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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의 구암 명길 한백겸에게 보낸 편지(與久庵韓參議鳴吉百謙書)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봉습고

자료ID HIKS_Z999_01_B00028_001.004.TXT.0007
참의 구암 명길 한백겸주 91)에게 보낸 편지
지난번 공께서 우연히 찾아오셨을 때 비록 식사하며 정담을 나누는 기쁨이 있었지만, 당상의 존귀함에 압도되어 자세히 대화를 나누며 평온하게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더욱 답답합니다. 요즘 날씨가 맑고 화창한데 삼가 몸조리를 조용히 보중하고 계신지요?
제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지만, 백발로 세상 풍진을 겪었으니 무슨 심정이겠습니까? 몸소 큰 환란을 겪고, 또 노모와 오랜 벗들이 모두 신원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하여 이에 감히 평소 소신을 바꾸고 변변치 않은 일들로 분주하였으나 결국 이룬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초복(初服)주 92)에 부끄러워 참으로 몹시 절로 슬픕니다.
우리 조선 200년간 유학주 93)의 근원을 밝게 탐구하고 정주학(程朱學)주 94)을 계승한 이가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고려 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성리학을 처음 열었고, 그 후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네 분의 선생께서 서로 계승하여 도학을 일으켜 비로소 세상을 밝혔는데, 모두 뜻밖의 재앙을 면치 못하시어 그 도가 크게 행하지 못하였으니 기묘사화(己卯士禍)주 95)와 을사사화(乙巳士禍)주 96)의 참혹함을 차마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베어 죽이고 소멸시킨 나머지 자리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그 사이에서 출현하여 사문(斯文)을 창도하여 일으키셨습니다. 성상께서 초년에 유학을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기시어 일대의 어질고 재주 있는 이들이 무성히 세상을 위해 등용되니 사람들은 모두 선을 지향하게 되고 세상의 도(道)가 볼 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무리 또한 이러한 풍조를 듣고 흥기한 자들이고, 우리 형께서 이런 마음을 제기하셨으니 어찌 선현(先賢)들의【아마도 글자가 빠진 듯하다】 풍조에 힘입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기축(己丑 1589)년의 변고가 진신(搢紳)들로부터 나왔을 때 만약 조정에서 협력하여 같은 마음으로 함께 분노하며 간적(奸賊) 정철(鄭澈)이 세상을 속였던 상황을 극진히 간언하였다면 어찌 사림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겠습니까. 간적 정철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가 때를 틈타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려 이미 조정에 섰던 명사들을 죽이고, 산야에 은거하던 선비들마저 살해하였습니다. 벼슬길의 풍파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 산림에 숨어 수양하면서 도학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던 자들까지 아울러 역모를 꾸몄다는 화(禍)를 입힐 수 있겠습니까? 고금 천하에 참으로 원통함이 심합니다. 율곡은 비록 사람을 알아보는 것에 밝지 못하였으나 본심은 선량하니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담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살육의 재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 간적 정철처럼 사납고 강퍅하며 화를 잘 내는 사람과 같겠습니까.
곤재(困齋) 선생께서 평생 사도(師道)를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고 성리학의 근원을 정밀히 연구하여 사도(斯道)를 창도하고 밝히셨으니, 후생 소자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 나아가면 반드시 예법으로 자신을 단속하였는데, 저 정철은 해학하고 방종하였으니 절의로 맑고 담박하며 스스로 고상한 자들을 몹시 시기하는 바가 지극하였습니다. 이에 배절의론(排節義論)을 지어내어 때를 틈타 모함에 빠뜨리고 심지어는 북쪽 변방으로 귀양 보내어 죽게 하였습니다. 그 아우 정대청(鄭大淸)은 형이 비명에 돌아가심을 애통해하여 상복을 입고 슬피 울부짖다가 14년 만에 말라 죽게 되었으니, 떳떳한 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십여 년 이래로는 공의(公議)가 지극히 엄중하고 인심(人心)을 속이기 어려워 초야의 선비들이 자주 상소를 올려 은혜를 바랐고 조정에서도 대신들이 자주 진언을 하였으며, 옥당(玉堂)에서는 차자(箚子)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서로 먼저 죽자고 하는 친구가 조정에 없었고 지성으로 힘써 간쟁(諫爭)하러 나서는 자도 없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통곡이 나올만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고명(高明)께서 반드시 함께 아파하고 불쌍히 여기며 계실 것인데 그 또한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존형께서 서관(庶官)주 97)의 반열에 있어 손을 쓸 처지가 아님을 알지만, 상서(尙書)의 두 대인(大人)께서 때때로 인재를 선발하거나 도를 논하는 책임이 있으시니, 형님께서 조용히 그 사이에서 억울한 죄상을 뒤집어쓴 원한을 풀어주신다면 무덤 속에서 감읍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도(斯道)를 붙들고 국가의 명맥을 연장하는 큰 기틀이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 형님의 깊은 계책을 믿고 성기(聲氣)주 98)에 의탁할 뿐입니다. 감히 마음속의 일을 진술하였으니 불쌍히 여기고 살펴 주시어 지극한 뜻에 부합되기를 바랍니다. 크게 바라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주석 91)한백겸
1552~1615.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1579년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1589년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임진왜란으로 사면되고, 다시 벼슬에 기용되었다. 특히 선조가 인재를 천거하라는 명령에 정탁은 한백겸을 재략(才略)이 있는 인물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역》에 뛰어났으며, 실증적이고 고증학적인 학술 경향이 있다. 저술로는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기전고(箕田考)》와 문집 《구암유고(久菴遺稿)》가 있다.
주석 92)초복(初服)
벼슬하기 전에 입던 옷이라는 뜻으로, 벼슬을 떠나 처음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 은거함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의 "물러가 다시 나의 초복을 손질하리.〔退將復修吾初服〕"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주석 93)유학
원문의 '수사(洙泗)'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두 개의 강물 이름으로, 이곳이 공자의 고향에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의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유학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석 94)정주학(程朱學)
원문의 '낙건(洛建)'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주희(朱熹), 또는 그들의 학문인 정주학을 가리킨다. 정호와 정이는 낙양(洛陽)에서, 주희는 복건(福建)에서 살며 강학하였다.
주석 95)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년)에 일어난 사화. 훈구파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사림파(士林派)를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을 말한다.
주석 96)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원년)에 일어난 사화. 윤형원이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윤임과 함께 했던 사림(士林)이 큰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주석 97)서관(庶官)
6품 이하의 하급 관원을 이르는 말이다.
주석 98)성기(聲氣)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에서 나온 말로, 뜻이 맞는 사람을 말한다.
與久庵韓參議鳴吉百謙書
向也, 仍公偶進, 雖得一餉之款, 而壓尊堂上, 不克細話, 穩承緖論, 迨增憒憒. 卽日淸和, 令攝理毖重潤. 年踰五十, 始霑一命, 白首風埃, 有甚心情. 身經大患, 又有老母知舊, 咸謂伸雪階梯, 乃敢輒渝素守, 碌碌奔走, 未知畢竟所成何事, 有愧初服, 良切自悼. 我朝二百年間, 灼然有以探源乎洙泗, 接響乎洛建者, 有幾人哉. 麗末鄭圃隱始闡性理之學, 其後寒暄一蠹靜庵晦齋四先生, 相繼而起道學, 始明於世, 而皆不免奇禍, 其道不得大行, 己卯乙巳士禍慘矣, 尙忍言哉. 斬伐消鑠之餘, 退溪南冥出於其間, 倡起斯文. 聖明初年崇儒重道, 一代賢才, 蔚爲世用, 人皆向善, 世道可觀. 如吾輩亦聞風而興起者, 吾兄之提起此心, 豈非有賴於先正【恐缺遺字】風耶. 嗚呼。己丑之變, 出於搢紳, 如使朝廷諧協, 同懷共憤, 極陳鄭賊欺世之狀, 則豈有延及士類之理. 奸澈挾憾乘時, 陷人於機穽, 旣殺立朝名流, 又殺山野高蹈. 宦海風波, 古亦有之, 安有藏修林下以道學自任者, 幷被弑逆之禍耶. 古今天下, 寃亦深矣. 栗谷雖知人不明, 素心良善, 使斯人當此事, 必無殺戮之禍. 夫豈如奸澈狠愎悻悻者乎. 困齋平生, 以師道自任, 硏精性理之源, 倡明斯道, 後生小子, 咸造其門, 必以禮法自持, 彼其恢諧放曠, 以節義淸淡自高者, 深有所忌克至. 是乃出排節義之說, 乘時傾陷, 至於竄死朔北. 其弟大淸, 痛兄非命, 服喪悲號, 十四年而枯死, 人有秉彝, 孰不動心於斯乎. 十許年來, 公議至嚴, 人心難誣, 草野之士, 累上章乞恩, 朝廷亦有大臣敷奏, 玉堂陳箚. 而却緣無相先相死之友於朝, 不見出血誠力爭者, 可謂長痛哭處也. 竊念高明, 必同病相憐, 其亦念及於此否. 固知尊兄在庶官之列, 無下手地, 尙書兩大人有銓時論道之責, 令兄可從容其間, 以解覆盆之寃, 則豈但爲竁中之感泣, 抑亦扶斯道壽國脈之一大機. 惟吾兄熟計之恃, 有聲氣之托. 敢陳心裏之事, 幸加憐察, 以副至意. 不勝大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