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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재선생에게 올림(上艮齋先生 辛酉)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2.TXT.0008
간재선생에게 올림
《손우집(遜愚集)》주 19) 중에 후사를 세우는 설은 율곡(이이)의 주장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래 반편(半篇)이 비록 황찬규(黃瓚奎)에 의한 삭제를 면하지 못했지만,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에 대해 논의할 것이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설이 만약 친자를 적자로 삼고 계자(繼子)를 중자(衆子)로 삼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면 이는 진실로 따를 수 없지만, 친자가 제사를 받들고 계자(繼子)는 파양되어 본종(本宗)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 것이라면 이것이 어찌 의리에 어긋나겠습니까? 다만 이미 인종 때에 계자가 적자가 된다는 정해진 제도가 있었으니, 또한 감히 멋대로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리에 비춰 규명해보고 인정을 참조해보면 논의할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 남의 자식을 빼앗아서 자기 뒤를 잇게 하는 것이 어찌 부득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중대한 종사를 위하여 한 것일지라도 그 마음에는 응당 조금이나마 편안하기 어려운 점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 부친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아버지로 삼는 것은 자식으로서 큰 변고입니다. 비록 임금의 명령을 중시하여 그것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어찌 잠깐이라도 편하겠습니까? 만약 양자를 입적한 아버지가 다행히 아들을 두게 되면, 종사에 부탁은 바로 그 아들에 있습니다. 자기 마음의 편하기 어려움을 미루어 남의 자식의 편하지 못함을 체득한 뒤에 그로 하여금 원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하면 그 아버지는 아마도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왕에게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정해준 인간관계를 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옮겨 관계를 정해주는 것도 멋대로 하더라도, 임금이 양자를 들인 뒤에 친 아들을 본다면 사람이 정한 인간관계를 버리고 다시 천속(天屬)의 친함을 회복시켜 주는 것에 대해 어찌 꺼려서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계축년에 하교를 받은 것에는 진실로 잘못된 것이 있고, 인종이 정한 제도 또한 만세의 법전으로는 흠결이 있습니다. 만약 나라에 계자(繼子)로 후사를 세운 이후에 자식을 낳으면 계자를 돌려보낸다는 제도가 있다면, 이런 경우를 당한 자는 자초지종을 갖춰 임금에게 고하고 파양시켜 돌아가게 한다면 마음에 편안하지 않음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 문장에는 이에 관한 한 구절의 말이 없으니 명확하지도 않고 갖추어지지도 않은 것주 20)이 될 뿐입니다. 이것은 윤리의 큰 핵심이니 끝까지 강론해야 하며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람되게 이렇게 의심나는 것을 질의하니 삼가 바라건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잠깐 《문헌비고》를 보다가 철종 기유년의 예의조(禮儀條)를 보니, 매산(홍직필)의 전후 두 개 상소를 다 실었고, 또 좌상 김흥근과 우상 박영원 등 여러 공들의 의론과 후소(後疏)를 기록하였으며, 태묘에 부묘하는 것을 모두 바르게 고쳤습니다. 이 일은 바로 선생께서 말씀하신 이른바 "멀지 않아 회복된다"주 21)는 것입니다. 저는 비평가주 22)들이 종신(終身)의 허물을 많이 지은 것을 괴상하게 여겼는데, 이제 이 책에서 기록한 것을 보고 당시에 개정한 실상을 알게 되었으니 구름을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본 것처럼 상쾌하고, 또 조정의 문헌이 자못 공체(公體)를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종신토록 허물을 많이 지은 많은 사람들이 어찌 퇴옹(이황)이 잘못을 했다가 다시 고친 것을 듣지 못했겠는가?"
주석 19)《손우집(遜愚集)》
조선 후기 홍석(洪錫, 1604~1680)의 시문집이다. 홍석의 자는 공서(公敍)이고, 호는 만오(晩悟)·손우(遜愚)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부친은 홍경소(洪敬昭)이고 모친은 한완(韓浣)의 딸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이 문집은 3책 8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홍석의 아들 홍사효(洪思孝)가 편집하여 1933년에 간행하였다.
주석 20)명확하지도……않은 것
정자가 "성만을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않고, 기만을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분명하지가 않다. 이것을 둘로 하면 옳지 않다〔程子曰: "論性不論氣, 不備, 論氣不論性, 不明, 二之則不是.〕"고 한 말에서 기인한 말이다. 《왕문성전서(王文成全書)》 권2 〈전습록 중(傳習錄中)〉
주석 21)멀지 않아 회복된다
《주역(周易)》 〈복괘(復卦)〉에서는 "초구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와 후회에 이름이 없으니 크게 길하다〔初九, 不遠復, 无祗悔, 元吉.〕"라 했다. "멀지 않아 회복된다〔不遠而復〕."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며, 인종 때의 잘못된 일을 철종 때 바로잡았음을 의미한다.
주석 22)비평가
월조가는 월단평(月旦評)을 잘하는 사람으로, 곧 인물을 잘 품평하는 사람을 이른다. 월단(月旦)은 매월 초하루로, 후한(後漢) 때 여남(汝南) 사람인 허소(許劭)는 그의 형 정(靖)과 함께 당시에 명사로 이름이 났는데, 그 지방의 인물을 품평하기를 좋아하여 매월 초하루마다 품제(品題)를 바꾸었기에 여남 풍속에 월단평(月旦評)이 있게 되었다. 월단(月旦)을 월조(月朝)로 바꾼 것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이름이 단(旦)이므로 이를 휘(諱)하여 단(旦)을 조(早) 또는 조(朝)로 바꾸어 쓴 것이다
上艮齋先生 辛酉
《遜愚集》中, 立後說, 與栗谷議不同。 故下半篇, 雖不免黃瓚奎刪籖, 然淺見不無商量者存。 此說若謂以親子爲嫡, 繼子爲衆, 則固不可從, 乃謂以親子奉祀, 繼子則罷歸本宗也, 是何嘗悖義乎? 但既有仁廟繼子爲嫡之定制, 則又有不敢擅行者也。 然究之天理, 參之人情, 終有可議者。 蓋奪人子而繼己後, 豈非不得已之事乎? 雖則爲宗事之重而爲之, 其心應有些難安者矣。 捨其父而父他人, 人之子大變。 雖則重君命而聽之, 其心何嘗須臾寧乎? 使其所後父, 幸而有子, 則宗事之託, 在是矣。 推己心之難安, 體人子之不寧, 使之歸父, 其父恐爲得當也。 至於王者, 則有代天理物之道。 故割天定之倫, 移定他人, 亦且任爲, 則其於罷人定之倫, 而復續天屬之親, 何憚而不爲乎? 然則癸丑受教, 誠有所失, 而仁廟定制, 亦欠萬世之典也。 若使國家有立後後生子, 還歸繼子之定制, 則遭其事者, 具由告君而罷遣, 似無未安。 而本文中, 少此一節, 是爲不明不備處耳。 此係倫紀大綱, 恐宜講到極致, 而不容放過者。 故猥此質疑, 伏乞垂察。
俄閱文獻備考, 見哲宗已酉禮儀條, 備載梅山前後二疏, 又錄左相金興根右相朴永元諸公議與後疏, 同改正於祔太廟時, 蓋先生此事正所謂不遠而復者。 竊怪夫月朝家之多作終身之累也, 今見此書所錄, 益知當日改正之實, 既喜披雲覩青之快。 又以見朝家文獻之自不失公軆也
○ 先生答書曰 : "諸家多作終身之累者, 豈不聞退翁既誤又改之蹟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