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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삼고(錦城三稿) / 금호유사 / 저술(著述)

자료ID HIKS_Z999_01_B00028_001.008.0004.TXT.0012
포장
중종 때 정려를 세워 표창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였다. 【어떤 이는 정려를 세워 표창한 일이 가정(嘉靖) 갑진년(1544)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지만 자세하지 않다. 본도 감사의 계문(啓聞)과 전교(傳敎)의 글에는 모두 증거가 없다. 이후 만력 갑인년(1614) 가을에 광해군이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주 35) 등에게 《동국신속 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을 충신 1권, 효자8권, 열녀 8권으로 편차하여 그림을 그리고 사적을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공의 사적에 이르러서는 '사침단지(士沈斷指)'를 제목으로 삼아 그 아래 손가락을 깨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끝에 사적을 적었는데 "현감 나사침은 본관이 나주이다. 효성을 타고나 나이 16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올렸더니 병이 즉시 나았다. 중종주 36)께서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다."라고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혼탁한 조정의 간신 이이첨(李爾擔)주 37)의 성명 또한 일찍이 효자의 반열에 든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이 세상에 유행하지 않았고 당초 간행본 중에 여전히 전해지는 것이 있어 이처럼 덧붙여 보인다.】
만력 무진년주 38) 본도의 감사 송찬(宋贊)의 계본(啓本) 【본주의 목사 한복(韓輹)이 논하여 알린 것을 따른다. 송찬은 자가 치숙(治淑)이고, 호는 서교(西郊)이며, 진천(鎭天) 사람이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생원시에 장원을 하였고, 경자년(1540)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일찍이 무진년(1568)에 호남의 방백이 도내의 훌륭한 선비를 천거했는데 공이 그 가운데 으뜸이었고, 그 다음으로 같은 고을의 전 참봉 김응기(金應期), 유학(幼學) 김천일(金千鎰), 장흥(長興) 진사 유호인(兪好仁), 김윤(金胤) 등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그대로 대신들이 포장 교지를 의논하라는 일이 있었다.】
생원 나사침(羅士沈)이 모친의 병이 수개월 간 치료되지 않자 의술로 낫게 할 수 없음을 슬피 여겨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약과 함께 올렸더니 어머니의 병이 곧바로 나았다. 중종 때 임금께 알려져 정려로써 표창을 받았다. 그 사람됨은 천성이 진실하고 순박하며 학문과 행실을 겸비하여 그의 부모형제간에도 다른 말이 없었고 일을 처리하고 남들과 만날 때에도 믿음과 의리를 실천했고 부모의 상에도 한결같이 예를 따랐으니 시묘살이를 하는 전후에 한 번도 집에 이른 적이 없었으며 추모함에 정성스럽고 독실하게 하고 제사를 지낸 때도 반드시 삼가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할 때에도 불쌍히 여겨 지극 정성으로 했으며 일찍이 과거의 공부를 하지 않아 명성이 알려지거나 현달하기를 구하지도 않아 온 고을 사람들이 그의 행실에 모두 감복했기에 선조께서 교지에 "나사침 등의 행실은 지극히 가상하여 포장할 만한 일이니, 해당 부서는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무진년 5월 15일에 나중묵(羅仲黙) 【사선(士愃)이다.】 의 형이 내게 고하기를 '아침에 이조판서 이공을 만났는데, 나사침과 유호인은 품계에 맞는 직을 내리고, 김천일에게는 식물(食物)을 내려 학업을 마치도록 하고, 김응기에게도 식물을 내리고, 김윤에게는 정려문을 표창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줄 것이니, 이는 대개 이조와 대신들이 의논하여 정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미암은 유희춘(柳希春)으로, 자는 인중(仁仲)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호는 성은(城隱)이다. 유계린(柳桂隣)의 아들로, 공과는 이종형제 사이다. 정덕 계유년(1513)에 태어나 배움을 널리 했고 기억하는 데 힘을 쏟은 인물이다. 가정 정유년(1537) 생원에 합격하고, 무술년(1538) 문과에 급제하였다. 을사년(1545)에 권세 있는 간신들의 재앙이 있던 날, 정언(正言) 벼슬에 있다가 대사헌 민제인(閔齊仁) 등과 함께 연좌되어 파직 당하였다. 정미년(1547)에 제주로 유배를 갔다가, 무신년(명종 3, 1548)에 종성으로 이배되어, 을축년(1565)에 특별히 은진(恩津)으로 이배되었다. 선조 초에 교리로서 부름을 받고 이어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여 부제학(副提學)으로 경학을 시강(侍講)하였다. 정축년(1577) 5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주석 35)유근(柳根)
1549~1627. 자는 회부(晦夫)이고, 호는 서경(西坰)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황정욱(黃廷彧)의 문인이다.
주석 36)중종
원문 '恭僖大王'은 중종(中宗)을 말한다. 공희(恭僖)는 중중의 시호이다.
주석 37)이이첨(李爾瞻)
1560~1623. 자는 득여(得輿)이고,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가족을 이끌고 영남 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을 넘다가 관군에게 잡혀 참형되었다.
주석 38)만력 무진년
만력(萬歷) 연간에 무진년은 없다. 아마도 오기(誤記)인 듯하다. 주석을 참고하면 무진년은 선조의 원년이며 1568년에 해당되므로 융경(隆慶)이 맞다.
襃獎
中宗朝, 旌閭復戶. 【或云, 旌表在於嘉靖甲辰年而未詳. 本道監司啓聞及傳敎文字俱無徵 △後至萬曆甲寅秋, 光海命晉原府院君柳根等, 編次東國新續三綱行實, 忠臣一卷, 孝子八卷, 烈女八卷, 啚像記事. 而至於公之事蹟, 則以士忱斷指爲題目, 其下畵斷指之狀, 未端記事曰 : "縣監羅士忱羅州人, 誠孝出天, 年十六, 母病斷指, 以進卽愈, 恭僖大王朝旌門."云云. 及仁祖反正後, 以昏朝蘖臣 李爾瞻姓名, 亦嘗冒入於孝子之列, 故其書不得行世, 而當初刊出本, 猶有傳者, 附見如此.】
萬曆戊辰, 本道監司宋贊啓本 【從本州牧使韓輹論報也. 宋贊, 字治叔, 號西郊, 鎭川人. 嘉靖丁酉, 生員壯元, 庚子文科, 官至贊成. 嘗在戊辰, 以湖南伯啓薦道內遺逸之士, 以公居首, 其次同州前參奉金應期 幼學金千鎰 長興進士劉好仁 金胤 凡五人也, 仍有議大臣襃獎之敎】
生員羅士忱, 母病數月不瘳, 悶無醫術, 自斷手指和藥以進, 母病卽愈已. 在中廟朝, 事聞旌表. 爲人性稟眞醇, 學行俱備, 其於父母昆弟之間, 人無異言. 處事接物之際, 信義竝行, 父母之喪, 一遵禮制, 前後廬墓, 一不到家, 追慕誠篤, 祀事必謹, 賙窮恤乏, 至誠惻怛, 早廢擧業, 不求聞達. 一鄕之人, 咸服其行. 宣祖敎曰 : "羅士忱等行實, 至爲可嘉襃獎事, 令該曺議于大臣."
柳眉巖日記曰 戊辰五月十五日羅仲黙 【士愃】 兄報云 朝見吏書李公則士忱與劉好仁, 相當職除授, 金千鎰賜食物勉卒學業, 金應期賜食物, 金胤旌門復戶, 此蓋銓曺與大臣議定者也. 【柳眉巖, 諱希春, 字仁仲, 善山人, 號城隱. 桂隣之子, 與公爲姨從兄弟也. 生于正德癸酉, 博學强記. 嘉靖丁酉生員, 戊戌文科. 乙巳權奸釀禍之日, 以正言, 折大司憲閔齊仁等, 仍被坐罷. 丁未配濟州, 戊申移配鐘城, 乙丑量移恩津. 宣廟初, 以校理承召, 歷官大司憲, 吏曹參判, 特陞資憲長, 以副提學侍講經學. 丁丑五月卒. 贈左贊成, 諡文節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