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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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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재선생에게 올림(上艮齋先生 辛酉)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2.TXT.0010
간재선생에게 올림
기비(箕碑)와 임갈(林碣)의 변고에 대해서는 비록 일찍이 들었지만, 그 일이 어찌 선생을 이처럼 극도로 침범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문자로 말미암은 경계(警戒)를 일으켜서 앞으로 행할 일에 조심한다고 하시니 제가 감히 종신토록 가슴에 담아두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전에 차분히 생각해보니 사람을 위한 글을 마땅히 지어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 대상의 행적에) 거짓이 구름처럼 많고 속임이 산처럼 쌓여 살아서는 도척처럼 행동했는데 죽어서는 순임금처럼 만들어 바꾸려고 하는 자의 요구에 어떻게 응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위로는 대인(大人)의 순덕(純德)과 위업(偉業), 아래로는 필부의 기행과 고절(奇行苦節)에 대하여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의 생각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장을 지어주면서 허실을 따지지 않고 묘에 아부하거나 글을 부탁한 사람에게 아첨하면서 금과 비단을 요구하는 자에 대해서는 말할 가치도 없거니와 혹 이를 징계하여 일절 물리쳐서 훌륭한 실적(實蹟)마저 아울러 사라지게 한다면 또한 정도(正道)에 지나칠 듯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글을 짓지 말아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물리쳐야 하는데, 이는 마땅히 율곡선생이 김노천(김식)주 31)에게 한 것처럼 해야 하고, 지을만한 대상의 문장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양할 필요 없이 사리에 맞게 칭찬해야 하는데, 이는 마땅히 채옹(蔡邕)이 곽유도(郭有道)에게 한 것처럼 한다면 될 것입니다.주 32)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시호(諡號)에는 아름다운 시호가 있고 추악한 시호가 있습니다. 군자와 소인에 대해 같은 날에 시호를 의논하는 것이 군자에게는 꺼려야 할 것은 없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꺼려야 하는 것은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좋은 시호를 함께 뒤섞어 베푸는 것이니, 공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의론이 공정하지 않은 까닭은 악인이 나쁜 시호를 면하는 것이지 군자가 좋은 시호를 받는데 있지 않습니다. 저쪽에서는 진실로 불공정하다지만, 이쪽에서는 공정함을 해치지 않으니 무슨 꺼릴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시호에 대한 의론이 스스로 적배(賊輩)들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말을 하였다면, 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따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진실로 저 의론이 공정함을 얻었기 때문에 한나라 헌제와 명나라 의종의 시호가 조조란 도둑놈과 청나라 오랑캐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후세에 그것을 싫어한다는 말을 아직까지 듣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도적에게 아부하더라도 오히려 우리나라 신하'라고 말하니, 그 의론의 판단이 깊은 진심에서 나와 결정된 것이겠습니까?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정미년(丁未年)의 일주 33)을 모 어른처럼 선위(禪位)가 아니라고 한다면 구설(口舌)로 다투기 어렵습니다. 다만 전옹(임헌회)은 성덕(盛德)을 갖추고 있으니 어찌 시호가 있고 없음 때문에 덕에 증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그 자손이 공도(公道)가 없을 때 구차하게 시호를 청하니, 다른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뿐입니다.
맹자는 "이곳에 해자를 파고, 이곳에 성을 쌓아서 백성들과 지키다가 죽더라도 떠나지 말라."주 34)고 말하였고, 또한 "진실로 선을 한다면 후세자손에 반드시 왕자가 나올 것이다."주 35)라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유자들이 지금 시대에 의로움을 행할 때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굳건히 뜻과 절개를 세우는 것으로 성을 쌓고 의리를 깊게 만드는 것으로 해자를 삼으며 선성(先聖)의 도를 받드는 것으로 사직을 삼아 이 시대의 동지들과 함께 힘을 다해 지키다가 죽은 이후에 그만두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맥(脈)이 전해지게 되면 후세에 성인이 반드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확신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 외에는 결코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장성(長城)에 사는 김 모씨의 처는 정씨인데, 송강(정철)의 후손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밖에 나가 삭발했다는 말을 듣고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하녀로 하여금 삭발여부를 살펴보게 하니, 하녀가 돌아와 "삭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정씨는 이를 믿지 않고 남편이 외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다시 다른 하녀에게 가서 보게 하니 정말로 삭발하지 않았다. 이에 반찬과 밥을 성대하게 준비하여 남편이 내실로 들어오기를 청하여 친히 밥상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니 남편이 "어찌하여 이처럼 반찬이 성대하오."라고 물었다. 이에 정씨가 "우선 식사를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밥을 다 먹은 이후에 (정씨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금방 전 성대한 음식을 드린 것은 저를 살려준 은혜에 감사드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남편이 "무슨 말이오."라고 하니 정씨가 종이로 싼 물건을 남편에게 보여주며 "이것은 독약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삭발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면, 저는 차마 삭발한 남편을 섬길 수 없으니 이것을 먹고 죽으려 했습니다. 이제 다행히 삭발하지 않았으니 이는 저를 살린 것입니다. 감히 은혜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남편이 이 말을 듣고 감복하였다고 한다.
을미사변 때에 삭발한 자의 처가 간혹 자결했다고 들었지만, 수십 년 이래로 삭발하는 풍속이 이미 성대해져 부녀들이 삭발한 남편이나 스님 같은 사내를 익숙히 듣고 보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현부에게 이런 고견(高見)이 있어 자처한 의리가 바르고 다른 사람을 더욱 깊이 감동시키니 어찌 무성한 풀 속에 홀로 향기를 풍기며 많은 닭 속에서 한 마리 학 같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매우 기이하고 훌륭하기에 감히 알려드립니다.
주석 31)김식(金湜, 1482~1520)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이다. 자는 노천(老泉)이고, 호는 동천(東泉)·사서(沙西)·정우당(淨友堂)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부친은 김숙필(金叔弼)이고 모친은 사천목씨(泗川目氏)이다.
주석 32)채옹……것입니다
후한(後漢)때의 채옹(蔡邕)이 곽유도(郭有道)의 비문을 짓고 나서 노식(盧植)에게 "내가 비명을 많이 지었지만, 그때마다 모두 그 덕에 부끄러움이 있었으나 곽유도에 대해서만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吾爲碑銘多矣, 皆有慙德, 唯郭有道無愧色耳.〕"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68 〈곽태열전(郭太列傳)〉
주석 33)정미년(丁未年)의 일
1727년(영조 3년), 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당색이 온건한 인물로 인사를 개편한 정국으로 영조(英祖)는 당파심이 매우 강한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한다. 이를 계기로, 서인에서 분파한 소론(少論)은 실각하지만, 또 다른 서인인 노론(老論)은 계속 집권하게 되었다. 이 각주가 아니라 고종이 순종에게 선위한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간재가 살았던 정미년의 일을 찾아볼 것. 아마도 순종 이후에 시호가 내려졌는데, 순종이 선위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호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모 어른일 것이며..여기에서 시호 문제는 전제의 시호 문제인 듯.
주석 34)이곳에……말라
맹자는 "이 계책은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어이 말하라고 하신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못을 깊이 파며 성을 높이 쌓아 백성과 더불어 지켜서 백성들이 목숨을 바치고 떠나가지 않는다면 이것은 해볼 만한 일입니다〔是謀非吾所能及也. 無已, 則有一焉, 鑿斯池也, 築斯城也, 與民守之, 效死而民弗去, 則是可爲也.〕"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
주석 35)진실로……것이다
맹자는 "만일 선행을 하면 후세의 자손 중에 반드시 왕노릇 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군자는 기업을 창건하고 전통을 드리워서 계속할 수 있게 할뿐입니다. 성공으로 말하면 천운이니, 군주께서 저들에게 어찌하시겠습니까? 선행을 하기를 힘쓸 뿐입니다〔苟爲善, 後世子孫必有王者矣. 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 若夫成功, 則天也. 君如彼何哉? 强爲善而已矣.〕"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
上艮齋先生 辛酉
箕碑林碣之變, 曾雖聞之, 豈意其侵及先生而極也。 枉作文字之戒, 懲諸身歴, 出自心愛, 敢不服膺而終身? 竊嘗思之, 人家文字, 以爲當作, 則虛僞雲興, 溢誣山積, 生爲蹠行, 而死欲舜賛者, 其何以應之? 以爲不當作, 則上而大人之純德偉業, 下而匹夫之奇行苦節, 不有以記之, 孰得以知之? 故妄意以爲廣開文路, 不問虛實, 謏墓媚人, 討金索縑者, 固不足道, 其或懲此而一切辭絕, 并與實蹟之善而沒焉, 則恐亦過中也。 然則惡乎而可? 其不可作者, 則却之之嚴, 當如栗谷之於金老泉, 可作之文, 則不必終辭, 稱揚停當, 當如蔡邕之於郭有道, 則斯可矣。 未審先生以爲如何。
謚有美謚惡謚。 君子與小人, 同日議謚, 固無嫌於君子, 而所可嫌者, 不分善惡, 而混施美謚者, 爲不公之論也。 然其論之所以不公者, 在乎惡人之免惡謚, 不在乎君子之受美謚也。 在彼固爲不公, 在此自不害爲公, 又何嫌之有? 如以謚議之出, 自附賊輩爲說, 則又有可解者。 苟其議之得公, 以漢獻明毅之出自曹賊清盧, 後世未聞有嫌之者。 而况雖曰附賊尚是韓臣, 而其議之取裁, 自睿衷而決定者乎? 其不容有說於其閒也, 審矣。 若以丁未之事, 謂非禪位, 如某丈之言, 則有難以口舌爭也。 但在全翁盛德, 豈以節惠有無爲增損。 其子孫之區區請求於無公道之時, 正不滿人意耳。
孟子曰 : "鑿斯池也, 築斯城也, 與民守之效死而勿去。" 又曰 : "茍爲善, 後世子孫, 必有王者矣。" 竊以為吾儒今日處義, 亦當如此也。 堅立志節以爲城, 深造義理以爲池, 奉先聖之道以為社稷, 與并世同志者, 盡力而守之, 斃而後已。 茍一脈之有傳, 安知後世聖人之必不作耶? 如此之外, 了無可爲者耳。
長城金某妻鄭氏, 松江後。 聞其夫出外削髪, 俟其回, 使婢出觀其削否, 婢奔告曰 : "不削"。 鄭氏未信, 俟入外堂, 又使他婢往見, 果不削。 乃盛饌備飯, 請夫入內, 親舉案進前。 夫曰 : "胡爲饌盛若是。" 鄭氏曰 : "第飯之。" 飯后乃進而言曰 : "俄供盛餅謝活我恩也。" 夫曰 : "何謂?" 鄭氏以紙裹一物示夫, 曰 : "此毒藥也。 夫子果不免削髪, 則吾不忍事削髪之夫, 將服而死矣。 今幸不削, 是活我也, 敢不謝恩。" 其夫聞之感服云。 在昔乙未之變, 聞遭剃者之妻, 或有自死者矣。 數十年來 剃風已盛, 人家婦女習聞慣見髠夫僧郎, 曾不爲恥, 何幸賢婦有此高見, 自處之義既貞, 感人之術尤妙, 豈不是衆蕪孤芳羣鷄一鶴事? 甚奇絕, 敢以上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