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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호유사
- 서문(2)(錦湖遺事序(2))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호유사
서문(2)
우리 선조이신 금호공의 유사 한 권은 대개 말씀과 행실이 없어질까 염려하여 편차한 것이다. 우리 선조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효성을 타고나 일찍이 모친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생명을 살리셨다. 이 때문에 중종과 선조 두 조정에서 세 번의 표창이 있었으니 정려를 표시한 일, 발탁하여 등용한 일, 죄를 용서하여 사면한 일이 그것이다. 또 어진 스승과 벗들과 종유하면서 학문의 단서가 될 의론을 들으니, 송서교[宋贊]가 칭찬하여 “학문과 행실을 갖추었다.”라고 한 것과, 김학봉[金誠一]이 이른 ”학문으로 업을 삼았다.”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끼친 가르침이 자손에게 남아 충(忠), 효(孝), 열(烈)이 한 집 안에서 모두 나왔으니, 어찌 덕을 두텁게 하고 선을 쌓은 군자들이 아니겠는가. 아! 우뚝 솟은 정려문이 옛 마을 길가에 지금도 있어 사대부로서 그 앞을 지나는 자들은 모두 두 손을 모으고 예를 표하니 세상의 부자(父子)들은 반드시 모두 이를 보고 감동하여 권면한다.다만 남은 전적들은 세대가 멀어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실로 훗날의 사람들에게 끝없는 유감으로, 내가 일찍이 들었던 《대기(載記)》에 “선조에게 훌륭한 점이 있어 알고도 전하지 않는다면 어질지 못한 것이다.” $주 선조에게 …… 것이다 : 《예기》 〈제통(祭統)〉에 보인다.라고 한 것과 같다. 나는 이 점을 두려워하여 이에 뜻을 다하여 수집한 뒤에 〈세계〉를 앞머리에 두고, 각 조목을 〈저술〉, 〈유묵〉, 〈포장〉, 〈사실기〉, 묘도문 순서로 하였다. 또 행적 가운데 선인들의 글에 끼어 나온 것, 여러분들과 수창한 시, 종유했던 스승과 벗들에 대한 기록을 끝에 부록하여 하나의 책자를 이루었다. 우리 선조의 언행 전말을 여기에서 증명할 수 있어 장차 판에 새겨 불후하기를 도모하니 감히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손들로 하여금 집에 간직하여 수시로 열람하여 갱장(羹墻)의 사모 $주 갱장(羹墻)의 사모 : 죽은 사람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이나 그를 앙모(仰慕)하여, 앉아서는 요 임금을 담장〔墻〕에서 보고, 밥을 먹을 때면 요 임금을 국〔羹〕에서 보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에 부치고자 하는 것이다.숭정(崇禎) 후(後) 두 번째 을사년(1725) 겨울 11월 하순에 현손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錦湖遺事序(2)
吾先祖錦湖公遺事一通, 蓋慮言行之泯沒, 而爲之纂次者也. 吾先祖自在童幼時, 誠孝出天, 嘗値母夫人病篤, 血指蘇命, 此所以中宣兩朝, 有三褒之旨, 而旌表之, 擢用之, 寬宥之也. 且從賢師友, 得聞緖論, 宋西郊所稱學行俱備, 金鶴峯所謂學問爲業者, 有以也. 若其遺敎在子孫, 至使忠孝烈竝生於一家, 豈非厚德積善之君子人耶. 噫! 巍然旌棹之門, 見在故里路傍, 而士大夫過其前者, 咸拱式之, 則世之爲父子者, 必皆觀感激勵于斯, 而第其遺籍, 世遠無存, 實爲後人無窮之憾也. 嘗聞戴記曰 : “先祖有善, 知而不傳, 不仁也.” 斗冬有懼, 於是, 乃極意蒐集, 首錄世系, 此敍各條曰 著述也 遺墨也 襃獎也 事實記也 墓道文也. 又以行蹟之雜出於先輩文字者及諸公之所酬唱詩章, 及所從遊師友, 附諸末端, 仍成一冊子. 吾先祖言行顚末, 於此可徵, 將鋟梓圖不朽, 非敢擬示諸人也, 只欲使子孫, 家藏而時閱之, 以寓羹牆之慕云爾. 崇禎後再乙巳冬十一月下浣, 玄孫 斗冬, 謹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