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열람
  • 디렉토리열람
  • 유형분류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
  • 간재선생에게 올림(上艮齋先生 己酉)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1.TXT.0006
간재선생에게 올림
삼가 제가 생각해 보니, 공자께서 바다에 떠 가고 싶다고 하신 것이 비록 한때의 탄식하시는 말씀이었지만, 당시의 혼란이 만약 오늘과 같았다면 그 말씀을 반드시 실천했을 것입니다. 장자(張子 장재(張載))는《논어》에 기록된 노(魯)나라 태사(太師) 이하의 사람들이 하수(河水)를 넘고 바다를 건너 난리를 피한 것을 성인(聖人)의 잠깐 사이의 교화라고 하였는데,주 20) (이렇게 이해하면) 공자의 뜻은 더욱 매우 분명합니다. 속된 선비들이 (간재) 선생이 바다를 건너 계화도로 온 것을 함부로 헐뜯는 것은 (그들이) 참으로 사정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한(大韓)의 역법(曆法)이 폐기되고 나서 일본의 역법이 이미 유행하니 애통할 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어떤 이는 새 역법이 비록 일본 사람에게서 나왔을지라도 이미 대한의 연호(年號)를 기재하고 있으니 그 달력을 보고 날짜를 아는 것이 의리(義理)에 있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한의 연호를 기재한 것이 곧 소금 배를 숨기려고 그 위에 건어물을 올려두는 계책주 21)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진실로 대한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결코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저의 얕은 견해로는 단지 천세력(千歲曆)이나 백중력(百中曆) 등의 달력을 보고서 사계절의 기후(氣候)를 대략 기억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논의한 내용이 맞다. 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와 조정문(曹靖聞) 두 사람의 고사를 지금에 수용하여 쓸 수 있다.【조일주(曹一周)는 우암(尤庵)의 문인인데 죽을 때까지 오랑캐 역법을 보지 않았다.】"
○ 동계(桐溪)의 시에 "숭정 연호가 여기에서 멈추었으니, 명년에는 어떻게 다른 역서를 펼쳐 보겠는가. 이제부터 나 산옹은 더욱 일을 줄이고, 다만 꽃잎이나 보면서 세월 가는 것을 알리라[崇靖年號止於斯 明歲那堪異曆披 從此山翁尢省事 只看花葉驗時移]"고 하였다.
○ 진함(陳咸)은 하무포선(何武飽宣)이 죽은 것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갔는데 왕망(王莽)이 제위(帝位)를 찬탈한 뒤에도 여전히 한나라 달력을 쓰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진함이 말하였다. "나의 선인(先人)이 어찌 왕씨의 달력을 알 수 있겠는가?"

지난겨울에 일과를 정하여 《역경(易經)》을 읽었는데, 소장(消長)의 이치와 상수(象數)의 변화에 대해서는 흐리멍덩한 채 터득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저는 오늘날 《역경》에서 수용하여 쓸 수 있는 것은 이를테면 곤괘(坤卦)의 "천지가 폐색(閉塞)하면 현인이 은둔한다"와 대과괘(大過卦)의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해 숨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및 곤괘(困卦)의 "목숨을 바쳐 뜻을 이룬다"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혹여라도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않고서 함부로 큰일을 하려고 하고 남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마음에 원망과 후회를 품으며, 대절(大節)에 임하여 구차하게 면하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늘날 《역경》을 쓰는 방도가 아닙니다. 저 신학문(新學問)을 주장하는 자들은 걸핏하면 정자(程子)의 '수시변역(隨時變易)'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선왕(先王)의 전례(典禮)가 모두 변한[變易] 뒤에 나라가 다스려질 수 있고, 백성이 편안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정자가 말한 변역(變易)이라고 하는 것은 삼대(三代)의 손익(損益)주 22)과 우직(禹稷)의 출처(出處)주 23) 같은 것뿐이고, 천서(天叙)의 강상(綱常)과 인이(人彛)의 예의(禮義)를 말한 것이 아님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감히 선현(先賢)의 학설을 인용하여 오랑캐로써 중화를 바꾸는 도구로 삼아 기탄없이 천하 사람들을 이끌어 《역경》에 재앙을 끼치는 것은 반드시 저 신학일 것입니다. 삼가 저는 이 때문에 그지없이 통탄(痛歎)합니다.
○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정자는 '수시변역'하여 도를 따른다 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수시변역'하여 욕심을 따르니, 이 말은 내가 일찍이 운창(芸牕) 박장(朴丈 박성양(朴性陽))에게 들은 것이다."
주석 20)노(魯)나라……하였는데
《논어(論語)》 〈미자(微子)〉에서 "태사 지는 제나라로 가고, 아반간은 초나라고 갔으며, 삼반료는 채나라고 갔고, 사반결은 진나라로 갔으며, 북을 치는 방숙은 하내로 갔고, 소고를 흔드는 무는 한중으로 들어갔으며, 소사양과 경쇠를 치는 양은 해도로 들어갔다.〔大師摯適齊, 亞飯干適楚, 三飯繚適蔡, 四飯缺適秦, 鼓方叔入於河, 播鼗武入於漢, 小師陽, 擊磬襄入於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21)소금……계책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24〉에서는 육자정(陸子靜)의 학문은 논하면서 "소금을 파는 자가 소금 위에 여러 마리의 건어물을 올려놓아 소금을 가리고서 관문이나 나루터를 지나치면서 사람들이 그 안에 소금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此正如販鹽者, 上面須得數片鯗魚遮蓋, 方過得關津, 不被人捉了耳〕"고 평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주석 22)삼대(三代)의 손익(損益)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은(殷)나라는 하(夏)나라의 예를 인습(因襲)하였으니 손익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주(周)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인습하였으니 손익한 것을 알 수 있다.〔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정사를 함에 전 왕조의 풍습이나 제도에 너무 지나친 것이 있으면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더 보충하는 것으로, 예컨대 하나라는 충을 숭상하여 너무 순박하므로 은나라에서는 질을 숭상하여 이를 보충하였고, 은나라는 질을 숭상하여 문식이 부족하므로 주나라에서는 문을 숭상하여 보충한 것과 같은 따위를 말한다.
주석 23)우직(禹稷)
禹는 순임금 치세에서 황하의 治水를 맡아 홍수 조절에 성공했다. 후에 순임금의 선양을 받아 천자가 되고 夏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稷은 舜 임금 때 농사를 맡은 后稷으로, 周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사기(史記)》 권2 〈하본기(夏本紀)〉
上艮齋先生 己酉
竊念孔聖之浮海, 雖一時歎傷之詞, 然當時之亂若如今日, 則其踐言也必矣。 張子以《論語》所記魯太師以下逾河蹈海以去亂, 爲聖人俄頃之化, 則孔子之志, 又較然明矣。 俗士之妄詆先生浮海, 眞不知類者也
韓曆旣廢, 日曆已行, 痛矣何言? 或者謂新曆之法, 雖出自日人, 旣載大韓年號, 則觀知旬朔, 無害於義, 殊不知其載韓年號者, 乃鹽船加鯗之計也。 苟有韓人心者, 決不可看。 淺見只看千歲百中等曆略記四時氣候可也。
○ 先生答書曰: "所論得之。 鄭桐溪ㆍ曹靖聞二公故事, 今可受用。【曹公一周, 尤門人, 終身不看胡曆。】"
○ 桐溪詩"崇靖年號止於斯, 明歲那堪異曆披? 從此山翁尤省事, 只看花葉驗時移。"
○ 陳咸見何武飽宣死, 旣乞骸骨去, 莽篡位猶用漢臘, 人問其故, 咸曰: "我先人豈知王氏臘乎?"

昨冬課讀在於易經, 而於消長之理ㆍ象數之變, 茫然無得。 然竊謂今日之所當受用於易者, 如坤之'天地閉賢人隱', 大過之'獨立不懼遯世無憫', 困之'致命遂志'是也。 如或不度時勢, 而妄欲有爲, 人莫與我, 而心存怨悔, 臨大節而思欲苟免, 則非今日用易之道也。 彼主張新學者, 輒引程子'隨時變易'之語, 謂先王典禮一切變易而後, 國可以致治, 民可以致安, 殊不知程子所謂變易者, 如三代之損益, 禹稷之出處而已, 非謂天叙之綱常ㆍ人彛之禮義也。 彼敢援引先賢之說, 爲以夷易華之具, 而無所忌憚, 率天下之人而禍易經者, 其必新學也。 竊爲之痛歎不已。
○ 先生答書曰: "程子隨時變易以從道也, 今人隨時變易以從欲, 此語余嘗聞於芸牕朴丈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