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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農圃集敍)
농포집(農圃集) / 서
서문주 1)
농포 정공(鄭公)의 유집(遺集)은 부록을 합하여 약간 편이 된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로 천신(薦紳) 학사(學士)들이 공의 충정과 공훈을 기리고 공의 억울함을 슬퍼한 지 백 수십 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일찍이 조정에 알려져 단서(丹書)를 씻어주고 관작과 시호를 추증하여주 2) 이미 융숭하게 보답하였다. 또 화란을 거친 뒤에 공의 유문이 수습되어, 시문의 아름다움이 문단에서 크게 중시되었다.
공의 후손 상점(相點)주 3)이 서문이 빠졌다는 이유로 일찍이 나에게 서문을 써 주길 청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선조께서 예전에 나라에 충성을 다한 공적을 세웠으나 억울함을 품은 채 돌아가셨습니다. 그대의 조부 문정공(文貞公)이 일찍이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계실 때 그 당시 의사(義士)들의 묘소에 경건하게 제사를 올렸고주 4), 그대의 종조부 문충공(文忠公)께서 함경도 관찰사로 계실 때 병마평사(兵馬評事) 외재(畏齋) 이공(李公)과 우리 선조의 유사(遺事)를 수집하여주 5) 선양하는 방도에 관계된 모든 것에 여한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대의 선친 충문공(忠文公)께서 이미 선조의 시장(諡狀)을 지은 데다가 또 《창렬사지(彰烈祠志)》의 서문을 지어주 6) 선조를 드러낸 것이 모두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서문도 그대의 책무입니다." 내가 이에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
대개 듣건대, 공은 걸출하고 탁월한 자질로 민첩하고 풍부한 문장력이 있어서, 선조조(宣祖朝)의 태평성세에 높은 등수로 급제하였다.주 7) 외직으로 나아가 함경북도 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가 되었는데,주 8) 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이 침입하여 잔학한 적들이 잠식해 들어왔다. 이윽고 또 적이 북로(北路)에 난입하자 모반한 백성들이 내응(內應)하여, 왕자와 대신들이 북쪽에서 병란을 피하고 있다가 모두 사로잡히고, 병사(兵使)와 북변(北邊)의 수령들도 모두 적에게 붙잡혔다.주 9) 육진(六鎭)의 오랑캐들이 또 이때를 틈타 소요를 일으켜서 마천령(摩天嶺) 이북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다.
공은 일개 미약한 서생으로서 의병을 규합해 이끌어서 모반한 백성들을 제거하였고, 이어 누차 왜적을 격파하고 북방 오랑캐를 방어하여, 관북 지역 일대가 함락되지 않게 하였으니, 중흥의 공적을 낱낱이 헤아려 볼 때 공에게 비견될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공의 공적을 시기하고 능력을 음해하는 무리들이 엄폐하고 사실대로 아뢰지 않아 조정에서 포상을 시행하지 않았다. 공은 또 초연하게 공을 내세우지 않고 지방 수령을 전전하다가, 그 후에 혼조(昏朝 광해군(光海君)) 때를 만나 그저 술에 흠뻑 빠져 스스로 폐기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1)의 반정(反正) 때에 공이 문무의 재질을 겸비한 데다가 절개를 지켜 더럽히지 않았다 하여, 크게 기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은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 외직으로 돌아다니다가 이윽고 무고한 화를 당하여 결국 옥중에서 돌아가셨으니주 10), 이것이 공의 충성과 원통함의 실제 행적이다. 아!
장주(莊周)가 "자식이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천명이기에 마음속에서 버릴 수 없으며,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의리이니, 천지 사이에 도망갈 곳이 없다."주 11)라고 하였으니, 마치 임금과 신하가 서로 관계 맺는 것을 부득이한 사세(事勢)에서 나온 것으로 여긴 듯하다. 회암 선생(晦菴先生)이 《충가집(忠嘉集)》 발문에서 장주의 이 말을 특별히 거론하여 자신만을 위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사설(邪說)이라고 배척하였다.주 12)
지금 이로써 공의 유사(遺事)를 살펴보면, 벼슬길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변방의 낮은 관원이 되어 한 무리의 오합지졸을 이끌고 백만의 흉포한 왜적과 싸웠으니, 그 형세상 또한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숱한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 한 번 살아남은 상황에서 끝내 왜적들을 소탕하여 관북 지역을 말끔히 숙청하였는데, 모함하는 자들이 나와서 그 뒤에서 비난하여 공로에 대한 포상이 행해지지 않았으니, 그 지역 사람들이 공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분개하며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공의 만절필동(萬折必東)의 뜻주 13)은 애초에 작록이나 포상에 뜻을 두지 않았고 오직 신하의 직분을 스스로 다하고자 하였으니, 진실로 군신의 의리가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잡은 사람이 아니라면, 분명 이와 같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공의 기백(氣魄)에 감동하여 의사(義士)들이 모두 모인 것은 실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닌 본성에서 말미암았으니, 선생의 논의가 바꿀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믿겠다. 대저 공이 이처럼 대의(大義)에 밝은데도 끝내 화를 당한 것은 어찌 천하의 지극히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공의 시대를 논하고 공의 사람 됨됨이를 상상해 보건대, 공이 여러 유생 사이에서 뽑혀 낮은 관원이 되었으나 다만 충의(忠義)로 서로 격려하여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잘 물리친 것은 당나라의 장 수양(張睢陽)주 14)과 비슷하고, 위태로운 시대에 서생으로서 병권(兵權)을 맡아 혼란한 상황에서 공적을 세운 것은 송나라의 이백기(李伯紀)주 15)에게 부끄럽지 않고, 뜻밖에 억울한 일에 걸려 옥사가 성립되었으나 죄명이 없는데도 '아마 있을 것이다[莫須有]'라는 말로 뒤집어쓴 것은 악무목(岳武穆)의 상황과 비슷하니주 16), 이를 통해 공의 일생을 개괄할 수 있다. 공의 충성과 원통함은 장차 옛사람과 마찬가지로 귀결될 것이니, 그렇다면 이 문집의 유행이 또한 어찌 이백기의 주의(奏議)주 17), 장 수양과 악무목의 시편주 18)과 함께 오래도록 전해지지 않겠는가.
숭정(崇禎) 기원후 123년 경오년(1750, 영조26) 중춘에 여흥(驪興) 민우수(閔遇洙)가 서문을 쓰다.
- 주석 1)농포집(農圃集) 서문
- 민우수(閔遇洙)의 《정암집(貞菴集)》 권9에도 수록되어 있다.
- 주석 2)단서(丹書)를……추증하여
- 조정에서 정문부(鄭文孚)를 신원(伸冤)해 주었다는 의미이다. '단서'는 죄인의 범죄사실을 붉은 글씨로 기록한 문서를 가리킨다. 정문부는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 죽었는데, 1666년(현종7)에 신원 되어 우찬성에 추증되었고, 1713년(숙종39)에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顯宗實錄 7年 5月 23日》 《肅宗實錄 39年 3月 15日》 그런데 《숙종실록》 39년 3월 15일 기사 및 《농포집》의 〈시장(諡狀)〉ㆍ〈증직교지(贈職敎旨)〉 등에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고 언급한 내용을 볼 때, 우찬성에 추증되었다는 《현종실록》의 기사는 오류인 듯하다.
- 주석 3)상점(相點)
- 정상점(鄭相點, 1693~1767)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여(仲與), 호는 불우헌(不憂軒)이다. 정문부의 증손이다.
- 주석 4)문정공(文貞公)이……올렸고
- 문정공은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시호로, 민유중은 본관이 여흥(驪興),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저서에 《민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가 있다. 민유중은 1657년(효종8)에 경성 판관에 제수되었다.
- 주석 5)문충공(文忠公)께서……수집하여
- 문충공은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의 시호이고, 외재(畏齋) 이공(李公)은 이단하(李端夏, 1625~1689)이다. 1664년(현종5)에 민정중은 함경도 관찰사로, 이단하는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로 부임한 바 있다. 이단하는 정문부의 행적을 모으고 선양하기 위해 민정중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농포집》 권4 〈북평사이공단하상순찰사민공정중서(北評事李公端夏上巡察使閔公鼎重書)〉, 〈순찰사민공답서(巡察使閔公答書)〉, 〈이평사재상순찰사민공서(李評事再上巡察使閔公書)〉 등 참조.
- 주석 6)충문공(忠文公)께서……지어
- 충문공은 민진후(閔鎭厚, 1659~1720)의 시호이다. 민진후가 지은 정문부의 〈시장(諡狀)〉은 《농포집》 권2 부록에 수록되어 있다. 함경북도 경성(鏡城)의 창렬사(彰烈祠)는 정문부를 배향한 사당으로, 《창렬사지》는 이단하가 1666년(현종7)에 편찬했으며, 1718년(숙종44)에 민진후가 서문을 썼다.
- 주석 7)선조조(宣祖朝)의……급제하였다
- 1588년(선조21)에 식년문과에 갑과(甲科)로 합격하였고 한성부 참군(參軍)이 되었다.
- 주석 8)외직으로……되었는데
- 정문부는 1591년(선조24) 7월에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었다.
- 주석 9)적이……붙잡혔다
-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함경도로 침입하자,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회령부(會寧府)의 국경인(鞠景仁)이 부민(府民)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고,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과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황혁(黃赫) 등을 잡아 가등청정에게 넘기고 항복했다. 또 당시 순변사 이영(李瑛)과 부사 문몽원(文夢轅)도 왜적에게 붙잡혔다. 《宣祖修正實錄 25年 7月 1日》
- 주석 10)무고한……돌아가셨으니
-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인조가 정문부를 부총관(副摠管)에 기용하려 했는데 정문부는 종기가 심해서 부임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내장(朴來章)이 정문부가 일부러 이괄을 피한 것이라고 모함하여 예전에 지은 시를 빌미로 정문부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農圃集 卷5 附錄 諡狀》
- 주석 11)자식이……없다
-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말이다.
- 주석 12)회암 선생(晦菴先生)이……배척하였다
- 회암은 주희(朱熹)의 호이다. 주희는 동해(東海) 송군(宋君)의 《충가집》에 써준 발문 첫머리에서 장자의 말을 인용한 뒤, "장주의 이 말을 예로부터 명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 볼 때 부자간의 인과 군신간의 의리는 하늘이 부여한 본연이요 백성들이 본디 소유한 것이다. 그런데 장주는 부자간만 천부적인 것으로 여기고 군신간의 관계는 특별히 부득이한 사세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니, 어찌 그렇겠는가?……군신간의 의리는 내가 논한 것이 틀림이 없으니, 장생의 말이 자신만을 위하고 임금을 무시하며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같은 사설이 되는 것[莊生爲我無君禽獸食人之邪説]은 또한 변론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82 跋宋君忠嘉集》
- 주석 13)만절필동(萬折必東)의 뜻
- 물이 만번 꺾이며 흘러도 결국 동해바다로 흘러들어간다는 의미로, 선조가 〈피무변명주(被誣辨明奏)〉에서 명나라 황제에 대한 존모(尊慕)의 뜻을 표현할 때 한 말이다. 여기서는 정문주가 오로지 국가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바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 주석 14)당나라의 장 수양(張睢陽)
- 장 수양은 장순(張巡, 709~757)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수양성(睢陽城)을 지키며 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당하자 장렬하게 순절했다. 《舊唐書 張巡列傳》
- 주석 15)송나라의 이백기(李伯紀)
- 이백기는 송나라 이강(李綱, 1083~1140)의 자로, 호가 양계(梁溪), 시호가 충정(忠定)이다. 이강은 금나라의 침략에 맞서 항전할 것을 주장했으며, 문인으로서 금나라와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宋史 李綱列傳》
- 주석 16)뜻밖에……비슷하니
- 악 무목(岳武穆)은 송나라 장군 악비(岳飛, 1103~1142)의 시호이다. 악비는 금나라와 싸워 중원(中原)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간신 진회(秦檜) 등 주화파(主和派)에 의해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당해 죽었다. 진회가 악비를 무함하면서 "악비의 아들 악운(岳雲)이 악비의 장수 장헌(張憲)에게 준 편지가 있는데 사실은 분명치 않지만 일의 정황으로 보면 아마 있을 것이다.[雖不明, 其事體莫須有.]"라고 하였다. 《宋史 岳飛列傳》
- 주석 17)이백기의 주의(奏議)
- 송나라 이강이 〈십의상소(十議上疏)〉를 올려 금나라와 화친을 맺는 것에 반대하였였다. 《宋史 李綱列傳》
- 주석 18)장 수양과 악무목의 시
- 장순의 시는 몇 편이 산견되는데, 5언율시 〈문적(聞笛)〉이 그의 대표작이다. 악비의 시는 《악무목유문(岳武穆遺文)》에 6편의 시가 전한다. 장순과 악비의 시는 대부분 무인의 기개와 우국충정을 담고 있다.
農圃集敍
農圃鄭公遺集, 合附錄爲若干編。蓋自公之歿, 薦紳學士, 誦其忠勛, 悲其冤枉, 百數十年矣。間嘗聞于朝, 洗滌丹書, 贈以爵諡, 崇報旣備。又其遺文收拾於禍患之餘, 詞藻之美, 大爲藝苑所重。公之後孫相點, 以序文之闕, 嘗以書請於余曰: "吾先祖舊有忠勞於國, 抱冤以歿。子之王考文貞公, 曾爲鏡城通判, 虔祀其時義士之墓, 子之從祖文忠公, 按節北路, 與評事畏齋李公, 蒐輯吾先祖遺事, 凡係表闡之方, 靡有餘憾。子之先君子忠文公, 旣製先祖諡狀, 又爲《彰烈祠志》弁卷之文, 發揮備至, 今此序文亦子之責也。" 遇洙於是不敢辭。蓋聞公以英偉卓犖之資, 有敏妙華贍之文, 當穆廟盛際, 擢高科。出爲咸鏡北道評事, 未幾島夷來寇, 蛇豕荐食。尋又闖入北路, 叛民內應, 王子大臣避兵在北, 俱被執, 帥臣邊倅, 亦皆陷賊。六鎭諸胡, 又乘時動擾, 摩天以北, 蕩爲賊藪。公以眇然一介書生, 糾率義旅, 旣翦叛民, 繼而屢破倭賊, 逆拒胡寇, 使關北一路, 得免淪陷, 歷數中興功績, 殆無其比, 而一時忌功害能之輩, 掩蔽而不以實聞, 朝家甄賞不行。公又超然不有其功, 浮沈州縣間, 而後値昏朝, 縱酒自廢。及癸亥反正, 以公有文武全才, 且守節不汚, 將加大用。,顧公急於便養, 低回外郡, 旋罹旡妄之禍, 竟死獄中, 此其爲忠冤之實蹟也。嗚呼! 莊周有言: "子之於親, 命也, 不可解於心; 臣之於君, 義也, 無所逃於天地之間。" 若以君臣之相屬爲出於事勢之不得已。晦菴先生跋《忠嘉集》, 特擧其言, 斥其爲爲我無君之邪說。今以是而觀於公之遺事, 則出身未久, 爲關塞小官, 提一隊烏合之衆, 戰百萬鴟張之賊, 其勢亦極難耳。出萬死得一生, 卒能蕩攘羣兇, 汛淸關北, 而媒孼者從而議其後, 賞不酬勞, 一方之人, 無不爲之扼腕憤歎。而迺公萬折必東之志, 初不以爵賞爲意, 唯欲自盡於臣職, 苟非君臣之義, 纏綿固結於人心, 必不能若是。況其聲氣所感, 義士咸聚, 實由於秉彝之所同得, 則益信先生之論之爲不可易。夫以公之明於大義如此, 而卒罣禍網者, 豈非天下之至冤哉? 蓋嘗論公之世, 想公之爲人, 則其起諸生爲小官, 徒以忠義相激厲, 善以少擊衆, 似唐之張睢陽, 當危難之際, 以書生掌戎權, 收功於板蕩之餘, 無愧宋之李伯紀, 橫罹幽枉, 獄成而無罪名, 蔽之以莫須有, 又髣髴於岳武穆, 斯可以槩公之終始。而其爲忠爲冤, 將與古人同歸, 然則斯集之行, 亦豈不與伯紀奏議、張·岳詩篇, 同其久遠也歟?
崇禎紀元後百二十三年庚午仲春, 驪興閔遇洙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