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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갈명 【서문과 함께 적다.】(墓誌銘 【竝序】)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호유사 / 저술(著述)
묘갈명 【서문과 함께 적다.】
중종 경자년(1540)에 호남 나 씨의 자제들이 어려서는 상(象)에 맞춰 춤을 추고주 54) 정려로 표창을 받았으며 부역과 세금을 면제받았으니 곧 손가락을 잘라 피를 올려 어머니를 소생하게 했기 때문이다. 장성하여 더욱 명성이 높아져 선조 원년 무진(1568)에 포장되어 벼슬에 천거되었다.주 55)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이르러 또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는 가르침을 널리 알렸고, 시상(柴桑)주 56)에서 벗어나 산중턱 학과 메추라기 사이에서 날갯짓을 게을리 했다.
아! 두 임금의 조정에서 세 번이나 포장을 받은 것이 경전(經典)에서 이른바 "하늘과 땅의 바른 도리."주 57)인데 모두 이 사람을 말하는 것 또한 어찌 유래한 바가 없겠는가. 대개 세상에서 나 씨에게 기대를 건 것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 나부(羅富)에게서 시작되었고, 공조전서(工曹典書) 나진(羅璡)과 전농시(典農寺) 정(正) 나공언(羅公彦)이 가장 현달했다고 전한다.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 나집(羅諿)이 덕의 기초를 닦아 나자강(羅自康)은 무안현감을 지냈고, 나계조(羅繼祖)는 장사랑을 지냈고,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4대가 박식하고 장엄한 절개가 있었다. 성종 때 이름난 신하로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된 금남 선생(錦南先生) 최부(崔溥)가 외할아버지이고 또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가 스승이 되어 선조들의 영광을 품고 몸으로 먼저 올바름을 깨우치니 이후는 알 만하다. 그러므로 고을에서는 일찍부터 강남에 훌륭한 효자가 있다고 일컬었고, 동학들은 마치 마문(馬門)과 정현(鄭玄)주 58)처럼 추존했다고 한다.
명종 을묘년(1555) 국자생(國子生)이 되었으나, 기사년(1569)에 큰형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추천을 받아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다. 신미년(1571) 이후 선릉 참봉(宣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에 연이어 임명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다. 갑신년(1584)에 이산 현감(尼山縣監)이 되어 부호들을 억누르다가 상관을 거슬러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는데 고을 사람들이 비석에 시를 새겼으니 마치 조청헌의 거북과 학주 59) 같은 말들이 담겼다. 이로부터 도서(圖書)와 송죽(松竹)을 즐기며 천기가 깊었으니 이른바 기축년(1589)의 화는 장계(狀啓)와 갈문(碣文)에 상세히 있다. 당시 옥사를 다스린 자가 화로를 갖추고서 모두 해치려고 했으나 공의 부자는 형장의 귀신을 면했으니 하늘의 해가 머리에 임한 듯 다행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다섯 아들이 모두 유배가게 되어 머리 털 한 올 마냥 쓸쓸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병신년(1596) 12월 23일에 병으로 돌아가셨으며 그의 태어난 해가 을유년(1525) 2월 28일이니 향년 72세다. 무안의 주룡(住龍) 나루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세 아들은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공이 있어 여러 차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공의 휘는 사침(士沈)이고, 자(字)는 중부(仲孚)이다. 첫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두었고 장지는 장흥동(長興洞)에 있다.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첨사(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고 공과 함께 합장하였다. 두 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나덕명(羅德明)은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고, 나덕준(羅德峻)은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냈고, 나덕진(羅德進)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덕윤(羅德潤)은 진사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고, 나덕현(羅德顯)은 효행으로 명성이 있어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추증되었으며, 나덕신(羅德愼)은 무과에 급제하여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냈고, 나덕헌(羅德憲)은 무과에 급제하여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지냈다. 큰딸은 윤항(尹抗)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위홍주(魏弘宙)에게 시집갔다. 나덕명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이소(羅以素), 나인소(羅因素), 나성소(羅成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또 나취소(羅就素)가 있다.
나덕준은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두었는데,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계소(羅繼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지냈고,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 중추(同知中樞)를 지냈고 또 나치소(羅緻素)와 나경소(羅經素)가 있다. 주부(主簿)를 지낸 김잡(金磼)과 최광언(崔光憲)은 그의 사위이다. 나덕윤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함안 군수(咸安郡守)를 지냈고, 나유소(羅由素)와 나의소(羅宣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 나덕현은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나익소(羅益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후소(羅後素)와 나득소(羅得所)는 피눈물을 흘리며 상례를 이기지 못하는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또 나상소(羅尙素), 나순소(羅純素), 나중소(羅重素)가 있다. 정환(鄭換)은 그의 사위이다. 나덕신은 딸 둘을 두었는데, 민희일(聞喜一)과 유천(柳遷)은 그의 사위이다. 나덕헌은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나수소(羅守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태소(羅泰素)는 종사랑(從仕郎)을 지냈고, 또 나정소(羅貞素)가 있다. 진사 김용건(金用健)과 이준신(李儁臣)은 그의 사위이다. 윤항(尹抗)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우탕(禹湯)이다. 위홍주(魏弘宙)는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위산보(魏山寶)와 위정보(魏廷寶)는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고, 또 위국보(魏國寶)가 있다. 주부(主簿)를 지낸 정경일(鄭敬一)과 최환(崔渙)은 그의 사위이다. 내외의 후손이 천백 명에 이른다.
이시랑(李侍郞) 서우(端雨)는 묘갈명에 "자식들이 모두 훌륭하여 사람들은 육룡(六龍)이라 불렀으니 가정의 가르침이 세상을 구제하고 행실을 아름답게 함에 이른 것이 있다. 예컨대 나덕신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노량(露梁)에서 왜적을 섬멸하였고, 나덕헌은 여러 장수들을 따라 안현(鞍峴)에서 이괄(李适)을 물리쳤으며, 사신으로서의 명을 받들고 후금(後金)의 조정에 들어가 절개로 항거하여 굽히지 않았던 일과 같은 것은 충(忠)이다. 예컨대 나덕현이 부모를 잘 봉양한 일, 나득소가 삼년상에 몸을 상하여 죽게 된 일들은 효(孝)이다. 예컨대 윤항에게 시집간 공의 큰딸, 나덕현의 아내 정씨, 김잡에게 시집간 덕준의 큰딸, 수소의 아내 김씨 등이 모두 순절하여 정려를 표창 받은 것은 열(烈)이다. 한 집안에 삼강(三網)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아! 세상에 어찌 흔한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이로 인하여 삼가 공의 행적을 대략 개관해 보건대, 공은 다리 살을 베어 부모님께 올리고 눈물로 무덤 가 송백나무 마르게 했으니 효의 근본이다. 부모와 형제들과 사이가 벌어진 것 없이 힘껏 인륜을 앞다투어 실행했으니 효의 가지이다. 자기를 단속하고 벼슬을 경계하며 다른 사람을 마땅하게 하고 남을 기쁘게 했으니 효의 잎이다. 마땅히 찬란하고 아름다워 만세토록 한 가문의 기둥이 될 것이다. 이제 이 글로 묘비명을 삼는다.
지극히 어질고 지극히 신묘함은 至仁至神
오직 그대와 오직 하늘 뿐 惟君惟天
하늘이 포상하사 명성 알려지고 褒而誼芬
하늘이 도우사 경사가 영원하리니 祐而慶綿
군자의 무덤이라 하노라 曰君子之阡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겸(兼)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 민창도(閔昌道)주 60)가 쓰다.
- 주석 54)어려서는 …… 추고
- 원문 '무상(舞象)'은 《예기》 〈내칙(內則)〉에 "13세가 되면 음악을 배우고 시가(詩歌)를 읊으며 작무(勺舞)를 배운다. 15세 이상이 되면 상무(象舞)를 배우고 활쏘기 및 말 다루는 법을 배운다. 20세가 되면 관례(冠禮)를 행하고 비로소 예(禮)를 배운다.〔十有三年, 學樂誦詩舞勺, 成童舞象, 學射御, 二十而冠, 始學禮.〕"라는 말이 나온다.
- 주석 55)천거되었다
- 원문 '천섬(薦剡)'은 추천(推薦)이나 천거와 같은 말이다. 중국 섬계(剡溪) 지방에서 생산된 종이에 추천을 쓴 데에서 유래된 말로, 인재를 천거하는 공문서(公文書)를 말한다.
- 주석 56)
- 주석 0)시상(柴桑)
- 진(晉)나라 때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돌아와서 시상에서 은거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 주석 57)하늘과 …… 도리
- 천지간의 당연한 이치로서 변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5년 조에 "대저 예라는 것은 하늘의 떳떳한 도이고, 땅의 후한 덕이며, 사람이 행하는 길이다.〔夫禮, 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라는 말이 나온다.
- 주석 58)마문(馬門)과 정현(鄭玄)
- 마문(馬門)은 마융(馬融)을 지칭한다. 정현(鄭玄)은 후한(後漢)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둘 모두 경(經)을 주석하여 이름을 날렸다. 《南史 王僧虔列傳》
- 주석 59)조청헌(趙淸獻)의 거북과 학
- 조청헌은 송(宋)나라 인종(仁宗), 신종(神宗) 때의 조변(趙抃)을 말한다. 청헌(淸獻)은 그의 시호이다. 조변이 성도지부(成都知府)를 여러 번 지냈는데, 치적이 있었다. 그가 성도로 부임할 때, 거북 한 마리, 학 한 마리를 가지고 갔고, 재임(再任) 때는 그 거북과 학마저 버리고 다만 종 하나뿐이었다.
- 주석 60)민창도(閔昌道)
- 1654~1725.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사회(士會), 호는 화은(化隱)이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곽산의 개원사(開元寺) 불량비문(佛糧碑文)과 영변의 보현사(普賢寺) 월저대사비문(月渚大師碑文)을 찬하였다.
墓誌銘 【竝序】
中宗庚子, 湖南有羅氏子裁舞象膺旌棹蠲符, 則血指甦天只故之以長而愈騫登, 宣廟元年戊辰, 薦剡牽絲於獎, 至己丑逆獄, 乃又渙發求忠孝門之諭, 脫柴桑倦翮於半山鶴鶉中. 噫! 致兩朝三褒者, 經所謂天經地義, 皆是物也, 亦豈無所自乎! 蓋世之望於羅也, 始乎監門衛上將軍富, 工曹典書璡, 典農寺正公彦, 最顯傳. 式目都監錄事諱諿, 基于德, 則以諱自康務安縣監, 諱繼祖將仕郞, 諱逸孫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諱晊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爲四世以博學壯節. 成宗朝, 名臣司諫院司諫 贈禮曺參判錦南先生崔公諱溥爲外翁, 又以履素齋李仲虎爲師, 其胚前光, 而體先覺韙, 而後可知也. 故鄕黨早有江巨孝稱, 同學推挹如馬門鄭玄云. 明宗乙卯, 補國子生, 己巳遭伯氏喪棄若云, 薦拜慶基殿參奉歸. 辛未以後, 除命相續以宣陵參奉, 義禁府都事, 宗廟署直長, 陞司憲府監察. 甲申, 監尼山縣坐, 抑溫戶强工, 奮髥而歸, 邑人刻碑詩, 如趙淸獻龜鶴語. 自是婆婆圖書松竹, 天機也深, 所謂己丑之禍, 則詳在狀若碣文中. 時治獄者, 烘爐叢忮, 公父子之免桁楊之鬼, 則天日之臨頭也, 五子皆流竄, 凜凜一髮, 吁其危矣. 丙申十二月二十三日, 以疾卒, 距其生乙酉二月二十八日, 得年七十二. 葬于務安住龍渡, 向巽之原, 以三子俱有原從功, 屢贈至左贊成. 公諱士忱, 字仲孚. 前配坡平尹氏, 府使彦啇之女, 擧四子, 葬在長興洞. 繼配光州鄭氏, 僉使虎之女, 擧三子二女, 葬祔公, 皆贈貞敬夫人子. 德明進士義禁府都事. 德峻報恩縣監. 德進早夭. 德潤進士司憲府監察. 德顯以孝聞, 贈司饔院參奉. 德愼武科靈巖郡守. 德憲武科京畿水使. 女長適尹沆, 次適魏弘宙. 德明四子, 以素 因素 成素武科宣傳官, 就素. 德峻五子二女, 纘素宣務郞, 繼素武科价川郡守, 緯素文科同知中樞, 緻素 經素. 主簿金磼 崔光憲, 其婿也. 德潤三子, 繪素武科咸安郡守. 由素 宜素文科禮曺正郞. 德顯六子一女, 益素宣務郞. 後素 得素 有至行泣血不勝喪. 尙素 純素 重素. 鄭渙, 其婿也. 德愼二女, 閔喜一 柳遷, 其婿也. 德憲三子二女, 守素宣務郞, 泰素從仕郞, 貞素. 金用健 進士, 李儁臣, 其婿也. 尹沆一子, 佑湯. 魏弘宙三子二女, 山寶 廷寶, 皆武科縣監, 國寶. 主簿鄭敬一 崔渙, 其婿也. 內外雲仍多, 至千百. 李侍郞瑞雨之墓碣曰 : "公有子皆賢人, 稱六龍. 庭訓所及, 世濟懿行. 如德愼, 從李統制舜臣, 殲賊于露梁. 德憲從諸將, 蹙适于鞍峴, 奉仕虜庭, 抗節不屈, 忠矣. 如德顯之善養, 得素之毁死, 孝矣. 如公之女適尹沆者, 德顯妻鄭氏, 德峻女適金磼者, 守素妻金氏, 竝殉節旌閭, 烈矣. 一門而三綱備, 嗚呼! 世豈多有也." 不侫因是竊槪, 公雷股和糜, 玉淚枯栢, 孝之本也. 無間昆弟, 力爭倫紀, 孝之枝也. 律己箴官, 誼物孚人, 孝之葉也. 宜乎振振彬彬, 爲一門萬世棟樑哉. 是可以賁諸幽銘曰 : "至仁至神, 惟君惟天, 褒而誼芬, 祐而慶綿, 曰君子之阡." 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 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閔昌道 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