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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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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재선생에게 올림(上艮齋先生 庚申)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2.TXT.0002
간재선생에게 올림
추성(鄒聖, 맹자)의 큰 공을 기록한 한 편주 3)의 선생의 작품이 지령(知令)에게 의혹을 받았기에 일전에 질문을 드렸는데 그만 다급히 서두르다가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마침 지령에게서 편지가 왔기에 그에 대해 답장을 하면서 저의 좁은 소견으로 헤아려 본 것을 대략 기술하여 보냈습니다. 다만 선생의 이 작품을 지난해에 한번 훑어보았기 때문에 까마득하여 문맥을 기억하지 못하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다만 《맹자》의 '풍년 든 해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게으르다.[富歲子弟多賴]'는 장(章)주 4)의 '성인은 먼저 우리 마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깨쳤다.'는 한 구절을 들어 마음이 착하다[心善]는 제목을 달아서 맹자의 공이 다만 성이 선하다는 가르침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이 착하다고 논한 것에도 있다는 선생의 의도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거칠고 소략하여 맹자의 본지와 선생의 의도를 잃어버렸습니다. 얼마 지나 우연히 《맹자》의 그 장주 5)을 꺼내어 반복해서 읽어보니, 다섯 번째 절(節) 대문의 "그 본성이 사람과 다르다."는 구와 세 번 째 절(節)의 《집주》에 "그 본성이 선한 것은 같지 않음이 없다."주 6)는 말 등은 분명 성이 선한 것을 주로 말하였으니, 지령(知令)이 심선(心善)이라 한 선생의 의도를 의심할 만합니다.
다만 사람마다 입은 좋아하는 바가 똑같고 귀는 좋은 소리를 듣는 바가 똑같으며 눈은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는 바가 똑같고 마음도 똑같다는 것을 열거한 뒤에 이어서 또 "성인은 먼저 우리 마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깨쳤다."라 하였으니, 어찌 내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같음을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이미 성인과 같다면 어찌 심선(心善)을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대문과 《집주》에 심선(心善)이라는 두 글자가 없다는 이유로 다만 성선(性善)은 말할 수 있고 심선(心善)은 금하여 말할 수 없단 말입니까.
제가 이 장의 본지(本旨)를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의 마음이 의리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인성이 모두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이는 마치 사단(四端)을 보고서 사성(四性)이 있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성이 선한 것은 체(體)가 되어 마음에 갖춰져 있고, 마음이 선한 것은 용(用)이 되어서 성을 발현하니, 하나는 체가 되고 하나는 용이 되어 결과적으로는 둘 다 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성은 형상도 없고 작위도 없기[無形無爲] 때문에 사람이 만사(萬事)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모두 마음[心]에 달려 있습니다. 학자가 만약 성이 선할 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선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 마음을 중하게 여겨서 물욕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심선(心善)의 학설이 후대에 큰 공이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대개 맹자가 성선을 논한 것은 하늘에 떠 있는 해와 같아서 그 큰 공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이 장에 이르러 심선(心善)이라 말한 것도 또한 큰 공이 되는데, 이에 대해 말하는 자가 없기에 이처럼 말하였으니 참으로 그것을 드러내어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선생의 의도가 어찌 이에 있지 않겠습니까. 다만 제가 지산(志山)에게 준 편지에서 맹자의 본지를 살피지 못하고 성선과 심선이란 두 가지로 개괄하여 설명하였으니, 자못 빈주(賓主)의 구분을 잃었습니다. 언설의 거칠고 소략함이 참으로 이전에 염려했던 것과 같게 되었으니, 이것이 후회스러운 일입니다.
○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맹자가 심선(心善)을 말한 큰 공을 지령(志令)이 의심하였는데, 다만 얕은 나의 견해에 근거하여 말을 한다면 의리는 진실로 리로서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은 리가 아니다. 리는 선한 것인데 심 또한 그렇다면, 어찌 선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이 심은 물욕에 한 번 빠지면 때때로 리를 가리켜 불선하다고 생각하고, 리가 아닌 것을 선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리는 '순선(純善)하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심은 다만 '본래 선하다.[本善]'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순(純)과 본(本)의 차이에 따라 리와 기를 분별한다. 성과 심을 합하여 말할 때는 성선(性善)이 주인이 되고, 심선(心善)은 손님이 된다. 만약 각각 따로 나누어 두 개의 선함을 논한다면, 빈주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정자(程子)의 편지에서 심선을 말했고, 《대학》 전7장주 7)과《대학혹문》,주 8) 《주자대전》 〈답정정사서(答程正思書)〉주 9)에서 모두 심의 바름[正]을 분명하게 말하였다. 불가에서는 심선을 말하면서 본말을 구분하지 않고 이를 뭉뚱그려 지선(至善)이라고 말하니 다만 이는 성은 제쳐두고 마음만을 믿는 것이다. 육씨(육구연)가 양경중(楊敬仲)을 대했을 때 '나는 단지 이 마음을 믿는다.'라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큰 잘못이다."
주석 3)추성의……한 편
《간재집(艮齋集)전편》 권15 잡저의 〈기추성대공(記鄒聖大功)〉을 가리킨다.
주석 4)풍년……장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7장을 말한다. 맹자는 "풍년에는 자제들이 의뢰함이 많고, 흉년에는 자제들이 포악함이 많으니, 하늘이 재주를 내림이 이와 같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빠뜨리는 것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모맥을 파종하고 씨앗을 덮되 그 땅이 똑같으며 심는 시기가 똑같으면, 발연히 싹이 나와서 일지의 때에 이르러 모두 익으니, 비록 똑같이 않음이 있지만 이것은 땅에 비옥함과 척박함의 차이가 있으며, 우로의 배양과 사람이 경작하는 일에 똑같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류인 것은 대부분 서로 같으니, 어찌 홀로 사람에 이르러서만 의심하겠는가? 성인도 나와 동류이다. 그러므로 용자는 발을 알지 못하고 신을 만들더라도 내가 그 삼태기를 만들지 않을 줄은 안다고 하였으니, 신이 서로 비슷함은 천하의 발이 같기 때문이다. 입이 맛에 있어서 즐김을 똑같이 함이 있으니, 역아는 먼저 우리 입이 즐기는 것을 안 자이다. 가령 입이 맛에 있어서 그 성이 남과 다름이 마치 개와 말이 우리와 동류가 아닌 것처럼 다르다면, 천하가 어찌 맛을 즐기기를 모두 역아가 조리한 맛을 따르듯이 하겠는가? 맛에 이르러서는 천하가 역아가 되기를 기약하니, 이것은 천하의 입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귀에 있어서도 그러하니, 소리에 있어서는 천하가 사광이 되기를 기약하니, 이것은 천하의 귀가 서로 같기 때문이다. 눈에 있어서도 그러하니, 자도에 있어서 천하가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으니, 자도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눈이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입이 맛에 있어서 똑같이 즐김이 있고, 귀가 소리에 있어서 똑같이 들음이 있으며, 눈이 색에 있어서 똑같이 아름답게 여김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마음에 이르러서만 홀로 똑같이 옳게 여기는 것이 없겠는가? 마음에 똑같이 옮게 여기는 것은 어떤 것인가? 리이며 의이다. 성인은 우리 마음이 똑같이 옳게 여기는 것을 먼저 아셨다. 그러므로 리와 의가 우리 마음에 기쁨은 추환이 우리 입에 좋은 것과 같다.〔孟子曰, "富歲, 子弟多賴, 凶歲, 子弟多暴, 非天之降才爾殊也, 其所以陷溺其心者然也. 今夫麰麥, 播種而耰之, 其地同, 樹之時又同, 浡然而生, 至於日至之時, 皆熟矣. 雖有不同, 則地有肥磽, 雨露之養·人事之不齊也. 故凡同類者, 擧相似也, 何獨至於人而疑之? 聖人, 與我同類者. 故龍子曰, '不知足而爲屨, 我知其不爲簣也.' 屨之相似, 天下之足同也. 口之於味, 有同耆也, 易牙先得我口之所耆者也. 如使口之於味也, 其性與人殊, 若犬馬之與我不同類也, 則天下何耆皆從易牙之於味也. 至於味, 天下期於易牙, 是天下之口相似也. 惟耳亦然. 至於聲, 天下期於師曠, 是天下之耳相似也. 惟目亦然. 至於子都, 天下莫不知其姣也. 不知子都之姣者, 無目者也. 故曰, 口之於味也, 有同耆焉, 耳之於聲也, 有同聽焉, 目之於色也, 有同美焉. 至於心, 獨無所同然乎? 心之所同然者何也? 謂理也, 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 했다.
주석 5)《맹자(孟子)》의 그 장
앞에 거론한 장을 뜻한다.
주석 6)그……없다
《맹자(孟子)》 〈고자상(告子上)〉의 "성인도 나와 동류이다.〔聖人, 與我同類者.〕"에 대해 《집주》에서는 "성인 또한 사람이니, 그 성의 선함이 같지 않음이 없다.〔聖人亦人耳, 其性之善, 無不同也.〕"를 가리킨다.
주석 7)《대학(大學)》 전7장
《대학(大學)》 전7장에서는 "이른바 몸을 닦음이 그 마음을 바룸에 있다는 것은 마음에 분치(忿懥)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공구(恐懼)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우환(憂患)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일러 '몸을 닦음이 그 마음을 바룸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此謂修身在正其心."라 했다.
주석 8)《대학혹문(大學或問)》
혹자가 "사람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본래 이로써 사물에 응하는 것인데, 이 장의 전문에서는 기쁨·성냄·근심·두려운 바가 있으면 곧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이라는 것은 분명 고목처럼 다시 살아날 수 없고 꺼진 재처럼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처럼 된 뒤에야 그 바름을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까?〔或問: "人之有心, 本以應物, 而此章之傳以爲有所喜怒憂懼, 便爲不得其正, 然則其爲心也. 必如槁木之不復生, 死灰之不復然, 乃爲得其正耶?〕"라 하자 주자는 "사람의 마음이 거울이 비어 있는 것과 같고 저울대가 평평한 것과 같이 맑고 허명(虛明)하여 몸의 주인이 되는 것은 참으로 진체(眞體)의 본연이지만, 희로우구(喜怒憂懼)가 감촉에 따라 응하고 미추(美醜)와 부앙(俯仰)이 사물에 따라 형체를 부여받는 것은 또한 그 작용에 있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응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 본체가 거울이 비어 있고 저울대가 평평한 것처럼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정(靜)한 상태이기에 비록 귀신이라도 그때를 엿보지 못함이 있다. 그리고 사물에 감응할 때에 감응하는 것이 또 모두 절도에 맞으면 거울이 비어 있고 저울대가 평평한 것과 같은 작용이 막힘없이 유행하여 광명정대(光明正大)하다. 이것이 바로 천하의 공통된 도가 된 이유이니 또한 어찌 바름을 얻지 못함이 있겠는가? 다만 사물이 왔을 때에 제대로 살피지 못함이 있으면 응함에 있어 혹 잘못이 없을 수 없다. 또 함께 가지 않을 수 없다면 희로우구가 반드시 마음속에서 동하게 되어, 이 마음의 작용이 비로소 바름을 얻지 못함이 있게 된다.〔人之一心, 湛然虛明, 如鑑之空, 如衡之平, 以爲一身之主者, 固其眞體之本然, 而喜怒憂懼, 隨感而應, 姸蚩俯仰, 因物賦形者, 亦其用之所不能無者也. 故其未感之時, 至虛至靜, 所謂鑑空衡平之體, 雖鬼神有不得窺其際者, 固無得失之可議; 及其感物之際, 而所應者, 又皆中節, 則其鑑空衡平之用, 流行不滯, 正大光明, 是乃所以爲天下之達道, 亦何不得其正之法哉? 唯其事物之來, 有所不察, 應之旣或不能無失, 且又不能不與俱往, 則其喜怒憂懼, 必有動乎中者, 而此心之用, 始有不得其正者耳.〕"라 했다.
주석 9)《주자대전(朱子大全)》 〈답정정사서(答程正思書)〉
정사가가 "마음에 대해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 때가 없고 그 향하는 바를 알 수 없다(出入無時, 莫知其鄕處.)"라 하자 주자는 "마음을 논한 것은 이것은 마음의 본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진실로 이와 같다면 이 본체 외에 별도로 하나의 부차적으로 일을 하는 정해지지 않은 마음이 있어서, 공자와 맹자가 사람들에게 그 본체를 버리고 이것이 지시하는 것에 나아가 공부를 하도록 한 것이 되는데 어찌 그러하겠습니까? 이것은 해석의 잘못이 아니라 본원처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함영·존양의 바탕이 없으므로 이와 같게 되 것이니, 다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但論心處以爲此非心之本體, 若果如此, 則是本體之外別有一副走作不定之心, 而孔孟敎人却舍其本體而就此指示, 令做工夫, 何耶? 此等處非解釋之誤, 乃是本原處見得未明, 無箇涵泳存養田地, 所以如此, 更願察之也.〕"라 했다. 《주자대전(朱子大全)》 〈답정정사(答程正思)〉
上艮齋先生 庚申
尊稿記鄒聖大功一篇, 爲志令所疑, 向既提稟而卒卒未及承誨而歸。 歸則適自志令有書, 因其修謝, 畧寫揣測于管見者送去。 但尊稿此記, 年前一覽, 而茫不記語脈, 如何? 只據孟子富歲子弟多賴章'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一段, 爲心善之題目, 以明孟子之功, 不但在性善之訓, 而亦在心善之論之意。 然恐其鹵莽踈綻, 有失孟子之旨先生之意。 俄者, 偶出孟子本章, 反覆之, 則第五節大文, "其性與人殊"之句, 第三節《集註》"其性之善無不同也"之語, 果皆主性善說, 而有如志令之所疑者。 但其歴舉口之同嗜, 耳之同聽, 目之同美, 心之同然, 而繼之又曰, "聖人先得我心之所同", 則豈非我心同於聖人心之謂乎? 心即與聖人同, 則豈非心善之謂乎? 烏可以大文與《集註》無心善二字, 只得言性善而禁不言心善乎? 竊詳此章本旨, 蓋以人心之無不悅理義, 以證人性之皆善, 如見四端而知有其四性也。 性之善爲體而具乎心, 心之善爲用而發乎性, 一體一用, 究非二善也? 蓋性者無形無爲, 人之酬酢萬變, 皆在於心。 學者若知不但性之爲善而心之亦善, 則豈敢不自重其心, 而不欲陷溺於物欲乎? 此之謂心善之說大有功於後世也。 夫孟子之論性善, 如日中天, 其爲大功, 固不須言。 至於此章, 心善說之, 亦爲大功, 無有道之者。 故此記云云, 正欲表而出之也。 先生之意, 豈不在此乎? 但小子與志山書, 有不察於孟子本旨, 槩以性善心善兩下說去, 殊失賓主之分。 其爲鹵疎, 果有如向之所虞者, 是可悔也。
○ 先生答書曰 : "孟子言心善大功, 志令疑之, 但據淺見言之, 理義固是理也, 其人人之同以爲然者。 却是心, 不是理也。 夫理是善底, 而心以爲然, 亦豈非善底? 但此心一經陷溺之後, 又往往指理爲不善, 非理爲善, 故理可曰'純善', 心但可曰'本善'。 只純與本之間, 理與氣之分也。 性心之合言時, 性之善固爲主, 心之善固爲賓。 若各論二者之善, 又不須分賓主。 程書言心善,《大學》傳七章,《或問》《大全》〈答程正思書〉, 皆明言心之正。 若乃釋氏之言心善, 不分本末, 槩謂之至善, 惟此心之是信。 陸氏之對楊敬仲言, '某只是信箇心,' 此却大誤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