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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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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재선생에게 올림(上艮齋先生 辛酉)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2.TXT.0012
간재선생에게 올림
제 생각으로는 변발(辮髮)과 지금의 머리를 깎은 모습이 비록 같지 않을지라도 오랑캐의 풍속인 것은 마찬가지이니, 두 개를 구분하여 좌우로 나눌 수 없습니다. 또 《고려사강목》과 《문헌비고》를 조사해보니, 모두 '충렬왕 4년 무인년에 모든 관리와 학생들로 하여금 머리를 깎게 했다.'주 38)고 하였고, '공민왕 23년 갑인년에 이마를 깎는 것을 금지했다.주 39)'고 하였습니다. 대개 고려의 풍속에 비록 변발이 있었지만 또한 이마까지 깎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주 40) 이는 포은(圃隱)선생이 태어나기 60년 전의 일입니다. 나라에는 이미 제도로 정해졌고 백성들에게는 풍속으로 굳어진 것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포은이 오랑캐의 풍속을 깊이 부끄러워했을지라도 어찌 홀로 옛 도로 되돌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애초부터 변란을 당하여 온통 도도하게 흘러간 것과는 매우 다르니, 그것을 허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오랑캐 풍속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중화의 풍속은 마땅히 존중해야 함을 그는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원나라를 끊고 명나라를 섬기는 의리를 세워서 오랑캐 의복을 혁신하여 중화의 복제를 따를 것을 요청했으니, 《춘추》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공에 어떠합니까. 어찌 그가 만세에 세운 존왕양이의 공은 버리고 단지 초년에 옛 제도를 따른 것을 가지고서, 오늘날 머리를 깎는 것이 아무런 해가 없다고 둘러댑니까. 미혹된 견해를 버리고 변발과 체두의 변론에 대하여 이러한 관점으로써 수정한다면 아마도 온당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태백(泰伯)이 머리를 깎은 것은 자신 스스로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것일 뿐 오랑캐 풍속을 따르기 위해서는 아니니, 모 씨가 (태백의 단발을) 인용할 것은 아닙니다. 그 편지에서 말한 "우중(虞仲)이 처음으로 단발한 사람이다."는 말도 반드시 그렇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주 41) 태백이 이윽고 관면(冠冕)주 42)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었으니, 이것은 중화의 풍속을 사용하여 오랑캐 풍속을 바꾼 것입니다. 우중은 단발을 하고 문신을 했는데, 이는 오랑캐 풍속에 물든 것입니다. 형이 선군(先君)을 위해서 여러 해 동안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예스럽게 만들었는데, 그 동생이 왕위를 계승하자 하루아침에 그와 반대로 하여 몸소 그 백성들을 거느리고 다시 오랑캐로 돌아가니, 그가 마음을 모질게 먹고서 이치를 훼손하며 전례(典禮)를 경솔하게 바꾸어서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을 크게도 파괴시켰습니다. 공자의 《춘추》 의리에 비춰보면 마땅히 엄히 배척해야 함에도 부족하거늘 어찌 청성(清聖)주 43)인 백이, 숙제와 나란히 일민(逸民)44)44) 일민(逸民) :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일민은 백이(伯夷), 숙제(叔齊)……유하혜(柳下惠), 소련(少連)이다." 하였으니, 학문과 덕행을 지니고서도 초야에 묻혀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으로 나열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망령되이 태백과 우중의 마음을 헤아려보건대, 그들은 왕위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득이하게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서 이제 자신들을 등용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니, 이 때문에 부득이하게 단발을 하고 문신을 하였습니다. 계력(季歴)이 이윽고 왕위에 오르자 다시 염려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오(句吳)주 45)의 임금이 되어서는 머리 자르고 문신하는 것을 버리고 관면을 썼으며 아울러 그 백성들의 풍속을 바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력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태백과 우중은 반드시 모두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관면을 쓰고 오랑캐 풍속을 바꿨을 때는 우중에게도 그런 공이 있었다고 인정을 해야 합니다.
주석 38)충렬왕……했다
충렬왕 4년(1278)에 나라 안에 영을 내려 머리를 깎고 원나라 의관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왕이 세자로 있을 때 변발(辮髮)에 호복(胡服) 차림을 하고 원나라에서 오자 국인(國人)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고려사(高麗史)》 권28 〈충렬왕세가(忠烈王世家)〉
주석 39)공민왕……금지했다
공민왕은 이연종의 말을 듣고 변발을 풀고 호복을 벗었으며, 이후 이를 금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6 〈공민왕(恭愍王)〉
주석 40)대개……아니었으니
원의 개체변발(開剃辮髮)의 영향으로 고려도 이러한 변발을 하였고, 청대에는 전체후변(前薙後辮)의 양식. 후창은 원래 변발이란 이마를 깎지 않는 것인데, 고려시대 변발은 이마까지 깎은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주석 41)우중이……없습니다
태백(泰伯)은 주나라 태왕 고공단보의 장남이다. 우중(=仲雍)은 태백의 동생이다. 고공단보는 셋째 계력(季歷)과 그의 아들 희창(姬昌)을 후계자로 세우려고 했다. 태백은 부친의 생각을 알고 동생인 우중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망쳐서 몸에 문신을 하고 단발을 했다.
주석 42)관면(冠冕)
옛날 임금이나 관리가 쓰던 모자인데, 이곳에서는 모자를 쓰는 관습으로 사용되었다.
주석 43)청성(淸聖)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 "백이는 성인 가운데 맑은 분이다.〔伯夷聖之淸者也〕"라는 말이 있다.
주석 45)구오(句吳)의 임금
태왕(太王)의 맏아들인 태백이 세운 나라이다. 계력(季歷)의 아들 창(昌)에게 나라를 사양하기 위하여 피(避)하여 형만(荊蠻)에 가서 나라를 세웠는데 구오(句吳)라 했다고 전해온다.
上艮齋先生 辛酉
竊意辮與剃形雖不同, 其爲夷狄之俗一也, 不可區分於二者, 而左右之也。 且按《麗史提綱》《文獻備考》, 皆云'忠烈王四年戊寅, 令百官學生皆剃頭', '恭愍王二十三年甲寅, 禁剃額,' 蓋麗俗雖則辮髪, 亦未嘗不剃其額也, 此在圃隱之生六十年前。 國有定制, 民有成俗者已久, 圃隱雖深恥胡俗, 安得獨反古道乎? 此與始初當變, 一轍滔滔者大異, 不足為累也, 惟其深知胡之可恥華之當尊也。 故建絕元事明之義, 請革胡服襲華制, 其春秋尊攘之功, 顧如何哉? 烏可舍却萬世尊攘之功, 只將初年之因仍舊制者, 誠成今日剃髮之無傷也乎? 迷見且置, 辮剃之辨, 添入此意, 修潤恐穩, 未知若何?
泰伯之斷髪, 爲其示不可用, 非爲從蠻俗也, 則固非某人之所當引用者。 至於它書所謂虞仲始斷髪者, 未信其必然。 泰伯既以冠冕, 易荊蠻, 則是用夏變夷也。 虞仲乃斷髪文身, 則是變於夷也。 兄爲先君, 積年盡心, 化民禮俗, 其弟嗣王, 一朝反之, 身率其民, 復歸於蠻, 則其忍心害理, 輕改典禮, 有壞華夷之分也, 大矣! 在孔子春秋之義, 宐其嚴斥之不暇, 何得與夷齊之清聖, 并列爲逸民乎? 區區妄測泰虞之心, 爲其避位也。 故不得已逃荊蠻, 爲其示不可用也。 故不得已斷髪文身。 至於季歴既即其位, 則無復可慮矣。 故爲句吳之君, 棄斷文而服冠冕, 幷易其民俗也。 然則季歴即位之前, 泰虞必俱爲斷文矣, 冠冕易蠻之時, 虞仲必與有其功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