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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재선생에게 올려 정세영(鄭世永)의 편지를 논함(上艮齋先生論鄭世永書 甲寅)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1.TXT.0012
간재선생에게 올려 정세영(鄭世永)의 편지를 논함
정세영의 편지에 부표(付標)주 34)한 부분은 가르쳐주신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조목들에 감히 의거하여 그대로 대충 베껴 쓴 데서 벗어나지 않으니 어찌 감히 진본(眞本)의 뜻을 잃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저는 매번 《중용》 서문을 읽을 때마다 높은 재주와 참된 공부를 바탕으로 오묘한 비결을 익히 들었을 정자(程子)의 문인들로서도 그 스승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사상에 빠진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 문하의 제자들이 모두 선생 평생의 정묘(精妙)한 깨달음에서 나오는 가르침을 실컷 배웠을 터인데도 간혹 행실을 닦으며 궤장(几杖)을 받드는 날에 감히 다른 주장을 펴는 자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에 정자 문인들은 족히 이상하게 여길 만하지 않고 지금의 제자들이 그보다 더욱 이상하게 여겨질 만함을 알았습니다. 저는 항상 동문(同門)들에게 "우리들이 존양성찰(存養省察)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공부는 본래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지 정히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심성(心性)을 담론하는 본원(本源)의 정미(精微)한 곳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사문(師門)의 학설을 따른다면 후세에 영원토록 전하여도 폐단이 없을 것인데, 어찌 힘들게 억지로 스스로 다른 이론을 세워서 무한한 번뇌를 생기게 하는가."라고 했습니다. 율곡선생(栗谷先生 이이(李珥))은 "다행히도 주자 뒤에 태어나서, 학문이 거의 잘못되지 않게 되었다."주 35)고 하셨는데, 저는 감히 이 말을 이어서 "다행히도 간옹(艮翁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나와 성리설(性理說)이 거의 잘못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정세영의 편지에서는 정명도(程明道)가 말한 '타고난 것을 성(性)이라고 한다[生之謂性]'주 36)는 것을 기질지성(氣質之性)주 37)으로 여겼는데 선생께서 수십 년간 연구한 본연지성(本然之性)주 38)의 정론(定論)과 상반됩니다. 생각건대, 그가 정밀히 연구하고 힘써 사색하여 필시 자득한 실제가 있어서 의문을 질정하고 선생께 나아가 바로잡으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일부러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만들어 선생과 다르게 하고자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거친 사유와 얕은 견해를 가진 저와 같은 경우는 성리(性理)에 대해 함께 논하기에 부족합니다만, 선생께서 평소 논의하신 대강의 종지는 거칠게나마 이해하였습니다. 이제 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설들 가운데 그 본뜻에 어긋나는 것 및 그 자신의 말 가운데 타당하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아래에 조목조목 나열해보겠습니다.


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정자(程子)가 "성(性) 자는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
《중용집략(中庸輯略)》을 살펴보면, 이것은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말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천(伊川 정이(程頤))이 말한 것으로, 바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이천이 말한 '생지위성(生之謂性)'이 기질지성으로 말한 것이고 명도가 말한 '생지위성'이 본연지성으로 말한 것이라는 점은 본래 서로 상충되지 않는데 어찌하여 저 말을 인용하여 이 말을 증명한단 말입니까? 또《정씨유서(程氏遺書)》를 살펴보면, 명도가 "천지의 위대한 덕은 생(生)이다. 천지의 두 기운이 얽히고 설켜 만물이 생성된다. 타고난 것을 성이라 말한다. 이 원(元)이라는 것은 선(善)의 으뜸이고 이것이 이른바 인(仁)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장과 서로 표리를 이루는데 이미 '원이라는 것은 선의 으뜸이다'라고 하고 다시 '이것이 이른바 인이다'라고 했다면, 이 역시 본연지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주자가 말한 "명도가 말한 이 장(章)의 성(性) 자는 기질 중에 타재주 39)한 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도 있고, 본연의 지극한 선을 가리켜 말한 것도 있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타고난 것을 성이라고 하는 것(生之謂性)', '재(才)를 성이라고 말하는 것(才說性)' 등에서 성 자는 기질 중에 타재한 것을 말한 것으로, 이는 이미 순수한 본연의 성이 아닙니다. 성 자는 본원의 지선(至善)을 말한 것인데, 이제 기질 중에 타재한 것은 기질지성이라고 하고, 본원의 지선한 것은 본연지성이라고 합니다. 그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타(墮) 자를 잘못 보았기 때문에 본래의 취지를 상실한 것 같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은 리이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성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늘은 높고 사람은 아래이다는 것을 근거로 말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墮)라는 한 글자는 어세가 자연스러워서 빛나는 상제가 아래 백성들에게 충심을 내려주었다는 강(降) 자와 동일한 뜻으로, 깨끗하고 깨끗한 것이 혼탁하고 더러운 가운데 떨어졌다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타(墮) 자 때문에 억지로 기질지성이라고 한다면 정자와 주자가 성(性)을 말한 곳곳마다 서로 장애가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논하지 않고 상제가 충심(衷心)을 내려주었다는 충을 본연의 성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주자가 서자융에게 답한 편지에 "기질지성은 단지 이 성(性)이 기질 속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기질을 따라 자체적으로 하나의 성이 된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기질지성을 논한 것이고 또한 '타(墮)' 자가 있으니, 정세영 편지의 증거가 될 만한 듯합니다. 그러나 그 문세(文勢)를 살펴보건대, 크게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개 기질지성이 기질성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기질에 떨어진다는 타(墮) 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질을 따른다는 수(隋) 자에 있습니다. 이 두 구 사이에는 별도로 고(故) 자 하나를 써서 한번 국면을 전환하여 매우 힘 있게 하였습니다. 주자의 뜻은 기질 속에 떨어진 본연지성이 있기 때문에 기질을 따르는 기질지성이 있다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주자가 말한 이 장 내의 기질에 떨어져 있다는 것은 마땅히 본연지성으로 간주해야 하고, 본원지선이라는 것은 마땅히 본원지선의 리로 보아야 하는 것이 어찌 명백하지 않겠습니까?


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주자가 "장횡거(張橫渠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형(形) 이후에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있으니 이를 잘 돌이키면 천지지성(天地之性)이 있게 된다'라고 했는데 이 두 개의 성(性) 자를 가져다 '생지위성(生之謂性)' 이하로 무릇 성을 말한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천지지성이고 어느 것이 기질지성인지 분별해 보면 (그 이치가 자명할 것입니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
이 부분은 정말로 정세영의 편지에서 주장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생지위성'의 해석을 놓고 명도와 이천이 서로 차이가 있으니, 주자의 이 설은 명도의 설을 가리키는 것인지 이천의 설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만약 정말로 명도의 설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그것이 주자의 초년설(初年說)인지 만년설(晩年說)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어찌 이 한 단락만 붙잡고서 주자의 여러 설을 다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율옹(栗翁 이이(李珥))이 말한 "주자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타고난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율옹의 설이 정말로 정세영이 인용한 바와 같다면 이는 참으로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스러운 의리(義理)를 놓고 입론(立論)의 주요 의미의 소재에 착안하여 연구하지 않고, 해석한 설들의 정조(精粗)를 가져다 취사(取捨)하지 않고서, 오로지 선현의 설들 중에 자기 견해와 맞는 것만을 증거로 삼는다면, 율옹의 설만 이와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 후의 선현 가운데 혹은 본연지성을 주장하는 이가 있기도 하고 혹은 기질지성을 주장하는 이가 있기도 하며 주자 역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두 설이 있으니, 이 둘 사이에서 각각 한쪽만 잡고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을 알지 못한다면 끝내는 정론(定論)이 있을 날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먼저 입론의 본뜻을 가져와 공평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지혜로운 눈으로 투철히 볼 수 있다면 무릇 선현들의 여러 설의 동이(同異)와 정조(精粗)를 눈앞에서 훤히 알게 되어 저절로 기질지성은 버려야 할 것이고, 본연지성은 따라야 할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정세영이 인용한 주자가 말한 "기질지성(氣質之性)은 태극(太極)의 전체가 기질 속에 떨어져 있는 것이지 따로 하나의 성(性)이 있는 것은 아니다."와 율옹(栗翁 이이(李珥))이 말한 "기질지성은 실로 본연지성(本然之性)이 기질에 있는 것이고 두 개의 성이 아니다."라는 것에 대하여:
주자께서 이를 말씀하신 것은 〈엄시형에게 답한 편지[答嚴時亨書]〉에서인데 거기에는 '기(氣)' 자 앞에 '단론(但論)' 두 글자가 있고, '성(性)' 자 뒤에 '즉차(則此)' 두 글자가 있습니다. 그 뜻은 기질지성 속에 태극의 전체가 있다고 말했을 뿐이지 태극이 기질 속에 있으면 기질지성이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율옹이 운운한 것으로 말하자면, 이 역시 다만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입니다.주 40) 어찌 정세영의 말처럼 성이 기 속에 있으면 바로 기질의 성이 된다고 직설적으로 말한 적이 있겠습니까?


정세영의 편지에서 말한 "기질을 끼고 있는 것을 기질지성이라 명명하고, 기질을 끼고 있지 않은 것을 본연지성이라 말한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정세영 편지에 수록된 내용은 수백 가지의 말이지만, 그가 말한 핵심을 총괄해보면, 다음 두 구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자가 성을 논함에 기질을 띠고 있다는 등과 성을 말한 것이 한두 가지일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대략 여기에서 몇 조목만을 들어서 기질을 끼고 있는 것을 곧바로 기질성이라 말할 수 없고, 본연지성은 기질에 일찍이 끼어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주자어류》의 〈정가학록(鄭可學錄)〉에서 "사람이 태어나 고요하더라도【살펴보건대, 이것은 천지의 성이다】 이미 형기를 끼고 있는 것이어서 오로지 성만을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가학록〉에서 "태극이라 말하자마자 즉시 음양을 끼고 있고, 성이라고 말하자마자 기를 끼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지록(砥錄)〉에서는 "성은 태극과 같고, 심은 음양과 같으며, 태극은 단지 음양 속에 있고, 음양을 떠나지 않는다. 성과 심도 그러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탕영록(湯泳錄)〉에서는 "사람들이 성을 말함에 있어서 그것을 계승한 것이 선하다고 하였는데, 이때도 기질을 함께 갖추고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단몽록(端蒙錄)〉에서는 "《역》에서는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기(氣)와 질(質)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허(虛)와 기(氣)가 합하면 성이라는 이름이 있게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일 정세영의 말처럼 이해한다면, 이상의 여러 조목의 '협(夾)' 자, '대(帶)' 자, '리(離)' 자, '겸(兼)' 자, '합(合)' 자 때문에 본연지성은 될 수 없고 단지 기질지성이라고만 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만물을 생성한 이후로 오로지 하나의 기질지성만 있고, 본연지성은 어두운 우주 속에서 구해야 하니, 이렇게 되면 주자가 이른바 '아무런 근거 없이 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주 41)라고 한 것과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까. 〈동수록(董銖錄)〉에서 기록한 한 단락은 바로 이 장을 해석한 것입니다. 이는 병진년 이후 가장 늦은 만년정론입니다. 그곳에서 "사람이 태어나 고요하다고 하였는데, 사람과 생물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단지 리라고만 할 수 있고 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에 있을 때는 명(命)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성이라고 말하자마자, 바로 이미 성(본연지성)이 아니게 됩니다. 이는 성이라 말하자마자 바로 사람이 태어난 이후에 이 리가 형기 속에 떨어져 있는 것이니 오로지 전적으로 성의 본체만이 아님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성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사람에게 있을 때는 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늘에 있는 것을 명(命)이라 하고 사람에게 있는 것을 성이라 하니, 이 두 구절은 팔자타개(八字打開)주 42)하여 일필로 곧바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하늘에 있고 사람에 있는 것을 명(命)과 성이라 말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나열했으니 비록 오척 동자라도 문리를 조금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성 자는 본연지성이라는 것에 대해 이론을 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성 자는 리가 형기 중에 떨어져 있어서 전적으로 성의 본체는 아니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정세영이 주장한 이 두 구절은 마땅히 다음과 같이 보충하여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기질을 끼고 있지 않는 것은 하늘에 있는 리라고 명명해야 하고, 기질을 끼고 있는 것은 본연지성이라 명명해야 하며, 기질을 끼고 있으면서 그것 자체로 하나의 성이 되는 것은 기질지성이라고 명명해야 한다." 이렇게 한 연후에야 완전하게 보완이 될 것 같은데, 정씨는 이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완고하게 지키려고만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세영의 편지에서 "이것이 주자가 천명지성(天命之性)을 풀이할 때 '성(性)이 곧 기(氣)이고 기가 곧 성이며, 온전히 성의 본체이지는 않다[不全是性之本體]'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성이 곧 리(理)이다'라고 말한 까닭이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성이 곧 기이고 기가 곧 성이다'주 43)는 것은 리와 기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주 44)고 말하는 것과 같고, '부전시성(不全是性)'은 오직 성(性)이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치우쳐 온전하지 않은 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성이 단지 기 속에 있을 때를 말한 것일 뿐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주자는 일찍이 "도(道)가 곧 기(器)이고 기가 곧 도이니, 기를 떠나서 도를 말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청컨대 이 말을 이어서 "성이 곧 기(氣)이고, 기가 곧 성이니, 기를 떠나서 성을 말할 수 없다."라고 한다면 이 역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천명지성으로 말하자면,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이 변화하고 생성하여 형기(形氣)가 형성된 이후에나 있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형기가 아직 생기지 않은 이전에 초연히 홀로 존재한 적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뜻은《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살펴본다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정세영이 인용한〈엄시형에게 답한 편지[答嚴時亨書]〉의 내용을 운운한 것에 대하여:
이것은 《주자어류》의 조목들과 한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오행(五行)과 태극(太極)을 운운한 것'에 대하여:
그 다른 것은 오행과 생(生)에 소속시키고, 그 같은 것은 태극과 성(性)에 소속시킵니다. 그러므로 주자는 오행, 태극이 '생지위성(生之謂性)'과 서로 비슷하다고 여겼습니다. '잡저(雜著)' 두 글자는 본문에는 본래 없는 것인데 밖에서 온 재료를 첨가해 넣었으니 이상합니다. 그리고 이 설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태극과 음양을 섞어 말한 것은 마땅히 단지 본연(本然)으로만 간주하여야지 갑자기 치우침과 온전함의 차이가 있고 허물과 악이 있는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주자가《통서(通書)》를 논하면서 운운한 것'에 대하여:
이 부분은 정말로 정세영의 설과 같습니다만, 이 부분이 누구의 기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동수록(董銖錄)〉의 기록에 '하늘에 있는 것을 명(命)이라 한다', '사람에 있는 것을 성(性)이라 한다', '해설하여 말할 수 없다[解不容說]', '성(性)을 말하기만 하면'주 45)이라고 한 말들을 가지고 살펴보면 의당 정론(定論)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을 때의 설일 듯합니다. 지금 67세 이후의 정론을 버리고 저것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정세영의 편지에서 "본성(本性)이 기질(氣質) 속에 떨어진 것을 본연(本然)으로 간주한다면, 기질을 본연이라 간주하는 오류를 면할 수 없어서 그 폐단이 반드시 본성을 버리고 따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이것은 기(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던 일주 46)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개 성이 기질 속에 있다는 것은 마치 태극이 음양 속에 있고, 도(道)가 형기(形器) 속에 있으며, 리(理)가 사물 속에 있고, 광대한 작용[費]은 나는 새와 뛰는 물고기주 47)에 있으며, 천명(天命)은 기화(氣化) 속에 있다고 말하는 설과 같습니다. 이런 종류의 말은 매우 많은데, 이것들을 모두 기질로 간주하여 본연을 버리는 폐단이라고 근심해야 하겠습니까?
주석 34)부표(付標)
문서 중에 특별히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경우 그곳에 찌를 붙이는 것을 말한다.
주석 35)다행히도……되었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32 〈어록 하(語錄下)〉에 보인다.
주석 36)정명도(程明道)가……한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과 《근사록(近思錄)》 권1〈도체(道體)〉에 정호(程顥)가 "타고난 것을 성(性)이라고 하는데, 성은 기(氣)이고 기는 성이니 타고난 것을 말한다. 사람이 기품(氣稟)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 이치에는 선악이 있다. 그러나 성 가운데에서 원래 이 두 가지가 서로 상대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선한 사람이 있고 어려서부터 악한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기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선은 참으로 성이다. 그러나 악도 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生之謂性, 性卽氣氣卽性, 生之謂也. 人生氣稟, 理有善惡, 然不是性中元有此兩物相對而生也. 有自幼而善, 自幼而惡, 是氣稟有然也. 善固性也, 然惡亦不可不謂之性也〕"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주석 37)기질지성(氣質之性)
유가철학에서 기질지성은 한 가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최소한 두 개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갖추고 있는 각종의 생리적 본능과 재능 재질 등의 총칭이다. 다른 하나는 주자가 제시한 독특한 것인데, 선천적으로 부여 받은 본연지성(性善의 性 혹은 性卽理의 性)이 발현할 때 반드시 기질에 떨어져(墮在) 나타나게 되는데, 본연지성이 기질에 타재하여 드러난 본성을 기질지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자는 기질지성이라는 말을 오로지 이러한 한 가지 의미로 제한하여 사용하지는 않는다. 《주자어류(朱子語類)》등에는 '기질지성'이 각종의 생리적 본능과 재능 그리고 재질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기질지성 용어가 출현하면 전후 맥락을 살펴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주석 38)본연지성(本然之性)
의리지성(義理之性) 혹은 천지지성(天地之性)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주자가 말한 성즉리의 본성이 바로 본연지성이다.
주석 39)타재(墮在)
성리학에서 타재는 '본연지성이 기질 중에 떨어진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성리학에서는 거의 고유용어처럼 사용되기 때문에 이후에는 '타재'로 표기할 것이다.
주석 40)율옹이……뿐입니다
이이는 "주자(朱子)는, '기질지성은 다만 이 성(性) 【이 성(性)은 본연지성입니다.】이 기질 가운데 서로 떨어져 있으므로 기질을 따라 따로 하나의 성(性) 【이 성(性)은 기질지성입니다】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자(程子)는, '성이 곧 기이고 기가 곧 성이니, 생성(生成)하는 것을 이른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이 결코 두 개의 성이 아닙니다. 다만 기질 상에 나아가 이(理)만을 가리킬 때에는 본연지성이라 하고, 이와 기를 합하여 명명(命名)할 때에는 기질지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이 이미 하나라면 정이 어찌 두 갈래의 근원이 있겠습니까"〔朱子不云乎, 氣質之性, 只是此性, 【此性字。本然之性也.】 墮在氣質之中, 故隨氣質而自爲一性. 【此性字。氣質之性.】 程子曰。性卽氣。氣卽性。生之謂也. 以此觀之, 氣質之性, 本然之性, 決非二性. 特就氣質上, 單指其理曰, 本然之性, 合理氣而命之曰, 氣質之性耳. 性旣一則情豈二源乎.〕라고 말하였다.《율곡전서(栗谷全書)》 권10 〈답성호원(答成浩原)〉
주석 41)《주자어류(朱子語類)》 권95 〈정자지서일(程子之書一)〉
명도(明道)의 〈논성論性〉 1장에 '사람이 태어나면서 고요하다.'라고 하였는데, 고요한 것은 진실로 그 성(性)이다. 그러나 다만 '생(生)' 자가 있기만 하면 기질(氣質)을 띠게 된다. 그러나 '생' 자 이상은 또 말할 수 없으니, 대개 이 도리는 아직 형체가 드러나지 않은 곳이다. 그러므로 이제 막 성(性)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기질을 띠게 되므로 아무런 근거 없이(터무니없이) 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人生而靜, 靜者固其性. 然只有生字, 便帶却氣質了. 但生字以上又不容說, 蓋此道理未有形見處. 故今才說性, 便須帶著氣質, 無能懸空說得性者〕
주석 42)팔자타개(八字打開)
주가가 한 말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35 〈여유자징서(與劉子澄書)〉에서 "성현께서는 이미 팔자타개를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점을 깨닫지 못하고서 오히려 밖으로만 내달린다〔聖賢已是八字打開了, 但人自不領會, 卻向外狂走耳〕"고 하였다. 이는 '八' 자처럼 양편을 모두 넓게 열어놓았는데, 사람들은 그 안을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밖으로만 내달린다는 것을 지적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正路를 놓고 邪道를 찾는 사람을 지적할 때 쓰는 말이다.
주석 43)성이……성이다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에 정호(程顥)가 이르기를, "낳는 것을 성(性)이라고 이르니, 성(性)은 바로 기(氣)이고 기(氣)는 바로 성(性)이라는 것은 생(生)을 이른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받은 기품(氣稟)은 이치상 선악이 있기 마련이나 성(性) 가운데에 원래 이 두 물건이 상대하여 나온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선한 사람이 있고 어릴 때부터 악한 사람이 있으니, 이는 기품에 그러함이 있어서이다. 선(善)은 진실로 성(性)이지만, 악(惡)도 성(性)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生之謂性, 性卽氣氣卽性, 生之謂也. 人生氣稟, 理有善惡, 然不是性中元有此兩物相對而生也. 有自幼而善, 自幼而惡, 是氣稟有然也. 善固性也, 然惡亦不可不謂之性也.]"라고 하였다.
주석 44)리와……않다
주자철학에서 性卽氣, 理卽氣, 道卽氣라는 말이 자주 출현한다. 이때 '卽' 자는 동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類의 卽 자 용법은 性卽理의 卽 자 용법과 다른 것이다. 유가철학에서 卽 자는 최소한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동일관계인데, 대표적인 것은 性卽理이다. 다른 하나는 서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의 不離이다. 주자는 理氣不離不雜을 주장하였는데, 不離를 卽으로 표현할 수 있다. 마지막은 接의 의미가 있다. 주자철학에서 格物에 格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물에 나아가(卽) 접하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卽 자는 理와 氣, 性과 氣, 道와 器가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 것이다.
주석 45)동수(董銖)의……하면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5 45조에 나오는 말이다. 참고로, '解不容說'의 '解'자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없는 글자이다.
주석 46)기(杞)나라……일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뜻으로, 옛날 중국 "기나라에 살던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몸 둘 곳이 없다고 걱정하며 침식을 잊었다.〔杞國有人 憂天地崩墜 身亡所寄 廢寢食者〕"라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열자(列子)》 〈천서(天瑞)〉
주석 47)나는……물고기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못에서 뛴다.' 하였으니, 천지의 도가 위아래에 밝게 드러난 것을 말한 것이다.〔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자연 현상 자체에 작용이 드러나 있다는 뜻이다.
上艮齋先生論鄭世永書 甲寅
鄭書付標, 敢據下示《大全》《語類》諸條, 不免依樣胡蘆, 安敢望不失眞本也? 惟是之懼耳。 小子每讀〈中庸序〉, 竊怪夫以程門人之高才眞功習聞妙訣, 而及其師沒未久, 淫於老佛, 今見門下諸子 皆厭飫於先生生平精思妙契之訓, 而或有敢爲異論於行脩操几之日者。 於是又知程門人之不足怪, 而今日諸子之尤可怪矣。 小子常謂同門諸人曰: "吾輩存省修治之功, 固在自家之如何, 定依賴他人不得。" 若夫說心說性本源精微去處, 一從師門之論, 則可以傳之百世而無弊, 何苦而強自立異, 生出無限煩擾耶? 栗谷先生曰: "幸生朱子後, 學問庶幾不差。" 小子敢繼之曰: "幸出艮翁之門, 性理說庶幾不差。" 鄭書以明道'生之謂性', 爲氣質性, 而與先生數十年本然性之定論相反。 意其精究力索, 必有自得之實, 而出於質疑就正之心, 非欲故爲此謬見, 致異於先生也。 至如小子粗思淺見, 不足與論於性理之間, 而先生平日議論之大旨, 則粗聞之矣。 今將鄭書所引諸說之失其本旨者, 及其自言之未當者, 條列于左。

鄭書所引程子曰"性字不可一槩論"
考《中庸輯略》, 此非明道說, 乃伊川說, 而正是以氣質性言者也。 蓋伊川'生之謂性'之以氣質性言者, 與明道'生之謂性'之以本然性言者, 自不相干, 奈之何引彼而證此也? 又考《程氏遺書》, 明道曰: "天地之大德曰生。 天地絪緼, 萬物化醇, 生之謂性。 此元者善之長也, 斯所謂仁也。" 此正與此章相表裹, 而旣曰"元者, 善之長", 又曰"斯所謂仁", 則此亦可以本然性看矣。

鄭書所引朱子曰: "明道此章內性字, 有指其墮在氣質中而言者, 有指其本原至善而言者。"
生之謂性, 才說性等, 性字是指堕在氣質中者, 便已不是性。 性字是指本原至善者, 而今以堕在氣質中者, 做氣質性, 本原至善者, 做本然性。 細察其意, 似縁錯看墮字而失其本指也。 夫在天之理, 在人而爲性, 從天人上下之聞而立言。 故墮之一字, 語勢自爾, 與惟皇上帝降哀于下民之降字同一意思, 非謂一箇潔潔凈凈底墮落於溷穢汙濁之中也。 苟以墮字之故, 而硬做氣質性, 則凡程朱說性之處處相碍。 且置勿論, 至於上帝降衷之衷也, 不得爲本然性, 豈有是理? 朱子答徐子融書曰: "氣質之性, 只是此性墮在氣質之中, 故隨其氣質而自爲一性。" 此則正論氣質性, 而亦有墮字, 似可爲鄭書之證佐。 然察其文勢, 大有不然者。 蓋氣質性之, 爲氣質性者, 不在墮氣質之墮字, 在於隨氣質之隨字矣。 此兩句之間, 另下一箇故字, 使之一轉換面, 而十分有力。 朱子之意, 蓋曰有墮氣質之本然性。 故有隨氣質之氣質性云爾。 如此看破, 則朱子所云, 此章內墮在氣質者, 當做本然性, 本原至善者, 當做本原至善之理看, 豈不明白乎?

鄭書所引朱子曰: "橫渠云'形而後有氣質之性 善反之則天地之性存焉。' 將此兩性字分別自生之謂性以下, 凡說性者, 孰是天地之性, 孰是氣質之性?"
此則果如鄭書之所主。 然'生之謂性', 有明道ㆍ伊川之異, 朱子此說, 未知指明道乎? 指伊川乎? 且若果指明道, 其初晚之分, 未可的知, 何可執此一段而盡廢朱子諸說乎?

鄭書所引栗翁曰: "朱子不云乎【止】, 生之謂也。"
栗翁說, 果如所引, 則誠以氣質性看矣。 然此等疑義, 不向立言主意之所在而研究之, 不將解釋諸說之精粗而取舍之, 惟先賢說之合於己見者是證是據, 則非惟栗翁說如此。 厥後先賢或有主本然性者, 或有主氣質性者, 朱子亦有本然ㆍ氣質二說, 於此二者之間, 各執一偏, 而不知適從, 則終無定論之日矣。 苟能先將立言本意, 平心領會, 慧眼看透, 則凡先賢諸說之同異精粗, 瞭然於前, 自見氣質性之可舍, 而本然性之可從矣。

鄭書所引朱子曰: "氣質之性, 太極全體, 墮在氣質之中, 非別有一性。" 栗翁曰: "氣質之性, 實是本然, 在氣質者, 非二性。"
朱子說此是〈答嚴時亨書〉, 而'氣'字上, 有'但論'二字, '性'字下, 有'則此'二字。 其意謂氣質性中, 有太極全體云爾, 非謂太極在氣質中, 則爲氣質之性也。 至於栗翁云云, 此亦但謂氣質ㆍ本然, 非有兩性而已, 何嘗直謂性在氣中, 卽爲氣質之性, 如鄭書之言耶?

鄭書曰: "夾帶氣質者, 命之以氣質之性, 不夾帶氣質者, 命之以本然之性。"
鄭書一幅, 累百言, 總其大旨, 不過此二句矣。 然凡朱子論性, 而言夾氣帶氣等說, 不一而足。 今略擧數條於此, 以見夾帶氣質者之不可直謂氣質性, 本然性之未有不夾帶氣質者也。《語類》〈可學錄〉曰: "人生而靜【按此是天地之性】已是夾形氣, 專說性不得。" 錄曰: "纔說太極便帶著陰陽, 纔說性便帶著氣。" 砥錄曰: "性猶太極, 心猶陰陽, 太極只在陰陽之中, 不離陰陽也。 惟性與心亦然。" 泳錄曰: "凡人說性, 只是說繼之者善也, 便兼氣質了。" 端蒙錄曰: "《易》說一陰一陽之謂道, 這便兼氣與質而言, 因擧合虛與氣有性之名。" 若如鄭書之說, 則以此諸條之夾字帶字不離字兼字合字之故, 不得爲本然性, 而只做氣質性矣。 然則自天之生物以後, 只有一箇氣質性, 而將求本然性於太空冥冥之中, 其與朱子所謂無能懸空說得性者, 不相戾矣乎? 若乃董銖錄一段, 正是解此章者。 而爲丙辰以後最晚年定論矣。 其言曰: "人生而靜, 卽是人物未生時, 只可謂之理, 說性未得。 此所謂在天曰命也。 纔說性, 便已不是性。 言纔謂之性, 便是人生以後, 此理墮在形氣中, 不全是性之本體矣。 故曰便已不是性。" 此所謂在人曰性也。 竊以爲在天曰命, 在人曰性此二句, 可謂八字打開而一筆句斷也。 旣以在天在人曰命曰性, 齊頭幷腳, 則此性字, 雖五尺童子粗解文理者, 恐無異辭於本然性。 而此性字, 亦不過此理墮在形氣中, 不全是性之本體者也。 由此言之, 鄭書所主此二句, 當改而補之。 曰: "不夾帶氣質者, 命之以在天之理, 夾帶氣質者, 命之以本然之性, 夾帶氣質而自爲一性者, 命之以氣質之性。" 然後乃爲完備, 未知鄭氏於此, 亦不領悟, 而一向膠守乎?

鄭書"此朱子所以訓天命之性, 不曰性卽氣, 氣卽性, 不全是性之本體。 而但曰性卽理也。"
性卽氣, 氣卽性, 猶云理氣不相離也, 不全是性, 猶云不獨是性, 非偏而不全之性也。 此皆只是言性在氣中, 非謂氣質性也。 朱子嘗曰: "道卽器, 器卽道, 莫離器而言道。" 今請繼之曰: "性卽氣, 氣卽性, 莫離氣而言性", 不亦可乎? 且以天命之性言之, 亦在二五化生形氣已成之後, 何嘗超然獨立於形氣未生之先乎? 斯義也, 考之《中庸章句》曉然可見。

鄭書所引嚴時亨書云云
此可與《語類》諸條一樣看定

鄭書所引五行太極云云
其異者, 屬五行與生, 其同者, 屬太極與性。 故朱子以爲五行太極與生之謂性相似也。 '雜著'二字本文所無, 而添入外來材料, 可異也。 且依此說言之, 太極和陰陽滾說底, 當只作本然看, 不可遽作有偏全有過惡底氣質性看了。

鄭書所引朱子論《通書》云云
此則果如鄭說, 但未知此爲誰錄。 而以銖錄'在天曰命', '在人曰性', '解不容說', '才說性'者觀之, 恐當爲未定說。 今捨六十七歲以後定論, 而以彼爲主何也?

鄭書曰: "以本性之墮在氣質中者做本然, 則未免以氣質做本然, 而其弊必有捨本性而別求氣質之性也。"
此可謂杞人憂天也。 蓋性在氣質中, 如云太極在陰陽中, 道在形器中, 理在事物中, 費在飛躍上, 命在氣化中之說矣。 此類極多, 皆當做氣質看, 而以舍本然之弊憂之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