(擁篲),주 50) 추풍(趨風)주 51) 등 휘황찬란하게 포장한 말들은 모두 처음의 제목을 메조지 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현인군자를 칭송함에 있어서 맨 처음을 인작(人爵)의 영화로움으로 포장한다면, 이는 그에게 천작(天爵)주 52)의 실상이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장수하고 해로했다는 말은 비록 '사람의 복경(福慶)'이라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여항의 부로(父老)를 칭송했다면 가능하겠지만 일국의 종사(宗師)를 칭송했다면 맞지 않습니다.
그 조예를 논함에 있어서 "농암(김창협)과 삼연(김창흡)의 여운을 연마하고, 미호(김원행)와 근재(박윤원)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갔다."주 53)라고 했으니, 이는 곧 공자와 주자의 단서와 율곡과 우암의 학통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 "전인의 옛것을 다 이어받고 본심의 편안함을 한결같이 따랐다"주 54)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 학문은 대부분 말과 귀로 들은 것이고, 그 행실은 단지 자기 마음의 편안함만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말이 이 지경에 이른 것만 해도 이미 너무 심한 것인데, 다시 말하기를 "관직에 나아가서는 임금을 요순같은 성군으로 만들고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공업을 이루지 못하고, 초야로 물러나서는 명아주와 콩잎 따는 것을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주 55)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보탬이 없었다는 뜻이니, 어찌 현자를 귀하게 여긴 것입니까?
또한 거기서 더 나아가 "계야(저부)의 춘추의리를 보존하여주 56) 건괘(乾卦) 초구(初九)의 상주 57)을 잘 살피고, 진(陳) 태구(大丘)주 58)의 도가 넓다[道廣]주 59)는 말을 품고서 쾌괘(夬卦)의 오효(五爻)에 대해 점을 쳤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마음으로 시비를 알아 감히 자신의 재주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음(陰)을 가까이하여 화를 면하면서 도가 넓다는 말에 비견하였으니, 이 또한 현자에게서 무엇을 취한 것입니까? 이리하여 매옹의 현명함은 땅에 떨어져 매몰되었고, 다시는 매옹의 본래면목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개 남의 제문에서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은 큰 악습이거늘 하물며 선생으로 호칭하고 문인이라 일컬으면서도 매옹에게 참으로 흠이 있는가 없는가의 실상을 논하지 않았으니, 김 씨의 문장은 실상을 말한 것인가요? 아니면 스승을 무고한 것인가요? 그 윤리와 상식을 어긴 것이 어찌 명교(名敎)를 어그러트린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미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매문(梅門)의 제현들이 현명하여 (김감역)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었고, 의리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 어찌 이 문장을 배척하여 물리치지 않고 묵묵히 수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제가 이 문제를 생각해보니, 무릇 친구가 의론함에 있어 잘못이 있고 행실에 실수가 있다면, (그 친구가) 살아있을 때는 질책하고 비난하는 등 모든 것을 다하는데, 이는 그가 반성하여 깨닫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친구가 죽은 뒤에는 그가 대답하여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없고, 또한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지각도 없으니 내버려두고 다시 말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오랜 친구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는 계율이 있었는데, 하물며 제전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낼 때 그가 무언무지(無言無知)하다 생각하고 멋대로 비난하고 조소한다면, 이것은 불인(不仁) 중에서도 심한 것입니다. 김 씨와 같은 행동은 스승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친구에게도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제가 생각해보니, 근세의 유림 중에서 간혹 결론 나지 않는 의론과 서로 대립하고 있는 사안으로 인하여 고하는 문장 속에서 비난하는 뜻을 붙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대단히 정의(情誼)도 없고 예의도 없는 행위이니, 어찌 '친구를 버리면 백성들이 투박하게 된다.'주 60)는 구덩이로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아마도 마땅히 경계할 일이지 본받을 일은 아닙니다. 만약 그 사람의 언행이 세교를 해칠만한 것이 있다면, 스스로 마땅히 훗날에 별도로 논해야 할 것이니 이런 생각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일찍이 여호(黎湖) 김령(金令)이 '김감역이 매산을 제사 지내면서 쓴 제문에서, 스승과 제자관계이면서 그 말이 이와 같을 수 있는가. 의심스럽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문장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한마디로 가부를 결단할 수 없었다. 이제 그 본문을 기록한 것을 보고, 또 고명한 그대가 변론한 여러 설을 보고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고 간담이 떨렸다. 보내온 편지에서 '매옹 문하의 제현이 어찌 이 문장을 배척하여 물리치지 않았는가.'라고 하니, 참으로 의문이 든다. 내가 전재(임헌회)선사를 수십 년 동안 섬겼지만 일찍이 선사가 김 씨의 뇌사에 대하여 온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한마디도 듣지 못했고, 숙재(조병덕)와 인산(仁山) 두 문하는 내가 일찍이 직접 만나보았지만 들은 것이 없었고, 입헌(한운성)과 오곡(홍용관)주 61)의 문자에서도 또한 그렇게 운운한 것을 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김 씨가 일찍이 치전(致奠)62)62) 치전(致奠) :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친족 및 사우 관계에 있는 자가 제물(祭物) 및 제문(祭文)을 가지고 찾아가서 조문하는 일을 뜻한다.
에서 스스로 이 뇌문을 짓지 않았는데, 문고(文稿)에는 올라간 것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받아서 상설(象設)의 아래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내가 젊었을 때 일찍이 교남(嶠南-영남)의 사류(士流)에게 '김평묵(金平黙)이 매산 문하를 배반한 졸개'라는 설이 있는 것을 들었는데, 어찌 이 사람 외에 또 패악스럽고 오만하며 불공한 죄를 저지른 자가 있단 말인가? 임석영(林奭榮)이 일찍이 김 씨가 지은〈임규직전(任圭直傳)〉을 보았는데 매산 문하에 대해 불손한 말이 있었고, 심운가(沈雲稼)가 또한 말하기를 '홍재구(洪在龜)가 늘 매옹을 헐뜯으니 심 씨 어른이 그를 '그대가 후생의 젊은이로서 감히 이처럼 한다면 이후에는 다시는 오지 말라.'라고 꾸짖었다.'라 하였다. 나는 홍 씨가 김 씨의 사위인데, 김 씨가 매옹에 대하여 존경하는 뜻이 있었다면 사위가 어찌 감히 이렇게 했을까 의심하였다. 이제 이 뇌사를 가지고 살펴보건대, 김 씨가 사론(士論)에 대하여 어찌 감히 억울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김 씨가 심운가가 자신을 질책하는 편지의 답서에서 또한 전재선사를 언급하면서 '명성과 지위가 크게 드러난 사람이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자헌과 좨주에 관한 말이다. 숙재의 상을 위로함에서는 또한 '나라의 불행이'라고 일컬었으니, 그 심기의 괴팍함이 원래 이와 같았다.】"
주석 50)옹수(擁篲)
존귀한 사람을 맞이할 때 비를 가지고 앞길을 쓸며 인도하여 경의(敬意)를 표하고 예절(禮節)을 다한다는 말. 《사기(史記)》 〈맹자순경전(孟子荀卿傳)〉에서 추자(騶子)가 연(燕)나라를 갔는데 소왕(昭王)이 빗자루를 가지고 선두에 서서 길을 쓸고 인도하여 맞이하고 그 제자들과 한자리에 앉아서 수업(受業)을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주석 51)추풍(趨風)
공경을 나타내기 위해 상대방의 앞을 바람처럼 빨리 지나가 지체하는 않는다는 뜻으로, 남의 풍채를 우러러봄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16년에 "극지(郤至)가 세 번 초왕(楚王)의 군졸을 만났는데 초왕을 보면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투구를 벗고 추풍했다.〔郤至三遇楚子之卒, 見楚子, 必下, 免冑而趨風.〕"라고 하였다.
주석 52)천작(天爵)
"천작이라는 것도 있고, 인작이라는 것도 있다. 인의충신과 선을 즐기면서 지겨워하지 않는 것이 천작이다. 공경대부는 인작이다. 옛날 사람들은 천작을 수양하면 인작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지금 사람들은 천작을 수양하면서 인작을 얻으려고 한다. 이미 인작을 얻고 나서 천작을 버린다면 미혹됨이 심한 사람이다. 결국에는 반드시 인작마저 잃어버릴 것이다.〔有天爵者, 有人爵者. 仁義忠信, 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 古之人, 修其天爵而人爵從之. 今之人, 修其天爵以要人爵. 旣得人爵, 而棄其天爵, 則惑之甚者也, 終亦必亡而已矣.〕"라는 말이 있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주석 53)농암……올라갔다
김평묵은 "농암과 삼연이 남긴 것을 연마하고 미호와 근재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갔다〔理農淵之餘韻, 泝渼近之的源〕"라고 하였다. 《중암집(重菴集)》 권45 〈제매산홍선생직필문(祭梅山洪先生直弼文)〉
주석 54)전인의……따랐다
김평묵은 "미언대의에 대해서는 모두 전인의 옛 것을 서술하고 권서의 작용에 대해서는 본심의 편안함을 한결같이 따랐습니다.〔微言大義, 咸述乎前人之舊; 而卷舒作用, 一循乎本心之安.〕"라고 하였다. 《중암집(重菴集)》 권45 〈제매산홍선생직필문(祭梅山洪先生直弼文)〉
주석 55)관직에……못하였다
김평묵은 "사군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찌 이와 같은 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관직에 나아가 낭묘에 있게 된다면 임금을 요순과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들어야 하고, 물러나 초야에 있게 된다면 마치 맹수가 산에 있어 명아주와 콩잎을 따러 오지 못하는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然士君子生斯世也, 豈容若是而已? 盖進而居廊廟之上, 則爲能使是君爲堯舜之君, 使是民爲堯舜之民, 退而處嵁嵓之下, 猶能如猛虎之在山也, 藜藿爲之不採.〕"라고 하였다. 《중암집(重菴集)》 45권 〈제매산홍선생직필문(祭梅山洪先生直弼文)〉 그리고 《한서(漢書)》 권77 〈개관요전(蓋寬饒傳)〉에도 "산에 맹수가 있으면 명아주와 콩잎도 따러 나오지 못하고, 나라에 충신이 있으면 간사한 자들이 일어나지 못한다.〔山有猛獸, 藜藿爲之不采; 國有忠臣, 奸邪爲之不起.〕"라고 하였다.
주석 56)계야(저부)의 춘추의리를 보존하여
진(晉) 나라 때 소준(蘇峻)을 평정한 공신으로 벼슬이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에 이른 저부(褚裒)의 자가 계야(季野)인데, 대신 환이(桓彛)가 일찍이 그를 지목하여 말하기를 "계야는 가죽 속에 《춘추(春秋)》가 있다.〔季野有皮裏春秋〕"라고 했던 데에서 기인한 말이다.
주석 57)건괘(乾卦) 초구(初九)
《주역(周易)》 〈건괘(乾卦)〉에서는 "초구는 잠겨있는 용이니, 쓰지 말라〔初九, 潛龍, 勿用.〕"라 했고, "잠겨있는 용이니 쓰지 말아야 함은 양이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潛龍勿用, 陽在下也.〕"라고 하였다.
주석 58)진태구(陳大丘)
후한(後漢) 말기의 명사 진식(陳寔)을 말한다. 그가 일찍이 태구현 장(太丘縣長)을 지냈기 때문에 진 태구라고 일컫게 되었다. 진식은 영천(潁川) 사람으로, 일찍이 당고(黨錮)의 화(禍)에 연루되었다가 사면되었다. 당시 천하에 권세를 떨치던 환관 장양(張讓)의 아버지가 죽어 영천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냈는데, 온 군(郡)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으나 명사(名士)들은 하나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장양이 매우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던 차에 진식이 홀로 가서 조문하였다. 나중에 조정에서 다시 당인(黨人)들을 모두 처벌하였으나 진식은 죽음을 면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62 〈진식열전(陳寔列傳)〉
주석 59)도가 넓다
〈취성정화병찬(聚星亭畫屛贊)〉에서 "아, 진자는 신령스런 산악이 빼어난 기운을 모아 낳았네. 글은 깊고 규범은 아름다우며 도는 넓고 마음은 공평하였네. 올곧은 행동과 공손한 말이 성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하여, 말거나 펼침이 나로부터 시작되었네. 거의 가함도 가하지 않음도 없었다고 말하리라. 몸을 바쳐 대중을 편안케 하고 환관에게 조문하여 나라를 온전케 하였네. 환하게 밝은 마음은 가을달이나 차가운 강바람과 같았네.〔猗歟陳子! 神嶽鍾英. 文淵範懿, 道廣心平. 危孫汙隆, 卷舒自我. 是曰庶幾, 無可不可. 獻身安衆, 弔竪全邦. 烱然方寸, 秋月寒江.〕"라고 하였던 것을 말한다.
주석 60)친구를……된다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서 "벗을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의 풍속이 야박해지지 않는다〔故舊不遺則民不偸.〕"라고 한 말에서 기인한 것이다.
주석 61)오곡(鳌谷)
매산 홍직필의 아들이다.
上艮齋先生 壬戌
金監役祭梅山文, 鈔來呈上, 覽詳焉。 以淺見見之, 其文之譏嘲梅翁, 殆無餘地。 蓋其劈頭資憲大夫成均館祭酒九字, 已是不好題目。 而下文位極賓師, 貴躋列卿公卿大夫, 擁篲趨風等輝煌鋪張之語, 皆所以結果劈頭題目也。 贊賢人君子, 而首以人爵之榮鋪張之, 則其無天爵之實可知矣。 遐壽偕老雖曰人之福慶, 以此而贊閭巷父老, 則可, 而贊一國之宗師, 則非也。 其論造詣, 則曰 : "理農淵之韻, 泝渼近之源," 則是未及與聞乎孔朱之緒栗尤之統矣。 曰"咸述乎前人之舊, 一循乎本心之安," 則是其學也, 多涉乎口耳之得, 其行也, 只從乎己心之安矣。 言至於此, 亦已甚矣, 乃復曰 : "進不能有君民之業, 退不止藜藿之採。" 是則一無補乎斯世也, 何所貴於賢者也。 又進而曰 : "存季野之春秋, 而觀象於乾初, 懷大丘之道廣而玩占於夬五," 則是心知是非而不敢自用, 比陰免禍而自擬道廣矣, 亦何所取於賢者也? 於是乎梅翁之賢, 剗地埋沒, 而不復得爲梅翁矣。 凡在他人祭文譏嘲已是惡習, 而況既號先生而稱門人, 則未論梅翁之有疵無疵。 金文之是實是誣? 其悖倫乘常, 爲得免名教之罪也? 此則既然矣。 所可疑者, 當時梅門諸賢, 明非不足於知言, 義非不嚴於尊師也, 何不斥退此文, 而泯默受之也。
小子因此而思之, 凡於朋友議論之差, 行己之失, 其生也規責譏諷, 無所不至者, 冀其有所省悟也。 及其已沒之後, 彼既不能答述而道逹己意, 又不能有知而領會人意, 則置之勿復道可也。 故古人有不道舊故之戒, 而況於設奠祭侑之時, 謂其無言無知, 恣意譏嘲, 則是不仁之甚者也。 若金氏之舉 則勿論於師, 於友更不可說也。 竊見近世儒林中, 亦或因未決之議, 相持之案, 有畧寓譏切之意於告文中者。 此於幽明閒, 非情非禮之大者, 而豈不歸於遺故民渝之科乎? 此恐在所當戒而不在當效也。 若其人之言之行, 有足以害世教, 則自當別論於他日也, 未知此意如何?
○ 先生答書曰 : "曾聞黎湖金令言'金監役祭梅山文, 既是師生而其言如此, 可疑也已。 然愚未曾見其文, 故無一辭可否之斷矣。 今承錄得本文, 而又有高明所辨諸說, 不覺心駭而膽掉也。 來書之謂梅門諸賢, 何不斤退此文者, 眞可疑也。 愚事全齊先師數十年, 未聞先師一言及於金誄之未安, 而肅齋仁山兩門, 愚嘗親及而無所聞, 立軒鰲谷文字, 亦未見其云云。 豈金未嘗致奠自撰此誄, 而載於文稿歟? 不然, 決非可受而侑奠於象設之之下者也。 愚少也曾聞嶠南士流, 有金平黙梅門叛卒之說, 豈此外又有悖慢不恭之罪歟? 林君奭榮曾見金所撰〈任氏圭直傳〉, 有不遜於梅門之語, 沈雲稼亦言洪在龜每詆毁梅翁, 沈丈叱之曰'君以後生少輩, 敢如是, 後勿復來,' 愚疑洪是金壻, 而金於梅翁, 有尊敬意, 則渠何敢乃爾? 今以此誄觀之, 金於士論, 何敢稱冤?【金答沈雲稼規之書, 亦言及全齊先師, 而曰'名位隆顯之人。' 今此所謂資憲祭酒。 及慰肅齊喪, 亦稱邦國不幸, 蓋其心氣之乘愎, 元來如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