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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재선생에게 올림(上艮齋先生 辛酉)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2.TXT.0011
간재선생에게 올림
한간(김한록)이 편찬한 《남당행장(南塘行狀)》을 일찍이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남당을) 지극히 추존하여 공자, 주자, 한유와 병칭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포중(浦中)의 제공(諸公)이 2백 년 동안 함께 전하는 말이니, 지산(김복한)이 이 문장을 작성하면서 어찌 반드시 (사실관계를) 정확히 따진 후에 완성을 했겠습니까? 또한 어찌 타인이 지적했다고 해서 견해를 바꾸었겠습니까? 다만 선생께서 이 사람에 대해서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여 도의(道義)로 교류하면서 격려하였으니, 침묵만 하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인데, (침묵하고 계시니) 충고의 도를 잃은 것은 분명합니다. 이 사람이 견해를 바꾸는 것을 비록 기필할 수는 없지만, 그 심사가 솔직하고 담백하니 분명 이것 때문에 옛 정의가 조금이라도 손상되지는 않을 것인데, 마음이 험악한 자가 옆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어찌 걱정거리가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께서 이 사람과 이제까지 좋은 교분을 오래도록 쌓아서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는데, 유독 이 일에 대해서만 옆 사람들의 험한 입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훗날에 공의(公議)를 면하기 어려울 것 같고, 아울러 다른 사람의 구설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아니 차라리 험한 구설을 받을지언정 공의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견해를 진술했는데도 다른 사람이 믿지 않는다면, 또한 그 자체로 자주 충고를 하면 이에 사이가 소원해진다는 경계주 36)가 있을 따름입니다. 저의 보잘 것 없는 견해는 이와 같으니, 삼가 헤아려 주십시오.
한간(寒澗)의 문장은 공론이 될 수 없고, 성구(김노동-김복한의 아들)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포고문을 지을 때는 반드시 그 부친에게 나아가 간해야 합니다. 그들 부자간처럼 자애와 효도로 서로 믿고 학문을 강론하여 서로 발전하는 경우는 세상에 드문 일입니다. 부자끼리 말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도 오히려 잘 듣지 않고 문장을 만들어 세상에 드러내었으니, 그 견고한 견해는 다른 사람이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자치강목(自治綱目)》의 서례(書例)를 조감하지는 못했지만, '관우(關羽)를 맞이하여 그를 목 베었다.'는 내용은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단 맹달(孟逹)의 죽음주 37)이 반드시 포상해야 할 것은 아니니, 그 책에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을 수정한다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재차 항복하고 싶었지만 위나라가 목을 벨까 두려워서 죽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 것에 대하여 그 정황을 상세하게 살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맹달이 정말로 이런 마음이 있었다면, 당초 위나라에 항복을 했을 때 조비(曹丕)의 총애를 받았으며, 조비와 함께 있을 때 위나라는 강하고 촉나라는 약하였는데 만약 한 마음으로 위나라를 섬겼다면 장차 부귀와 안락이 종신토록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연고로 마음이 편치 않아 제갈량과 편지를 주고받고서 강한 위나라를 버리고 약한 촉나라로 돌아오기를 도모하여【마음이 스스로 불안하여 제갈량과 편지를 주고받아서 촉나라에 돌아오길 도모했다는 것은 자치강목의 본문이다.】 스스로 죽음의 길을 취했겠습니까? 단지 그 양심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절조를 잃은 것을 후회하고 바른 길로 돌아가서 그 죄를 속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이 함락되던 날에 죽어 절개를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주자가 이 점에 대하여 어찌 고려하지 않고 걸핏하면 함부로 칭송했겠습니까? 《자치강목》의 서법과 발명(發明)은 모두 바름으로 돌아온 것을 찬미하면서 절개를 위해 죽었다는 것으로 단정을 하였지만, 이전 사람의 논의를 또한 어찌 확인한 바가 없겠습니까? 외람되게 이러한 말까지 하게 되었으니 황송하고 황송합니다.
체두(剃頭)에 얽매이지 않는 자를 기상이 큰 장자(長子)라고 한다면 죽음을 맹세하여 머리카락을 지키겠다는 자는 마땅히 그릇이 작은 비루한 선비가 됩니다. 제가 이에 한마디 올린다면, "나는 차라리 머리카락을 지키는 비루한 선비가 될지언정 머리를 깎은 장자는 되지 않겠습니다."라 하겠습니다.
주석 36)자주……경계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자유(子游)가 말하기를 "임금을 섬김에 자주 간하면 욕을 당하고, 붕우(朋友) 간에 자주 충고하면 소원해진다.〔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라고 하였다.
주석 37)맹달의 죽음
관우(關羽)의 원군 요청을 무시하여 관우가 죽자, 위나라에 항복해서 조비의 총애를 받아 신성(新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때 맹달은 촉을 배반한 척하였지만 실제로는 오(吳)와 연결하고 촉과 굳게 맺고서 중국(中國)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제갈량이 북벌을 시작하면 내응하기로 한 밀약이 탄로 나자, 다시 위나라를 배반하였고, 후에 사마의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上艮齋先生 辛酉
寒澗所撰《南塘行狀》, 曾得一見, 極其推重, 至以孔朱韓并稱矣。 此是浦中諸公二百年來共傳道之者, 志山之爲此文也, 豈必待講確而後成? 亦豈因人規改定見也? 但先生之於此令, 聲氣相求, 道義交勉, 其不可黙無一言, 有失忠告之道則明矣。 此令改見, 雖不可必, 其心事坦直, 必不因此而少替舊誼, 至於心險者之從傍惹閙, 安保其無虞也? 先生與此令, 今雅契已久, 魚雁相屬, 獨於此事, 畏傍人險口而不言, 則後之公議, 又似難免, 等不免人言, 無寧冒險口而畏公議耳。 陳我所見, 人不見信, 則又自有數斯疏之戒在焉爾。 淺見若此, 伏惟取裁。 澗文之不得爲公論, 聖九之意亦然。 告文之作也, 必進諫於其親矣。 以其慈孝交孚, 講學相長, 世所罕有之。 父子宐其言之易入也, 而猶不見聽, 成文出世, 其見之確, 非他人之所能回也。
綱目書例, 未及照動者, 如邀關羽斬之之類, 誠如下喻。 但謂孟逹之死, 非所當褒, 而其曰'死之'者, 恐合修改, 則不能無疑。 而其云欲再降, 而恐魏斬之, 不得以不死者, 未知深得其情否也。 使逹果有此心, 則當初之降魏也, 爲曹丕所寵, 至於同輦且魏強而蜀弱, 若一心事魏, 將富貴安樂而終身。 何苦而心不自安, 與亮通書, 舍強魏而謀歸其弱蜀【心不自安 與亮通書 謀歸蜀 綱目本文】,自取死亾之道哉? 惟其良心未死, 悔其失身, 欲反之正而贖其罪焉。 故城陷之日, 能殞身而立節也。 朱子於此豈無所聪, 動而濫褒之? 綱目書法與發明, 俱以美反正, 予死節斷之, 前人之論, 亦豈無所見哉? 僣易及此, 主臣主臣。
不拘剃頭者, 爲闊大長者, 則誓死保髪者, 當爲隘小陋儒矣。 小子於是有一言, 曰 : "吾則寧爲保髪之陋儒, 不願爲剃頭之長者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