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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승훈랑 행 의금부도사 소포 나공 사실기(有明朝鮮國承訓郞行義禁府都事嘯浦羅公事實記)

금성삼고(錦城三稿) / 소포유고부록

자료ID HIKS_Z999_01_B00028_001.005.TXT.0001
조선 승훈랑 행 의금부도사 소포 나공 사실기
공의 휘(諱)는 덕명(德明)이고, 자는 극지(克之)이며, 호는 구암(龜巖) 또는 소포(嘯浦)이고, 성은 나 씨(羅氏)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고려 시대 나부(羅富)는 감문위(監門衛)주 1) 상장군(上將軍)으로 곧 공의 시조가 된다. 이후 공조전서(工曹典書) 나진(羅璡)에 이르러 매우 귀하게 되었다. 나진은 전농시(典農寺)주 2) 정(正) 나공언(羅公彦)을 낳았는데 홍무(洪武)주 3) 연간에 왜적을 물리친 공훈이 있어 대대로 호남의 명문집안이 되었다.
증조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조부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부친 나사침(羅士沈)은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지극한 행실로 세상에 알려져 중종(中宗) 때 정려를 세워 표창하고 조세와 부역을 면제를 받았다. 선조(宣祖) 초에 관찰사(觀察使)가 그의 어짊을 천거하여 여러 번 관직을 지냈고 벼슬이 이산 현감(尼山縣監)주 4)에 이르렀다. 그의 거사비(去思碑)주 5)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
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 있구나 行李蕭然古人風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사도 첨사(蛇渡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각기 세 아들을 낳았기에 그들을 육룡(六龍)이라 불렀는데 공은 그 중 장자로 자질과 품성이 빼어나고 훌륭하여 식견을 지닌 자들은 원대한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나이 8~9세에 길에서 고을 아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아전이 예로써 대하지 않자 공은 이치를 들어 꾸짖으니 아전이 곧바로 숙연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탄복했으니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만력(萬曆)주 6) 기묘년(1579) 진사에 급제하니 때는 선조 12년이었다. 전조(銓曹)에서 공의 명성을 듣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했는데, 임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 화려한 명성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았다. 두 아우 나덕준(羅德峻)과 나덕윤(羅德潤)은 정곤재(鄭困齋)주 7)의 문인으로 모두 훌륭하다는 명성이 있었지만 마침내 그들을 좋게 여기지 않은 자들의 시기를 받았다.
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주 8)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아뢰는 자가 있어 위관(委官) 정철(鄭澈)주 9)이 기미를 틈타 있지도 않은 죄를 꾸몄다.주 10) 정암수(丁巖壽), 양천경(梁千頃), 홍천경(洪千璟) 등이 정철의 뜻을 받들어 무고하는 상소를 올려 세상의 유명 인사 30여명을 모함하였다. 또 공의 부자 이름을 거론하면서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등이 정여립과 더불어 매우 친밀하게 교유를 하다가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는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빠져나가려고 하니 모두 죄를 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아우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장을 심사하는 자리에 나가 큰 소리로 그들을 배척하였다.
정암수의 상소가 임금에게 들어가기에 이르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의 변란을 틈타 몰래 사악하고 간교한 상소를 올려 훌륭한 재상과 이름 있는 경들까지도 배척하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가 텅 비게 한 이후에야 그만둘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간교한 사람의 사주를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 의금부에 명하여 정암수 등 10명을 잡아들이도록 하셨다. 이에 정철이 두려워 대관(臺官)과 태학생(太學生)들로 하여금 혹은 장계를 올리도록 하고 혹은 글을 올리도록 하여 임금의 명이 중단되었다.
얼마 후 무안 유생 배명(裵蓂)이 곤재(困齋)와 공의 부자의 원통한 상황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상소하였으나 정철은 끝내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한 것으로 죄목을 엮어 공의 여섯 부자가 일시에 심문을 받게 되었다.
찬성공(贊成公)은 특별히 효로 용서받았고, 공은 경성(鏡城)주 11)으로 귀양 가게 되었으며, 여러 아우들은 각지에 나뉘어 유배 갔다. 공이 유배지에 이르러 시를 지어 아우에게 척강(陟岡)의 회포주 12)를 부쳤다.

변방의 구름 높이 떠가고 기러기 무정한데 關雲迢遞鴈無情
어느 곳 외로운 성에서 부모형제 그리나 何處孤城憶父兄
촛불 깜박이는 깊은 밤 서리 맞은 잎 소리에 殘燭夜深霜葉響
꿈속의 연못 풀은 자라나지 못하네 夢中池草不能生

임진년(1592)에 섬나라 오랑캐들이 들끓어 적장 가등청정(加籐淸正)이 말을 달려 쳐들어오니, 북쪽 변방의 회령(會寧)주 13)사람 국경인(鞠景仁)주 14)이 마침내 난을 일으켜 왕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 및 재신(宰臣) 김귀영(金貴榮),주 15) 황정욱(黃廷彧)주 16) 등을 잡아두고 왜적에게 대응하였다. 이에 진보(鎭堡)주 17)의 배반한 군졸들이 지키던 장수들을 다투어 결박하고 적들에게 항복했으니 종성(鍾城)주 18)사람 국세필(鞠世弼)이 바로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주 19),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 등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자, 공은 함께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한백겸(韓百謙)주 20)과 함께 그들의 계획에 힘을 모으기로 찬성하였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견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등도 역시 와서 모여 적의 우두머리를 잡아 목을 베어 군성(軍聲)이 크게 떨쳐졌다. 이듬해 봄에 별장(別將) 이붕수(李鵬壽)주 21)와 만호(萬戶) 이희당(李希唐)이 왜적과 전투를 하던 도중 같은 날 죽었다. 공과 정문부가 시를 지어 이 일을 슬퍼했는데, 이 일은 택당(澤堂) 이식(李植)주 22)이 편찬한 《북관지(北關志)》주 23)에 실려 있다. 그해 공이 비로소 죄를 용서받고 풀려나 돌아왔다.
병신년(1596)에 찬성공(贊成公)의 장례를 무안(務安) 주룡(住龍) 나루에서 치르고 묘 아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공이 여러 동생들과 함께 주룡으로부터 은적산(銀積山)주 24)으로 난리를 피하려할 때 고향사람 효자 이유경(李有慶)이 공과 함께 나루를 건너고자 하였다. 공이 이공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먼저 건너십시오."라고 하자, 이공이 사양하면서 "주객의 차이가 있으니 내가 비록 뒤에 떨어져 낭패를 당한다 한들 형세가 그러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내가 만약 먼저 나루를 건너간다면 우리 집의 종들이 반드시 그대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끝내 그를 먼저 건너게 하였다.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의리를 지키는 데 피차 양보함이 없음을 칭찬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주룡 소포 위에 정자를 짓고 편안히 즐기면서 일생을 마쳤다. 매번 선산을 성묘할 때면 회포를 노래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아침마다 선산에 올라 朝朝上丘壟
떠나려다 또 주저하네 欲去還躕踟
모시기에 정성을 다하여 度幾侍誾誾
늘 평생의 거동 보이리라 一見平生儀

공은 가정(嘉靖)주 25) 신해년(1551)에 태어나 60세에 돌아가셨으니 만력(萬曆) 경술년(1610) 5월 28일이었다. 찬성공의 묘 아래에 장사 지냈다. 공은 키가 매우 크고 위용이 경외할만하여 그를 본 사람들은 산하 간의 기운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본주의 목사는 공과 나이가 비슷했으나 반드시 그를 '노형'이라고 불렀고, 대여섯 살 적은데도 반드시 '어르신'이라고 불렀으니 그 공경하고 예우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고을 사람 문화(文化) 임환(林懽)은 재주와 기개로써 당세에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공은 그와 더불어 잘 지냈다. 한번은 산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임공이 먼저 도착하여 마치 주변에 사람이 없는 듯 거침없이 담론하다가, 공이 뒤이어 이르자 임공은 자기도 모르게 기운을 잃고 공이 말하기만 하면 '예, 예' 하고 대답만 하였다. 당시 절의 승려 가운데 이를 목격한 자가 이 미담을 전하였다. 성품 또한 호방하여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았고 세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사람을 인정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루는 화장실을 가려는데, 지주가 갑자기 이르렀다. 공이 가까스로 맞아 당에 오르고는 곧장 섬돌 위에다 볼일을 보고 태연하게 대처하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당상에 설사를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라고 하자,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감복하였다.
공은 이미 남쪽에서도 명성이 알려져 마음으로 존경하는 사람들 모두 일면식이라도 있기를 원하여 여러 벼슬아치들이 연이어 찾아왔는데 맞이할 때의 예모는 자못 단출하였다. 그러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주 26)가 영암(靈巖)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주룡으로 공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문에서 응대하는 자로 하여금 곽거사가 당도했음을 들어가 전하게 하자, 공은 허둥지둥 옷과 갓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채 당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 말하기를 "공이 평소 남에게 굽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어인 일로 거사에게만 공께서 지극히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은 마침내 곽공과 토론하며 회포를 풀었다. 그 뒤 곽공이 조정으로 돌아가 임금이 원수(元帥)의 재주를 가진 사람에 대해 묻자 공을 천거했다고 한다.
공은 비록 초야에 있었지만 뜻과 절개로 시대를 걱정하여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결집하는 방법을 상달하여 기축년(1589)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을 신원할 것과 잘못된 정치를 혁파하고 고역을 균등하게 할 수 있는 계책을 청하였고 조목조목 나열한 바를 두어 각 영에 설치한 둔전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 병신년 상소와 기해년의 저촉은 병서와 그림을 통해 모두 징험할 수 있다.
공이 한번은 여름날 주룡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산모퉁이에서 큰 뱀이 기어와 배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공이 잠에서 깨어 그것이 뱀인 줄 알고는 끝내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스스로 떠나가기를 기다렸으니 그 기량과 신중함이 이와 같았다. 또 장을 청소하는 방법에 능통하여 저녁마다 물은 한 그릇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토해내 반드시 그 그릇에 가득 찼다. 홍시 같은 과일도 삼켰다가는 한참 후에 씨와 벌레를 토해내니 사람들 중 기이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시를 쓸 때는 반드시 웅대하면서도 맑고 씩씩하여 국한 되지 않는 훤칠한 기개가 있으나 이는 공에게 그저 여사(餘事)일 뿐이었다. 읊조린 시 몇 수가 있기는 하지만 글자에 잘못된 것이 많아 그 진수를 전할 수가 없으니 탄식할 만하다.
공이 돌아가시자 아우 나덕윤(羅德潤)이 글을 지어 곡했으니 대략 다음과 같다.

가슴에는 운몽을 삼키고주 27) 胸呑雲夢
말은 보불을 토하도다주 28) 詞吐黼黻
뜻은 우주를 넘고 志凌宇宙
눈은 천지를 초월하네 眼空霄壤
용처럼 강가에 누워 龍臥江潭
자신을 관중과 제갈공명에 견주었네 自擬管葛

공의 평소 뜻을 잘 묘사하였다고 할 것이다. 슬프다! 하늘이 공을 세상에 낼 때는 훌륭한 일을 하도록 한 것인데 끝내 한 번도 시험해 보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다. 공의 첫째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문과에 급제하여 담양(潭陽) 부사(府使)를 지낸 김경헌(金景憲)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유절(劉節)의 따님이다. 모두 나주(羅州) 장흥동(長興洞)에 장사를 지냈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이소(羅以素)와 나인소(羅因素)는 김 씨가 낳았고, 나성소(羅成素)와 나취소(羅就素)는 유 씨가 낳았다. 나성소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나이소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나유(羅褕), 나심(羅襑), 나규(羅袿), 나현(羅袨)이다. 나인소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나결(羅袺), 나격(羅䙐)이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유시화(柳時華)에게 시집갔다. 또 서자를 두었는데 나겹(羅裌)이다. 나성소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참봉(參奉) 이소(李韶)에게 시집갔다. 또 서자로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표(羅表), 나방(羅衤方 ), 나원(羅袁)이다. 나취소는 후손이 없다. 공의 자손이 대를 이어 점차 쇠락하다가 나결의 손주 나만영(羅晩榮)이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올라 집안의 명성을 다시 떨치니 이를 통해 남은 경사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 공이 돌아가신 지 어느덧 106년이 되었다. 그 평생 행적이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증험할 것이 없으므로 간략하게나마 보고 들은 것을 기술한다. 만에 하나라도 훗날 공에 대해서 더 논할 것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하여 공의 간략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 이후 79년 을미년(1715) 7월에 종증손(從曾孫) 생원(生員)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쓴다.
주석 1)감문위(監門衛)
고려 시대 육위의 하나로,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과 종3품의 대장군(大將軍)의 통솔 아래 1영의 군대가 있었다.
주석 2)전농시(典農寺)
고려 말기에 국가의 대제에 쓸 곡식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주석 3)홍무(洪武)
중국 명나라의 초대 왕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당시의 연호로, 1368년부터 1398년까지 사용되었다.
주석 4)이산 현감(尼山縣監)
이산(尼山)은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이름이며, 현감(縣監)은 종6품으로서 현의 수장이다.
주석 5)거사비(去思碑)
전임 감사나 수령이 베푼 선정을 추모하여 백성들이 세운 비를 말한다.
주석 6)만력(萬歷)
중국 명(明)나라 신종 때의 연호(年號)로서 1573년부터 1619년까지 사용되었다.
주석 7)정곤재(鄭困齋)
1529~1590. 자는 의백(義伯), 이름은 개청(介淸)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나주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정세웅(鄭世雄)이며, 어머니는 나 씨(羅氏)이다.
주석 8)정여립(鄭汝立)
1546~1589.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이해 10월 황해감사 한준(韓準)이 임금만 볼 수 있는 비밀 장계(지방에 나간 관원이 글로 써서 올리던 보고)를 올렸고, 글 속에는 정여립이 주도하는 세력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여립은 사실을 미리 알고 피했으나, 진안현감 민인백(閔仁伯)이 관군을 끌고 와서 포위하여 자결하였다.
주석 9)정철(鄭澈)
1536~1593.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고,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광해군(光海君)의 왕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선조는 인빈 김 씨에게 빠져 있던 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일 때문에 정철은 파직되어 진주(晉州)로 유배되었다가,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
주석 10)있지도 …… 꾸몄다
원문 '나직(羅織)'은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만드는 일을 말한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재걸군찰자(再乞郡札子)〉에 "그 말을 살펴보건대 모두 나직(羅織)한 것들이니, 없는 것을 있다고 합니다.〔考其所言 皆是羅織 以無爲有〕"라고 하였다.
주석 11)경성(鏡城)
함경북도 경성군을 말한다.
주석 12)척강(陟岡)의 회포
원문 '척강(陟岡)'은 《시경》 〈척호(陟岵)〉에서 나온 표현으로, 행역(行役) 나간 효자가 "저 언덕에 올라 형을 바라보네.〔陟彼岡兮, 瞻望兄兮.〕"라고 한 것에서 파생하여, 부형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노래함을 말한다.
주석 13)회령(會寧)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의 옛 지명이다.
주석 14)국경인(鞠景仁)
?~1592.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로 침입하여 회령 가까이에 이르자 경성부의 아전으로 있던 작은아버지 국세필(鞠世弼), 명천아전 정말수(鄭末守)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 반란을 일으켰다.
주석 15)김귀영(金貴榮)
1520~1593.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도 논의가 있자, 이에 반대하면서 서울을 지켜 명나라의 원조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자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다.
주석 16)황정욱(黃廷彧)
1532~1607.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陪從)해 관동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으로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주석 17)진보(鎭堡)
진영(鎭營)과 보루(堡壘)를 함께 이르는 말로 대개 군대의 진영을 말한다.
주석 18)종성(鍾城)
함경북도 종성군을 말한다.
주석 19)정문부(鄭文孚)
1565~1624.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592년,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 등을 잡아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해 최배천(崔配天), 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주석 20)한백겸(韓百謙)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주석 21)이붕수(李鵬壽)
1548~1593. 본관은 공주(公州)이고, 자는 중항(仲恒)이다.
주석 22)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이다.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택풍당(澤風堂, 양평군 향토유적 제16호)을 지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주석 23)북관지(北關志)
북관 각 군의 읍지(邑誌)를 개괄하여 편집한 책이다. 이식(李植)이 북평사로 있을 때에 함경도 북부 지방의 각 군읍지를 모아 편집에 착수한 것을 그 아들 이단하(李端夏)가 계승, 완성하였다.
주석 24)은적산(銀積山)
황해북도 은파군(銀波郡)에 소재한 산이다.
주석 25)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로, 1522년(중종17)부터 1566년(명종21)까지 사용되었다.
주석 26)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주석 27)가슴에는 …… 삼키고
광대한 포부가 있음을 말한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에, "초나라에는 칠택이 있고 그중에 하나인 운몽택은 사방이 9백 리인데, 운몽택 같은 것 여덟아홉 개를 삼키어도 가슴속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楚有七澤, 其一曰雲夢, 方九百里, 呑若雲夢者八九, 其於胸中曾不蔕芥.〕"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28)말은 …… 토하도다
벼슬할 만한 재주가 있음을 말한다. 보불(黼黻)은 임금이 대례(大禮)에 사용하던 제복(祭服)이다. 구장복(九章服)에 용(龍), 산(山), 화충(華蟲), 화(火), 종이(宗彛), 조(藻), 분미(粉米), 보(黼), 불(黻)의 그림을 수놓는다. 전하여 벼슬함을 의미한다.
有明朝鮮國承訓郞行義禁府都事嘯浦羅公事實記
公諱德明, 字克之, 號龜菴, 又號嘯浦, 姓羅氏, 羅州人. 麗朝有諱富爲監門衛上將軍, 是公鼻祖也. 後至工曺典書諱璡, 最貴顯, 生典農寺正諱公彦, 洪武間, 有克倭功, 仍世爲湖之右族. 曾祖諱逸孫, 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祖諱晊, 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考諱士忱, 師事履素齋李仲虎, 以至行聞, 中宗旌其閭復其戶. 宣祖初, 道臣薦其賢, 累除官至尼山縣監. 其去思碑有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之詩, 贈議政府左贊成. 前配坡平尹氏府使諱彦啇之女, 後配光州鄭氏蛇渡僉使諱虎之女, 各擧三男人, 以六龍目之, 公卽其冢嗣, 資稟魁偉傑特, 識者, 期以遠大器. 嘗在約年八九時, 路逢州吏, 吏不爲禮, 公擧理叱責, 吏乃肅然敬服, 聞者咸奇之. 萬曆己卯擧進士, 實宣祖十二年也. 銓曺聞公名, 除義禁府都事, 罷遞歸鄕時, 公蔚有聲華, 爲人所偢倈. 二弟德峻 德潤, 以鄭困齋門人, 俱有令名, 遂被不悅者所忌嫉. 己丑冬, 有鄭汝立上變事, 委官鄭澈, 乘機羅織, 丁岩壽 梁千頃 洪千璟等, 承澈旨, 投誣疏陷諸名流三十餘人, 而又擧公父子之名曰 : "某之子某等, 與汝立交至密, 知禍及己, 譸張救解, 皆宜罪." 公之弟德顯 德憲等, 不勝憂憤, 詣其疏會, 大言斥之. 及岩壽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禁府, 拿鞫岩壽等十人. 於是, 澈懼使臺官及太學生, 或陳啓, 或上章, 寢其命. 俄而務安儒生裵蓂, 疏伸卞困齋及公父子寃狀甚悉, 而澈竟以謀沮岩壽疏, 搆成罪目, 公之六父子, 一時就理. 贊成公特以孝見原, 公謫鏡城, 諸弟等幷分配. 公到配, 吟詩寄弟, 以寓陟岡之懷曰 : "關雲迢遞鴈無情, 何處孤城憶父兄. 殘燭夜深霜葉響, 夢中池草不能生." 壬辰, 島夷充斥, 賊將淸正長駈至, 北邊會寧人鞠景仁, 遂作亂, 執王子臨海君珒 順和君𤣰及宰臣金貴榮 黃廷彧等, 以應倭. 於是, 鎭堡叛卒, 爭縛守將, 相繼附賊, 鐘城人鞠世必, 卽其渠魁也. 北評事鄭文孚與前監司李聖任 慶源府使吳應台 慶興府使羅廷彦 輸城察訪崔東望等, 謀起義兵. 公與同謫人韓百謙, 協贊其謀. 鍾城府使鄭見龍 高嶺僉使柳擎天等, 亦來會, 捕得首惡者, 斬之, 軍聲仍以大振. 明年春, 別將李鵬壽 萬戶李希唐等, 與賊戰, 同日死. 公與文孚作詩, 以哀之事, 載李澤堂植小撰北關志. 其年, 公始得宥還. 丙申, 丁贊成公憂, 奉行襄禮于務安住龍渡, 仍居墓下. 丁酉, 倭賊更熾, 公與諸弟, 自住龍將避于銀積山, 同鄕孝子李有慶, 偕公舡欲渡, 公謂李公曰 : "君可先渡." 李公辭曰 : "主客有異, 吾雖落後狼狽, 理勢固然耳." 公曰 : "吾若先渡, 吾家奴必不致誠於君." 竟使之先渡. 人稱顚沛必是之義, 彼與此無讓矣. 亂定, 作亭于住龍嘯浦上, 優游以終老. 每省拜先壟有詠懷詩曰 : "朝朝上丘壟, 欲去還躕踟. 度幾侍誾誾, 一見平生儀." 公生于嘉靖辛亥年, 六十卒, 卽萬曆庚戌五月二十八日也. 葬贊成公墓下. 公體甚長大, 威容可畏, 見之者, 以爲得山河間氣. 本州牧與公年相敵者, 必稱老兄, 少五六歲, 必稱丈, 其見敬禮如此. 鄕人林文化懽, 以才智氣槪, 知名當世, 公與之相善. 嘗約會山寺, 林公先到, 談論自若傍若無人者, 及公追, 至林公, 自不覺沮喪, 公出言輒唯唯, 其時寺僧之目擊者, 傅以爲美談. 性又豪放, 不拘小節, 傲視一世, 於人少許可. 一日, 將如厠, 地主猝至, 公僅得延之上堂, 仍卽遺矢于堦上, 處之晏然曰 : "此愈於在堂上滑泄." 人服其廣度. 公旣名重南, 服人皆願一識, 使星冠蓋歷候者絡繹, 而迎接之除, 禮貌破簡. 至於郭忘憂堂再祐之謫居靈岩也, 訪公住龍, 使應門者入傳郭居士來到, 公顚倒衣冠, 下堂迎之, 一村人皆驚曰 : "公平生未嘗屈於人, 何狀居士, 能令公致敬若是哉?" 公遂與討論, 襟懷甚相得. 其後郭公還朝, 上問元帥才, 至以公薦剡云. 雖在草野, 志切憂時, 以感天意結人心之道, 有所上達, 而請伸己丑寃死之類, 以革弊政均賦役之策, 有所條列, 而請罷各營屯田之設, 此於丙申疏及己亥抵兵書畵中, 俱可徵也. 公嘗於夏日, 晝眠于住龍, 山隅有大蛇來, 蟠于腹上, 公覺來知其爲蛇, 終不動身, 以待其自去, 其器量凝重類如是矣. 又能通洗腸之術, 每夕飮水一器, 翊朝還吐, 必滿其器. 至於紅柿等物呑下, 良久吐其核與虫屑, 人莫不異之. 爲詩語必雄放淸健, 有不局底氣岸, 然此特公之餘事耳. 其所吟詠者, 有若干首, 而字多訛誤, 不得傳其眞, 可勝歎哉. 公之歿也, 弟德潤爲文, 哭之其略曰 : "胸呑雲夢, 詞吐黼黻, 志凌宇宙, 眼空霄壤. 龍臥江潭, 自擬管葛." 可謂摹得公之平生也. 惜乎! 天之生公, 宜若有爲, 而竟未克一試, 命也. 公先聘光山金氏文科潭陽府使景憲之女, 繼娶文化柳氏節之女, 俱葬羅州長興洞. 有四男曰以素 因素, 金氏出也, 曰成素 就素, 柳氏出也. 成素武科宣傳官, 以素有四男, 褕 襑 袿 袨. 因素有二男, 袺 䙐, 一女, 柳時華. 又有庶出子裌. 成素有一女, 李韶參奉. 又有庶出子表 衤方 袁 三人. 就素無後. 公之子孫, 連世陵替, 而袺之孫晩榮, 擢文科壯元, 官至持平, 能使家聲復振, 斯可見餘慶之未艾也. 嗚呼! 公之歿, 今已百有六年矣. 其平生行蹟, 必不止此, 而久遠無徵, 略述見聞記, 其萬一後之尙論公者, 亦可因此而得公之梗槪矣. 崇禎丙子後七十九年, 乙未七月日, 從曾孫生員斗冬, 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