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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포선생집후서(南圃先生集後序[金裕憲])

남포집(南圃先生集) / 서

자료ID HIKS_Z999_01_B00023_001.001.TXT.0001
남포선생집후서
기자(箕子)주 1)가 〈홍범(洪範)〉에서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다.[無偏無黨]"주 2)라고 하였고, "음탕한 벗을 두지 아니한다.[無有淫朋]"주 3)라고 하였으니, 이는 붕당(朋黨)에 대해 깊이 마음을 쓴 것이다.주 4) 우리 동방은 기자를 조종(祖宗)으로 삼아서 역사서에서는 "어진 이의 교화[仁賢之化]"라고 일컬었는데,주 5) 붕당에 대한 의론이 우리나라에 가장 성행하여 너나 할 것 없이 온 나라 사람이 탕평(蕩平)하고 정직(正直)한 길로 나아가는 이가 거의 없는 것은 또한 유독 어째서인가.
금성(錦城) 김군 명수(金君明叟)주 6)가 그의 선조인 남포선생(南圃先生)의 유집(遺集)을 보여주었는데, 단지 두 책(冊) 뿐이었다. 시문(詩文)ㆍ서(書)ㆍ소(疏)ㆍ기사(記事) 몇 편뿐이었으나, 그 언의(言義)의 공정함과 기상(氣像)의 광대함은 거의 근세의 문장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었으니, 오호라! 선생은 참으로 홀로 우뚝이 선 호걸지사(豪傑之士)라고 일컬을 만하도다.
효종(孝宗)과 현종(顯宗) 무렵에 당론(黨論)이 더욱 거세져 현자(賢者)들까지도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서주 7) 허둥지둥 쫓아다니는 지경이었는데, 선생은 이러한 때에 숲속에서 도(道)를 강론하여 아름다운 명성이 크게 드러났다. 저마다 문호(門戶)를 세운 자들이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좌지우지해서 득세하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선생은 우뚝이 홀로 서서 편벽되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으면서 논의하는 사이에 오직 올바른 것만을 허여하니, 알지 못하는 자들은 떠들썩하게 촉(蜀)나라 해를 보듯이 하였으나,주 8) 공론(公論)도 또한 이 때문에 선생을 훌륭하게 여겼다.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일제히 천거하여 초빙하는 활과 깃발주 9)이 여러 차례 사립문에 이르렀으니, 성대하도다. 확연(廓然)히 매우 공정하여주 10) 털끝만큼도 사호(私好)가 없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킴이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마음을 보존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시문(詩文)에 발로 된 것이 모두 유연(悠然)히 자득하고 만물과 화락하여 기수(沂水)와 무우(舞雩)의 기상주 11)이 있었던 것이다. 〈경세통전(經世通典)〉은 간략하고 요약되면서도 광대하였고, 세밀하고 자세하면서도 균평하여 위로는 〈주관(周官)〉의 육전(六典)주 12)의 뜻을 좇고 아래로는 병농합일(兵農合一)의 부위(府衛)의 제도주 13)를 잃지 않았다. 〈만언소(萬言疏)〉 한 소장은주 14) 민생(民生)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 더욱 간곡하였으니, 그 귀결점은 군상(君上)의 한 마음이 천지를 제자리에 있게 하고 만물을 잘 기르는주 15) 근본이 된다는 것이었다. 비록 둔괘(遯卦)를 만나주 16) 침묵하고서 꼭꼭 싸서 골수에 간직해 두었으나,주 17) 가슴 속에 보존하고 있는 것은 대강 알 수 있었다.
오호라! 말이란 마음의 발로요, 글은 그 마음이 더욱 드러난 것이다. 이 마음이 한번 편당에 의해 가려지면 시비(是非)에 대해 어두워지고 의론이 협소해지는 법이니, 비록 꾸미고 수식하여 가린다 한들 눈이 있는 자라면 어찌 분별하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가 말하기를 "밝으면 통하고, 공정하면 넓어진다.[明則通, 公則溥.]"주 18)라고 하였으니, 선생은 이에 가까울 것이다. 선생이 비록 당시에는 쓰이지 못하였으나 선생의 글은 반드시 후세에까지 전해질 것이니, 명수는 그날을 기다릴지어다.

신묘년(1831, 순조31) 맹하(孟夏 4월)에 지제교(知製敎) 석릉(石陵) 김유헌(金裕憲)주 19)은 삼가 쓴다.
주석 1)기자(箕子)
기자는 비간(比干)ㆍ미자(微子)와 더불어 은(殷)나라 삼인(三仁) 중의 한 사람이다. 은나라가 멸망한 후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물음에 답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대법(大法)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 주고는 조선의 평양(平壤)으로 옮겨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주석 2)〈홍범(洪範)〉에……없다
〈홍범〉은 《서경》 〈주서(周書)〉의 편명으로, 기자가 지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도가 평탄하며, 편당함이 없고 편벽됨이 없으면 왕도가 안정되며, 상도(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왕도가 정직할 것이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라고 하였다.
주석 3)음탕한……아니한다
위와 마찬가지로, 《서경》 〈주서 홍범〉에 나오는 말이다. 참고로, 그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릇 그 서민이 음탕한 벗을 두지 아니하며, 사람이 사사로운 덕을 두지 아니함은 오직 임금이 극을 짓기 때문이다.[凡厥庶民, 無有淫朋, 人無有比德, 惟皇作極.]"라고 하였다.
주석 4)깊이……것이다
《사기(史記)》 권84 〈굴원전(屈原傳)〉에 "군주를 보호하고 나라를 일으키며 그것을 반복하려거든 한편 가운데 깊이 마음을 쓸 것인저.[其存君興國, 而欲反復之, 一篇中, 三致意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5)역사서에……일컬었는데
《동몽선습(童蒙先習)》에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기자가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쳐서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푸니, 어진 이의 교화가 있었다.[周武王, 封箕子于朝鮮, 敎民禮義, 設八條之敎, 有仁賢之化.]"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주석 6)금성(錦城) 김군 명수(金君明叟)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주석 7)옷자락을 걷어 올리고서
남을 따르는 것을 형용한 표현이다. 《시경》 〈정풍(鄭風) 건상(褰裳)〉에 "그대가 나를 사랑하여 그리워할진댄, 내 치마를 걷어 올리고서 진수를 건너가리.[子惠思我, 褰裳涉溱.]"라고 하였다. 이 시에서의 치마는 아래옷의 옷자락을 의미한다.
주석 8)촉(蜀)나라……하였으나
당시에 선생처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올곧게 행동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를 괴이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선생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였음을 의미한다. 유종원(柳宗元)의 〈답위중립논사도서(答衛中立論師道書)〉에 "굴자의 부에 이르기를 '고을의 개들이 떼를 지어 짖는 것은 괴이한 것을 보고 짖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지난번에 들으니 '용ㆍ촉의 남쪽에는 항상 비가 내리고 해 뜨는 날이 적어 해가 뜨면 개가 짖는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지나친 말이라고 여겼었는데, 지난 6, 7년 전에 내가 남쪽지방으로 온 지 2년째 되던 겨울에 다행히 큰 눈이 고개를 넘어 남월 가운데의 여러 고을에 눈이 덮이니, 여러 고을의 개들이 모두 창황히 짖고 물고 미쳐 달리기를 여러 날 동안 하여 눈이 녹아 없어진 뒤에 이르러서야 그만두니, 나는 그런 뒤에야 전에 들은 바를 믿게 되었노라.[屈子賦曰, 邑犬群吠, 吠所怪也. 僕往聞庸蜀之南, 恒雨少日, 日出則犬吠. 予以爲過言, 前六七年, 僕來南二年冬, 幸大雪踰嶺, 被南越中數州, 數州之犬, 皆蒼黃吠噬狂走者累日, 至無雪乃已然後, 始信前所聞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에서 굴자는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주석 9)초빙……깃발
원문의 '궁정(弓旌)'은 고대에 선비를 초빙할 때 신물(信物)로 쓰이던 활과 깃발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보통 현자를 초빙하는 예물의 뜻으로 쓰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召公) 20년 조(條)에 "활로 사를 초빙하고 정으로 대부를 초빙한다.[用弓招士, 用旌招大夫.]"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석 10)확연(廓然)……공정하여
정호(程顥)가 《정성서(定性書)》에서 "확연히 크게 공평하여 사물이 오면 순히 응한다.[廓然大公, 物來而順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二程文集 卷3》
주석 11)기수(沂水)……기상
인욕(人慾)이 없고 천지의 만물과 함께 유행하여 천리(天理)가 충만한 기상을 말한다. 각자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제자 증점(曾點)이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을 쓴 어른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주석 12)〈주관(周官)〉의 육전(六典)
〈주관〉은 《서경》의 편명이다. 육전은 나라를 다스리는 여섯 가지 방면의 법으로, 치전(治典)ㆍ교전(敎典)ㆍ예전(禮典)ㆍ정전(政典)ㆍ형전(刑典)ㆍ사전(事典)을 말한다.
주석 13)병농합일(兵農合一)의……제도
부위제(府衛制)이다. 서위(西魏)에서 시작되어 북주(北周)와 수(隋)를 거쳐 당(唐)나라 초기까지 실시된 군사 제도로, 부병(府兵)들이 경사(京師)에 와서 숙위(宿衞)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부병제(府兵制)라고도 한다. 당나라 때의 부병은 종신토록 복역하고, 정벌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각자 별기(別騎)와 군량을 마련해서 출정하며, 정기적으로 경사에 숙위하거나 변경에 수자리를 섰다. 《新唐書 卷50 兵志》
주석 14)〈만언소(萬言疏)〉 한 소장은
〈만언소〉는 구언(求言)에 응하여 1659년(효종10) 효종 승하 후 지어졌으나, 점괘가 불길하여 실제로는 올리지 않은 상소이다. 대동법(大同法)이 근기(近畿) 지방에는 유효하나, 원방(遠方)인 경우에는 적실하지 못하며, 향병(鄕兵)의 창설을 주장하는 내용 등이 담겨있다.
주석 15)천지를……기르는
《중용장구》 제1장에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16)둔괘(遯卦)를 만나
소장을 올리지 못하게 됨을 의미한다. 송(宋)나라 영종(寧宗) 경원(慶元) 연간에 한탁주(韓侂冑)가 승상 조여우(趙汝愚) 등을 무함하여 축출하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주희가 봉사(封事)를 올려 한탁주의 간사함을 밝히고 조여우의 억울함을 변호하려고 하였는데, 제자들이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올리는 것을 말렸다. 주희가 계속 뜻을 굽히지 않자 채원정(蔡元定)이 점을 쳐볼 것을 권하였다. 점을 쳐보니, 소인이 뜻을 얻은 상황에서 군자는 집 안에 들어앉아 집 안의 일만 돌본다는 의미의 둔(遯)의 가인괘(家人卦)가 나와 상소의 초고를 불태우고 호를 둔옹(遯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周易筮述 卷8 推騐》 《吹劍錄外集》 《朱子大全 附錄 卷6 年譜》
주석 17)꼭꼭……두었으나
한유(韓愈)의 〈귀팽성(歸彭城)〉에 "상소문을 꼭꼭 싸서 골수에 간직한 채, 그래도 훌륭하다 부질없는 혼자 생각.[緘封在骨髓, 耿耿空自奇.]"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2》
주석 18)주자(周子)가……넓어진다
주자는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킨다. 주돈이의 《통서(通書)》 권20 〈성학(聖學)〉에 "밝으면 통하며, 동할 때에 마음이 곧아지면 공정하고, 공정하면 넓어지니, 밝고 통하며 공정하고 넓으면 거의 배울 수 있는 것이다.[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 庶矣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19)김유헌(金裕憲)
1781~?. 자는 치간(穉間), 본관은 안동이다. 부친은 김수신(金秀臣), 조부는 김성한(金星漢)이다. 상세하지는 않으나, 유학(幼學)으로서 순조(純祖) 4년(180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를 친 기록이 남아있다. 《국조방목(國朝榜目)》 석릉(石陵)은 안동의 옛 지명이다.
南圃先生集後序[金裕憲]
箕子洪範言無偏無黨。言無有淫朋。盖三致意焉。東人祖箕子。史稱仁賢之化。而朋黨之論。莫盛於我國。滔滔一國。殆無出於平蕩正直之路者。抑獨何哉。錦城金君明叟示其先祖南圃先生遺集。集僅二冊。詩文書疏記事若干篇。而其言議之公正。氣像之廣大。殆近世文字之所未見。嗚呼。先生眞可謂特立豪傑之士矣。孝顯之際。黨論益橫。賢者亦未免褰裳而趍之。先生於是時。講道林樊。華聞大彰。各立門戶者。無不欲藉公左右而輕重焉。先生挺然獨立。不偏不倚。論議之間。惟正是與。不知者譁然如見蜀日。而公論亦以此多之。公卿大夫交口尉薦之。弓旌之招。累及衡門。盛矣哉。非廓然大公無一毫私好。惡有以服人之心者能如是乎。其存心如是。故發之詩文者。皆悠然自得。與物煕煕。有沂水舞雩之氣像。經世通典。𥳑要而廣大。纖悉而均平。上可追周官六典之意而下不失爲府衛兵農之制。萬言一疏。尤惓惓於民生之休戚。而其究則以君上一心。爲位天地育萬物之本。雖其遇遯嘿嘿。緘封骨髓。而胷中所存。槩可見矣。嗚呼。言者心之發而文尤其著者也。此心一蔽於偏黨則是非闇而議論狹。雖粉飾藻繪以揜之。具眼者豈有不卞者哉。周子曰明則通公則溥。先生其庶幾乎。先生雖不用於時。先生之書。必傳於後。明叟其竢之。辛卯孟夏。知製敎石陵金裕憲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