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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애 유성룡의 회계 【일이 비변사에 내려져 서애 유성룡이 영의정으로써 회계하였다.】(柳西厓成龍回啓 【事下脩邊司, 西厓以領議政回啓】)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봉습고
서애 유성룡주 35)의 회계주 36) 【일이 비변사에 내려져 서애 유성룡이 영의정으로써 회계하였다.】
근래에 대간 및 지방 유생들이 연이어 상소와 차자를 올려 기축년 역모 사건주 37)에 연루된 사람들 중 매우 원통한 경우가 있음을 언급하고, 또 한랑(寒朗)이 초(楚) 나라의 옥사를 판별주 38)했다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조정 대신들이 간언하지 않은 잘못을 책하였습니다. 신들은 마땅히 머리를 찧으면서 부끄러워하고 사죄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낯으로 다시 논의하겠습니까.
국운이 불행하여 역모의 변란이 대신들 사이에서 일어나 바야흐로 옥사(獄事)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상께서는 이미 파급의 환난이 있을 것임을 걱정하시어 옥석이 함께 불타는 것을 경계하여 덕음(德音)을 거듭 내리셨습니다. 만약 당시에 일을 담당하여 옥사를 다스렸던 신하가 성상께서 보이신 지극한 뜻을 미루고 넓혀서 심문을 잘하고 밝게 판단하여 그 허실(虛實)과 경중(輕重)의 실정을 얻고 조금이라도 사의(私意)가 그 사이에 섞이지 않게 하였다면, 원악(元惡)과 대돈(大憝) 및 법에 걸리는 것이 마땅한 자 외의 나머지, 즉 비록 평시에 교유하였더라도 역모를 알지 못했던 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본 적이 있거나 한두 번 서신을 왕래한 자, 고알(告訐)하던 중에 거론된 자, 풍문으로 거론된 자 등은 모두 차례로 신원되어 풀려나 실정과 죄가 서로 걸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았다면 인정이 크게 감복하고 억울함이 풀릴 수 있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천토(天討)이며 또한 왕법(王法)이나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근원은 실로 근년 이래 조정이 분열되어 형색을 너니 나니 하며 가르는 데서 비롯되었으니, 이른바 한편에 선 사람들이 이 일을 빌미로 하여 수사연좌(收司連坐)주 39)하려는 계책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시기에 영합하고 풍지(風旨)를 엿보아 소차를 올려 포승줄로 사로잡으려는 자들이 관서(官署)의 앞에 줄을 지어 잇닿으니,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까지 발을 움직이고 손을 흔드는 것조차 모두 주시해서 지켜보는 중에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있게 되면 반드시 역적을 구원하려 했다는 죄목에 빠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삼 년 동안의 큰 옥사에 원통하게 고초를 받은 일이 천태만상이었으나 한 사람도 이러한 사실을 성상께 밝게 말씀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여러 신하들이 나라를 저버림이 심한 것이니 모두에게 똑같이 죄가 있는 것이지 한 사람에게만 전적으로 죄를 돌릴 수는 없습니다.
바야흐로 사변의 초반에 성상께서 다른 사람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윤음(綸音)주 40)을 널리 내리시어 역적으로서 법에 응당 연좌되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의 문을 열어 젖히셨으니 하늘같은 은혜가 크게 흘러넘치고 말 못한 원통함이 전부 씻기었습니다. 그리하여 인심을 위로하고 하늘에 무궁한 수명을 빌어 중흥만세의 근본을 세우셨으니, 이는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이와 같이하였기에 옛날 죄적(罪籍)주 41)에 있는 자 중 살아있는 이는 거의 다 은혜를 입었으나, 유독 이미 죽은 사람 중 최영경(崔永慶),주 42) 정개청(鄭介淸), 유몽정(柳夢井)주 43), 이황종(李黃鍾)주 44) 등과 같은 이들은 당시 함께 누명을 벗을 수 없었습니다. 최영경은 특별히 성상의 명이 내려 대간들이 잇달아 논의하여 이미 억울함을 푼 데다 증직(贈職)을 하였으니 이를 듣고 보는 자들이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정개청과 유몽정, 이황종 등은 비록 인품의 고하가 다르고 죄를 입음에 선후가 있기는 하나 원통하고 억울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정개청은 호남인 중에서 특히 이름이 있어 평생토록 학술과 행실로서 자임하였는데 우연히 한 편의 논설을 저술한 것으로 죽음에 이르렀으니, 나덕윤(羅德潤) 등의 무리들이 천 리 길을 발을 싸매고 와서 문을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했던 것이 당연합니다.
대저 큰 병란과 큰 옥사는 한·당(漢·唐)이 망했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큰 옥사의 뒤에 반드시 큰 병란이 있었던 것은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인심이 이전의 일을 경계로 삼아 나라의 명(命)을 장래에 일신하고자하는데 백성들이 만약 저승에서 원통함을 품고 결백을 밝히지 못한다면 어둡고 답답한 기운이 올라가 하늘의 조화에 간여하여 국가 형정(刑政)의 누가 될 수 있으니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들의 뜻에는 정개청과 유몽정, 이황종 등에게는 특히 유생의 소(疏)를 윤허하시어 모두 신원하여 결백을 드러나게 해주시고, 그 밖에 소차(疏箚)에서 미처 거론하지 못한 자들 또한 많이 있으니 임진년(壬辰年) 하교(下敎)에 의거하여 법에 마땅히 연좌되는 경우 외에는 모두 옥문을 열어 석방하는 뜻으로 의금부로 하여금 상세히 개록(開錄)주 45)하게 하고 관련된 실상의 경중에 따라 일체 석방하여 그물을 걷어주는 은혜를 깊은 땅 속과 엎어놓은 항아리 속까지도 고루 입을 수 있게 해주신다면 유신(維新)의 정사(政事)에 보탬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황공하게도 감히 아뢰옵니다.
비답(批答)하시를, "이후에 마땅히 면대하여 의논하라." 하였다.
- 주석 35)유성룡
- 1542~1607.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냈고 평양과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1598년 북인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당했다가 복관되었으나 은거하며 세상을 마쳤다. 임진왜란의 교훈을 정리한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 주석 36)회계(回啓)
-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던 일을 말한다.
- 주석 37)기축년 역모 사건
- 기축옥사(己丑獄事), 혹은 기축사화(己丑士禍)라고도 한다. 기축년(己丑年)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告變)에서 시작하였는데 1591년까지 그와 연루된 수많은 동인(東人)의 인물들이 희생되었다.
- 주석 38)한랑(寒郞)이……판별
- 한랑(寒郞)은 후한(後漢)때 설(薛)땅의 사람이다. 초왕(楚王) 영(英)은 소시에는 유협(遊俠)을 좋아하였고 만년에는 황로(黃老)ㆍ부도(浮屠)를 즐기며 방사(方士)와 교유하였는데 뒤에 역적으로 몰려서 자살하였다. 이 때 억울한 연루자가 수천 명이나 되어 여러 해 동안 판결을 내지 못한 것을 한랑(寒郞)이 가서 공정하게 처리하여 죄 없는 많은 사람을 풀어주었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권72.
- 주석 39)수사연좌(收司連坐)
- 진 나라 상앙(商鞅)이 제정한 법이다. 10호를 1조(組)로 하여 서로 규찰하게 하고, 그 중에 한 집이 법을 어길 경우 아홉 집이 관아에 고발하되, 만일 규찰하여 고발하지 않으면 10호가 연좌되었다.
- 주석 40)윤음(綸音)
-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오늘날의 법령과 같은 위력을 지닌다.
- 주석 41)죄적(罪籍)
- 죄인의 죄상을 적은 도류안(徒流案)이나 형명부(刑名簿) 등을 이른다.
- 주석 42)최영경(崔永慶)
- 1529~1590.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으로 서울 출생.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정여립 역옥사건(鄭汝立逆獄事件)이 일어나자 무고로 옥사(獄死)하였는데 당시 정철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정철의 사주로 죽임을 당한 것이라 의심되었다.
- 주석 43)유몽정(柳夢井)
- 1557~1590. 자(字)는 경서(景瑞). 조선시대 호남 지역 문신으로 기축옥사 때 옥사하였으며 무고로 옥사한 것이라 의심되었다.
- 주석 44)이황종(李黃鍾)
- 1534~1590. 자(字)는 중초(仲初). 조선시대 호남 지역 문신으로 기축옥사 때 사망하였다.
- 주석 45)개록(開錄)
- 개록이란 상급 기관에 문서를 보낼 때, 문서의 후반에 이름이나 의견을 적어 보내는 일을 말한다.
柳西厓成龍回啓 【事下脩邊司, 西厓以領議政回啓】
近日臺諫及外方儒生, 連上疏劄, 言己丑逆獄連累人冤濫之事, 且引寒朗論楚獄一節, 責朝臣之不言. 臣等當叩頭慚謝之不暇, 何顔更有論議. 國運不幸, 逆賊之變, 出於搢紳之間, 方獄事之始起也. 自上已慮有波及之患, 以玉石俱焚爲戒, 德音屢下. 若使其時當事按獄之臣, 推廣至意, 淑問明辨, 以得其虛實輕重之情, 不以一毫私意參錯於其間, 則除元惡大憝及律所應坐者外, 其餘雖平時交游而未知逆謀者, 及一再見面一二書往來者, 與出於告訐, 出於風聞者, 皆當次第伸釋, 使情罪相稱, 若是則人情大服, 而冤枉得伸, 夫是之謂天討, 亦所謂王法, 而當時則有不然者. 其源實出於近年以來, 朝廷分裂, 形色彼此, 所謂一邊之人, 旣假此以爲收司連坐之計. 故其投合時好, 希望風旨, 投疏羅織者, 相續於公車之下, 而上自士大夫, 下及韋布之士, 動足搖手, 擧在指目之中, 少有一言, 必陷於營救之罪, 所以三年大獄, 冤楚萬狀, 而無一人以此事狀徹聞於冕旒之下, 此則群臣負國之甚, 均有其罪, 未可專咎於一人也. 方事變之初, 自上不待人言, 渙發綸音, 除逆賊法應連坐外, 悉開放釋之門, 天恩大霈, 幽冤盡洩, 其所以慰解人心, 祈天永命, 以立中興萬世之本者, 實非偶然也. 惟其如是, 故罪籍中生存者, 幾盡蒙恩, 而獨有已死之人, 如崔永慶鄭介淸柳夢井李黃鍾等, 未得一時昭雪. 永慶則特出上命, 而臺諫繼論, 旣爲洩冤, 又加贈爵, 凡在聞見, 孰不感激, 而介淸夢井黃鍾之類, 雖人品有高下, 被罪有先後, 而其爲冤枉則一也. 介淸則於湖南人中尤有名稱, 平生以學術行檢自任, 而因偶然一篇之著論, 以至於滅身, 宜羅德潤輩千里裏足叩閽訴冤也. 大低大兵大獄, 漢唐之所以亡國也. 故大獄之後, 必有大兵, 理所然也. 今則人心懲毖於旣往, 邦命一新於將來, 匹夫匹婦, 若含冤於重泉之下而不得見白, 則幽鬱之氣, 亦足以上干天和, 而爲國家刑政之累, 非小事也. 臣等之意, 介淸·夢井·黃鍾等, 特允儒生之疏, 悉加伸雪, 而此外未及擧名於疏劄者, 亦多有之, 依壬辰下敎法當緣坐外, 悉爲開釋之意, 令義禁府詳細開錄, 從其所坐輕重, 一體宥釋, 使解網之恩, 普被於窮泉覆盆之下, 則其於維新之政, 所補不細, 惶恐敢達.
答曰: "後當面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