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역/표점
- 국역
-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암습유
- 기해봉사 【선조 32년(1599) 8월 2일, 전 별좌로 산거(散居)해 있을 때.】(己亥封事 【宣祖, 三十二年八月初二日, 以前別坐散居時.】)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암습유
기해봉사 【선조 32년(1599) 8월 2일, 전 별좌로 산거(散居)해 있을 때.】
삼가 아룁니다. 옛날 제왕은 어려움을 구제하고 막힌 것을 제거하는주 1) 때를 당하여 하늘의 뜻이 이미 돌아왔다고 여기지 않고 천명을 받들어 따르는주 2) 정성을 더욱 생각하였으며, 인심이 이미 안정되었다고 여기지 않고 위로하며 기뻐하는 도리를 더욱 지극히 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품은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깨우쳐 이끌어준 뒤에야 아래에서 막히는 마음이 없고, 원통함을 풀어줄 수 있다면 반드시 씻어준 뒤에야 위에서 슬퍼하는 환란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통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이요,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사이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막힌 운수가 다시 형통하여 흉악한 적이 물러가 변방의 경계가 조금 느슨해졌고, 세자주 3)가 탄생하는 상서를 맞아 경사가 종묘사직에 이어졌으니, 오늘날 하늘의 뜻이 보살펴 도와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군신(君臣)을 거짓으로 속여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주 4) 통쾌하게 분별하니 신민(臣民)은 서로 기뻐하고, 전쟁의 아픔에서 막 일어나 사졸들이 편히 쉬게 되니주 5) 오늘날의 인심이 대체로 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미 돌아오고 인심이 이미 안정되었는데 전하께서 정사를 근심하고 부지런히 하는 마음이 하나같이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는 마음에서 나와 백성의 괴로움을 돌보고 날마다 조세를 덜어 감면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며, 하늘의 재앙을 두려워하여 수신(修身)하고 반성하는 도리를 더욱 부지런히 하시니, 이것은 바로 성탕(成湯)이 백성과 함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성대한 마음주 6)인 것입니다. 마땅히 한 사람의 백성과 하나의 사물도 은택을 입지 않음이 없으나 홀로 역적의 변란에 갑자기 걸려 황천에서 원통함을 품고 있는 사람이 지금까지도 억울함을 깨끗이 씻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하늘과 사람이 감응한 바를 성상께서 마땅히 측은하게 생각하실 바가 아니겠습니까?
아! 지난해 국운이 불행하여 역적의 변란이 사대부의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정여립은 당초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겁박하는 도적이 아니어서 왕망(王莽)주 7)처럼 세상을 속이는 교묘한 재주를 끼고, 육당(陸棠)주 8)처럼 착한 척하는 명성을 가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선비들 중에 그 이름을 알거나 그 얼굴을 보지 못한 자가 없었는데, 겸허하거나 선을 좋아하는 사람이 가장 속임을 당하였으니, 그 극악무도한 형태가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꿰미에 가득 찬 죄가 갑자기 천만 뜻밖에 일어나니, 당시 속았던 선비들은 마음으로 놀라고 뼛속까지 통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자신들이 밝지 못했던 죄를 후회하였습니다. 성상께서 밝게 살피고주 9) 널리 비추시어 거울과 저울대처럼 스스로 바르게 하고, 일찍이 옥과 돌이 함께 불타는 것을 아프게 여기시어 요수(要囚)주 10)를 크게 결단할 때 더욱 간절하고 신중히 분별할 것을 생각하셨으니 어찌 청명한 아래에서 원통한 마음을 품은 자가 있었겠습니까?
다만 간신 정철(鄭澈)은 사납고 고약한 성질로서 잔인하고 독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희학(戱謔)과 방탕으로 가식을 떨지만 속으로는 시기심이 가득하니, 맑은 의논에 용납되지 않아 항상 불평하는 마음을 품고 몰래 그 틈을 엿보아 반드시 보복하고자 하더니 오늘에야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 몸소 심문하는 관원이 되어 일망타진할 계책을 만들었습니다. 평소에 조금이라도 흘겨보는 눈초리가 있는 자는 은밀하게 경박한 무리를 사주하였으니, 소장(疏章)에 나오지 않으면 반드시 대론(臺論)주 11)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만약 하늘같은 성상이 아니었다면 당대의 충성스럽고 현명한 사람 중에 반드시 남은 자가 없었을 것이니 당시의 일이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그 당시 원통함을 안고 죽음에 나아간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신들이 거주한 도내(道內)에서 가장 원통한 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정개청은 진실한 실천으로 덕이 완성되었고 행동은 존엄하였으며 한결같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문을 따라 사도(斯道)를 밝히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습니다. 일찍이 호남 일부 선비들의 습관이 간신 정철에게 물들어 오로지 교만하고 포학하기에만 힘쓰고 의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 걱정이었으니, 어떤 이는 스스로 절의를 표방하였으나 명교(名敎)주 12)에는 전혀 몽매하였고, 어떤 이는 청담(淸談)을 흠모하고 본받는다고 하나 실은 이록(利祿)을 탐하였습니다. 그 귀결점을 돌아보면 모두 세교(世敎)에 해로움이 있기 때문에 정개청은 매번 이를 일세(一世)를 그르치는 폐해라 여겨 후학의 폐단이 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급기야 《주자어류(朱子語類)》주 13)를 읽다가 혹자가 이천(伊川)의 말을 인용하며 "진송(晉宋)의 청담(淸談)이 동한(東漢)의 절의(節義)로 인하여 한번 물결이 쳐서 이에 이르렀다."고 하자, 주자(朱子)가 "동한에서 절의를 숭상할 당시에도 청담과 같은 의사가 본래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대개 당시 절의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온 세상을 거만하게 흘겨보고 조정을 더럽게 여기는 뜻이 있었는데, 이러한 의사에서 자연히 천하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게 되어, 얼마 있다가 청담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주 14) 또 "절의 있는 선비는 진실로 마땅히 말할 지위에 있지 않았으니, 재앙에 이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였습니다.주 15) 또 "후한(後漢)의 명절(名節)이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남은 천하게 여기는 폐단이 있었다. 이것이 그치지 않고 쌓이면 그 폐단이 반드시 허탄(虛誕)함에 이르러 노장(老莊)으로 들어가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주 16) 또 "진송(晉宋)의 인물이 비록 청고(淸高)한 것을 숭상한다고 말하였으나 개개인마다 관직을 탐내었으므로 이쪽에서는 청담을 말하지만 저쪽에서는 일면 권세를 부리며 뇌물을 받았다."라고 하였습니다.주 17) 정개청은 이 주자의 논설로 인하여 진・송 시대 청담의 폐해를 밝혀 호남의 선비 습관에 대한 폐단을 구제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간적(奸賊)은 평생 심술이 군자의 올바른 견해에 드러남을 미워하여 은밀히 죽이려는 마음을 품었으되 엿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역적의 변란이 일어나자 간적은 본도(本道)에서 행동에 검속(檢束)이 없고 망령된 홍천경(洪千璟),주 18) 임회(林檜)주 19)와 같은 무리들을 사주하여 이에 정개청이 저술한 논설에 임의로 '배(排)'자를 더하여 배절의(排節義)주 20)라 지목하고, 유생들의 공론으로 빙자하여 상소를 올려 모함하니, 일시에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그 상소에 들어가 거의 한 그물에 모조리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성상이 실상을 밝게 살핌을 힘입어 상소의 앞부분에 이름을 올린 10여 명을 잡아와서 장차 무함한 죄를 다스리려고 하였으나, 정철이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이를 막고 도리어 정개청이 저술한 절의설에 대해 엄한 형벌을 내릴 것을 청하여 마침내 먼 변방에서 죽게 하였으니, 천지 사이의 원통함 중 무엇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아! 하늘은 푸르지만 말이 없고 죽은 사람 또한 구천에서 스스로 밝히지 못하니, 신들이 청컨대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그가 지은 글의 뜻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그 글의 첫머리에 "동한의 절의를 공명(功名)과 비교한다면 그 고상함이 오히려 완고한 자를 격동시키고 나약한 자를 일으킬 수 있으며, 진송의 청담을 이익만 도모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그 기개가 또한 세상의 마음을 바로잡고 외물을 진정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그는 참된 절의를 비방한 것이 아니고, 다만 그 말류의 폐단을 구제하려 한 것이 분명합니다. 또 이르기를 "그 처음을 살펴보면 모두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학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절의라는 것은 바로 명덕(明德) 가운데 한 가지 일이요, 명덕이라는 것은 바로 절의의 근본인 것입니다. 만일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명덕(明德)을 알게 하면 환란에 임하거나 생사의 기로에 처할 때에 의리가 있음을 알고 이욕이 있음을 알지 못하며, 임금이 있음을 알고 자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며, 절의에 대해 기약하지 않아도 높은 절의가 곧바로 해와 달과 함께 다투어 빛날 것이 분명합니다. 또 "이륜(彝倫, 사람으로서 떳떳이 지켜야할 도리) 밖에서 독선(獨善)하며, 자신을 단속하고 예방하는 절도를 스스로 방일(放逸)한 것은 말세에 숭상하는 일이요, 성현의 중화(中和)하는 도(道)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중화(中和)의 두 글자는 만 가지 선(善)이 구비되어 오직 요(堯), 순(舜), 공자(孔子), 맹자(孟子)만이 해당할 것입니다. 만일 자식이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 신하가 신하된 도리를 다하여 삼강오륜의 도리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마땅함을 얻지 아니함이 없으면 곳곳마다 중도(中道)를 얻어 중화(中和)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 어찌 절의를 버리고 말한 것이겠습니까? 이 두어 조목을 가지고 그 뜻을 궁구해 보면 그가 저술한 논설은 정자·주자가 남긴 의론을 조술(祖述)주 21)하여 절의의 근본을 북돋고 후세에 허황되고 실상이 없는 폐단을 구제하려 한 것이니 뜻이 지극히 깊고 간절합니다. 그러나 도리어 간적이 중상모략하는 자료가 되어 사방에 방문(榜文)을 게시하여 온 세상의 이목을 어지럽히기게 이르렀으니, 어떻게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아! 고금 천하에 비록 사림의 화가 많이 있었으나, 어찌 오늘날처럼 참혹함이 있었겠습니까? 정개청은 머리가 세도록 경서(經書)를 연구하면서 산림에 자취를 감춰 본래부터 역적과는 서로 접촉하지 않다가 계미(癸未 1583)년에 사서 교정 낭청(四書校正郞廳)으로 공무를 보는 좌석에서 함께 나란히 하고서야 비로소 그 얼굴을 알았으나 갑자기 어버이 병환으로 먼저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그 교분이 매우 얕았으며, 마침 동료였기 때문에 편지로 서로 안부를 물은 것이 겨우 두 차례였을 뿐 이것은 마음을 비우고 있다가 속임을 당한 소치에 불과하니 한때 사대부가 살피지 못한 공죄(公罪)입니다.
그 아우 정대청(鄭大淸) 또한 일찍이 학문에 종사하여 행실이 효우(孝友)에 독실하였는데, 형이 무고하게 죽은 것을 애통하고 신원(伸冤)될 것을 바라며 상복을 입고 슬퍼하다가 파리하여 장차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이 지금 10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렀으니, 대개 보고 들은 자라면 누구인들 오열하며 상심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15~6세 때로부터 일찍이 외종숙(外從叔) 유희춘(柳希春)주 22)에게 수학하였는데, 유희춘은 정개청을 함양한 공력이 깊어 마땅히 후배들의 사표(師表)가 될 것이라 여겨 신들에게 빨리 가서 따르도록 권하였으니, 신들이 마침내 자신의 몸을 맡겨 스승주 23)으로 섬기고 따른 지 거의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외우고 강론하는 것은 《소학(小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육경(六經)의 책에 지나지 않았고, 그가 강론하며 밝혔던 것도 다만 인(仁)·의(義)·예(禮)·악(樂)·천리(天理)·인욕(人慾)을 분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귀결점을 살펴보니 신하된 자는 충성하고 자식된 자는 효도하라는 것 아님이 없거늘, 어찌 감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고 이미 죽은 스승을 두둔하여 성상을 기망하고자 하였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스승과 제자의 의리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떳떳한 본성에 근거하여 차마 존망(存亡) 때문에 그 마음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망령된 생각에 사유(師儒)가 역당(逆黨)에 연좌됨이 진실로 사문(斯文)의 성쇠와 치도(治道)의 고하(高下)에 관계된다고 여겼으므로 지난 을미년(1595) 봄 신들이 감히 발을 싸매고 천 리 길을 와서 구중궁궐에 원통함을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성상께서 소원하고 미천한 신하의 말을 굽어 살피어 채택하여 주시고, 이에 지당한 의론이라고 하유(下諭)하시니, 정녕 혈기 있는 모든 이들 중에 흥기하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당시에 대신(大臣)의 회계(回啓)주 24)하는 말이 애매모호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성상께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뜻이 조정과 재야에 명백히 선포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조정의 의론과 대각(臺閣)의 논의가 지성으로부터 나와 기필코 국시(國是)주 25)를 정하고자 하였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니, 인심이 더욱 막히고 사론(士論)이 더욱 격절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 10년이면 반드시 회복하는 것은 천도(天道)이며, 민멸되었다가도 다시 펴지는 것은 공론입니다. 지난날 다행히 하늘이 성상의 마음을 열어 민심을 통촉하시어 당시에 모함 받아 귀양 갔던 자들이 모두 용서받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원통함을 풀어 높은 벼슬의 포증(褒贈)이 이미 최영경에게 더하였으나, 유독 정개청만은 아직 은전이 늦어지고 있으니, 어찌 오구(梧丘)주 26)가 구천에서 눈을 감지 못할 뿐이겠습니까? 민심이 꽉 막히고 선비의 기상이 사라져 천하의 어짊이 이에 이르러서 유감이 없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이 지난 사적을 살펴보니 동탁(董卓)의 화주 27)가 바야흐로 커질 때 식자들은 금고(禁錮)의 형벌을 풀어줄 것을 급선무로 삼았고, 백안(伯顔)의 난이 비로소 성대했을 때 왕응린(王應麟)은 제왕(濟王)의 후손 세울 것을 청하였으니,주 28) 한두 명의 군자가 원통함을 머금은 것이 적(敵)과 보루에서 대치하는 것보다 급하지 않은 것 같으나, 옛 사람들이 반드시 이에 급급한 까닭은 어찌 한 사람의 마음이 곧 천만인의 마음 같아 보이지만 인심의 향배와 천명(天命)의 길흉에 진실로 크게 두려워할 만한 것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두 더불어 유신(維新)하는 날이 진실로 적과 보루에서 대치하는 때와 다르며, 원한을 머금고 죽은 혼백이 당고(黨錮)주 29)와 제왕(濟王)주 30)의 원통함보다 더 심함이 있으니, 오늘날의 급선무는 그 원통함을 씻어 인심을 위로하고, 인심을 위로하여 천심(天心)을 흠향하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간절하게 피눈물을 흘리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전하를 위함이요, 억울한 자를 위함이 아니라 사직을 위해서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히 초야의 말을 받아들이시고, 비와 이슬주 31) 같은 은택을 널리 펼치시어 오랫동안 막혔던 인심과 땅속에 묻혀 썩은 백골로 하여금 푸른 하늘의 대낮처럼 시원함을 보게 하신다면 진실로 사도(斯道)를 붙들고 국가의 명맥을 오래케 하는 하나의 큰 기틀이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유념하여 받아들이소서. 신들은 지극히 황공하여 떨며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비답(批答)에서 대략 "처음부터 역적으로 지목하여 국문하였던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고, 또 "대개 옳고 그름은 마땅히 조정의 처분에서 나올 것이니, 너희들의 뜻이 비록 근실(勤實)하지만 매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 주석 1)막힌 것을 제거하는
- 원문의 '경비(傾否)'는 비색(否塞)한 운수를 없앴다는 말이다. 《주역》 〈비괘(否卦) 상구(上九)〉에 "상구는 비색함을 제거하는 것이니 먼저는 비색하고 뒤에는 기쁘다.〔上九, 傾否, 先否後喜.〕"라고 하였다.
- 주석 2)천명을 받들어 따르는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유하가 덕에 어두워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거늘 하늘이 마침내 왕에게 용맹과 지혜를 내려주시어 만방을 표정하여 우왕(禹王)이 옛날 행하셨던 것을 잇게 하시니, 이는 그 떳떳함을 따라서 천명을 받들어 순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有夏昏德, 民墜塗炭, 天乃錫王勇智, 表正萬邦, 纘禹舊服, 玆率厥典, 奉若天命.〕"라고 한 표현에서 따온 것이다.
- 주석 3)세자
- 원문의 '춘위(春闈)'는 봄에 시행하는 과거 시험장을 말하나, 여기에서는 '춘궁(春宮)'과 같은 말로 세자를 가리킨다.
- 주석 4)군신(君臣)을 …… 왜곡하는 것을
- 원문의 '방무(邦誣)'는 군신(君臣)을 거짓으로 속여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례》 〈추관(秋官) 사사(士師)〉에 죄와 사건을 판결한 여덟 가지 성례(成例)인 팔성(八成) 가운데 하나이다.
- 주석 5)편히 쉬게 되니
- 원문의 '식견(息肩)'은 짐을 내려놓고 어깨를 쉰다는 뜻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년에, "정나라 성공이 병을 앓았을 때 자사(子駟)가 진(晉)나라에 식견(息肩)하기를 청하였다.〔鄭成公疾,子駟請息肩於晉.〕" 하였다.
- 주석 6)성탕(成湯)이 ……마음
- 은(殷)나라 왕 성탕(成湯)의 천품은 지극히 어질어 금수(禽獸)까지도 살리려 하였으며, 7년의 큰 가뭄이 있을 때에는 자신이 희생(犧牲)이 되어, 상림(桑林) 들에 나가 비를 빌어서 큰 은택을 백성들에게 입히기도 하였다. 《십팔사략(十八史略)》 은기(殷紀).
- 주석 7)왕망(王莽)
- 한(漢)나라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친정 조카이다. 자는 거군(巨君)이다. 대사마(大司馬)로 선정을 베풀어 인심을 얻었다. 평제(平帝) 때에 안한공(安漢公)이라 불렀고 지위가 더욱 귀해지자, 평제를 시해하고 유자(孺子) 영(嬰)을 세워 섭정(攝政)하고 가황제(假皇帝)라 불렀다. 마침내 한실(漢室)을 찬탈(簒奪)하고 국호(國號)를 신(新)이라 하였다. 뒤에 법령이 까다로워 민심을 잃고 난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광무제(光武帝)에게 패하여 죽었다. 《漢書 卷99 王莽傳》
- 주석 8)육당(陸棠)
- 구산(龜山) 양시(楊時)의 사위로, 그가 구산을 찾아올 적마다 용모가 장중하고 언제나 단정하게 앉아 있어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이에 구산이 사위로 삼았는데 후에 난리를 일으킨 범여위(范汝爲)의 무리가 되었다가 범여위가 패하자 극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朱子書節要講錄刊補 卷3 答楊子直》
- 주석 9)밝게 살피고
- 원문의 '이명(离明)'은 원래 밝은 해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임금에 위에서 밝게 비추는 것을 말한다.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이(离)는 불이 되고 해가 된다.[离爲火, 爲日.]"라고 하였다.
- 주석 10)요수(要囚)
- 요수는 죄인을 심문하여 죄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 주석 11)대론(臺論)
-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공론(公論)을 말한다.
- 주석 12)명교(名敎)
- 명분(名分)을 중시하는 예교(禮敎)를 이르는 말로 흔히 유교(儒敎)를 지칭한다.
- 주석 13)《주자어류(朱子語類)》
- 주자와 제자들의 문답(問答)을 기록하여 모은 책이다. 송(宋)나라 경정(景定) 4년(1263, 이종4)에 여정덕(黎靖德)이 분류, 편집하여 함순(咸淳) 6년(1270, 도종6)에 《주자어류대전(朱子語類大全)》 140권을 간행하였다.
- 주석 14)혹자가 …… 하였습니다
- 《주자어류》 권34 〈논어(論語)16 술이편(述而篇)〉 자위안연왈장(子謂顔淵曰章)에 나온다.
- 주석 15)절의의 …… 하였습니다
- 《주자어류》 권135 〈역대(歷代)2〉 문기원조(問器遠條)에 나온다.
- 주석 16)후한의 …… 하였습니다
- 《주자어류》 권129 〈본조(本朝)3 자국초지희령인물(自國初至煕寧人物)〉에 나오는데, 대본은 원문의 일부 내용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다.
- 주석 17)비록 …… 하였습니다.
- 《주자어류》 권34 〈논어16 술이편〉 자위안연왈장(子謂顔淵曰章)에 나온다.
- 주석 18)홍천경(洪天璟)
- 1553~1632.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군옥(羣玉), 호는 반환・반항당(盤恒堂)이다. 기대승(奇大升)ㆍ이이(李珥)ㆍ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군량의 수집과 수송을 담당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도원수 권율(權慄) 휘하에서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160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하였다.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 주석 19)임회(林檜)
- 1562~1624.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공직(公直), 호는 관해(觀海)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1611년 50세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나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에게 모함을 당하여 곧 사직하였고, 1613년에는 양산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예조 정랑에 복직되었으며,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 경안역(慶安驛)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 주석 20)배절의(排節義)
- 선조(宣祖)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로 화(禍)를 입은 정개청(鄭介淸)이 지은 〈동한절의진송청담설(東漢節義晉宋淸談說)〉을 가리킨다. 그 내용이 절의를 배척한 것이라고 하여서 정철(鄭澈)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아 화를 입었다. 정개청은 본래 서인(西人) 박순(朴淳)의 문인이었으나, 박순이 영의정에서 파직되자, 동인(東人) 이발(李潑)ㆍ정여립과 교분을 맺음으로써 스승을 배반하였다는 비난을 받고는 〈절의청담변(節義淸談辨)〉을 지어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니, 정철 등 서인으로부터 '배절의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 주석 21)조술(祖述)
- '조(祖)'는 조종(祖宗)처럼 높인다는 뜻이요, '술(述)'은 이어서 따른다는 뜻이니 '조술한다'는 말은 높이어 따른다는 말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30장에 "공자는 멀리 요 임금과 순 임금을 조종(祖宗)으로 받들어 계승하고, 가까이로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법도를 드러내 밝혔다.〔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라는 하였다
- 주석 22)유희춘(柳希春)
- 1513~157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이며,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외할아버지 최보(崔溥)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 조성에 기여하였다. 저서에 《미암일기(眉巖日記)》, 《역대요록(歷代要錄)》, 《주자어류훈석(朱子語類訓釋)》, 《시서석의(詩書釋義)》 등이 있다.
- 주석 23)스승
- 원문의 '함장(函丈)'은 선생(先生)이나 장자(長者)가 앉는 자리를 뜻하는 말로, 함연(函筵)이라고도 한다. 제자는 스승의 자리와 한 발[一丈]의 거리를 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 주석 24)회계(回啓)
-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던 일을 말한다.
- 주석 25)국시(國是)
- 국민 전체가 옳다고 인정한 주의(主義)와 시정(施政)의 근본 방침으로 다시 말해, 확정되어 있는 한 나라의 방침을 말한다.
- 주석 26)오구(梧丘)
- 죄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가리킨다. 제 영공(齊靈公)이 사냥갔을 때 무죄한 다섯 장부(丈夫)를 죽여 그들의 머리를 잘라 묻었는데, 그 뒤에 경공(景公)이 오구(梧丘)에서 사냥할 때 꿈에 다섯 장부가 나타나서 무죄함을 호소했다. 경공은 그곳을 파서 다섯 해골을 찾아내어 장사를 잘 지내주었다 한다. 《안자(晏子)》 잡하(雜下).
- 주석 27)동탁(董卓)의 화
- 후한(後漢)의 장군으로, 낙양(洛陽)에 입성하여 소제(少帝)를 폐하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정권을 전횡하였다. 원소(袁紹)가 기병하여 동탁을 토벌하러 나서자, 낙양의 궁묘(宮廟)와 100리에 걸친 지역을 불태우고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으며 스스로 태사(太師)가 된 후에는 횡포가 더욱 심하였는데, 이후 왕윤(王允)과 여포(呂布)에게 살해되었다. 《後漢書 卷72 董卓列傳》
- 주석 28)백안(伯顏)의 …… 청하였으니
- 송(宋) 나라 영종(寧宗)이 아들이 없어서 종실 중에서 제왕 횡(濟王竑)을 양자로 데려왔는데, 그때의 권력 있는 신하 사미원(史彌遠)의 참소로 죄없이 죽고, 다시 다른 종실에서 양자하여 들여서 후에 이종(理宗)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북쪽에서 몽고의 대군이 침입하여 내려오는데 백안(伯顔)은 몽고의 대장이었다. 그의 침략으로 송 나라의 국운은 풍전등화 같았으나, 그때 왕응린이라는 사람이 제왕(濟王)이 무죄하게 죽은 것을 말하고 그를 위하여 입후(立后)할 것을 청하였다.
- 주석 29)당고(黨錮)
-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때 진번(陣蕃)ㆍ이응(李膺) 등 우국지사가 환관(宦官)의 발호를 미워하여 대학생(大學生)들을 거느리고 환관을 공격하니, 환관들이 조정을 반대하는 당인(黨人)이라고 도리어 몰아 이들 자식들을 옥에 가두고 그 사진(仕進)의 길을 막았으며, 영제(靈帝) 때 두무(竇武)ㆍ진번(陣蕃) 등이 환관 등을 죽이려 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그와 뜻을 같이하는 1백여 명과 함께 피살한 사건을 말한다.
- 주석 30)제왕(濟王)
- 송나라 조횡(趙竑)으로, 기왕(沂王) 조병(趙抦)의 후사가 되어 황자(皇子)에 책립되었으나, 사미원(史彌遠)의 농간으로 이종(理宗)이 즉위한 뒤 제왕에 봉해지고 핍박을 당하여 죽었다. 《宋史 卷255 鎮王竑列傳》
- 주석 31)비와 이슬
- 원문의 '우로(雨露)'는 곧 촉촉이 내려 적셔 주는 비와 이슬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임금의 은택(恩澤)에 비유한다. 당나라 고적(高適)의 〈협중으로 가는 이소부와 장사로 가는 왕소부를 보내다〔送李少府貶峽中王少府貶長沙〕〉 시에 "지금은 태평성대 은택이 많아 잠시 이별하는 것이니 주저하지 말게.〔聖代即今多雨露, 暫時分手莫躊躇.〕"라고 하였다.
己亥封事 【宣祖, 三十二年八月初二日, 以前別坐散居時.】
伏以古之帝王, 當濟屯傾否之時, 不謂天意之已回, 而益思其奉若之誠, 不謂人心之已安, 而更盡其慰悅之道. 民有所抱而必使之導達, 然後下無壅閼之情, 冤有可釋而必爲之湔滌, 然後上無感傷之患. 然則不可不通者, 冤鬱之情, 而不可不愼者, 天人之際也. 今我國家否運重亨, 劇寇退遁, 而邊警少弛, 春闈誕祥而慶延宗祊, 則今日之天意, 可謂眷佑矣. 邦誣快辨而臣民胥悅, 鎗病初起而士卒息肩, 則今日之人心, 可謂粗安矣. 天意已回, 人心已安, 而殿下憂勤之念, 一出於惻怛, 恤民隱, 而日下蠲免之令, 懼天災而益勤修省之道, 此政成湯與民, 更始之盛心也. 宜無一民一物之不被其澤, 而獨有橫罹逆亂, 抱冤重泉者, 尙不能昭雪於此時, 則豈非天人之所感, 而聖明之所當惻念者乎. 嗚呼! 頃年, 邦運不淑, 逆賊之變, 出於搢紳之間. 汝立初非放火劫人之賊, 挾王莽欺世之巧, 假陸棠詐善之名, 一國士類, 莫不有知其名見其面者, 而虛懷好善之人, 最爲所誣, 夫豈知窮凶大懟, 至於此極也? 貫盈之罪, 忽出於千萬意慮之外, 一時受欺之士, 莫不心驚骨痛, 悔自己不明之罪, 而自上离明旁燭, 鑑衡自正, 睿念嘗軫於玉石之俱焚, 愼簡益切於要囚之丕蔽, 則豈有含冤抱痛於淸明之下哉? 第以奸臣鄭澈, 以狠愎之資, 懷慘毒之心, 外假謔浪, 內實猜忌, 爲淸議所不容, 常有怏怏之心, 陰伺其隙, 以爲必報之地, 自幸今日可遂吾志, 身爲案問之官, 乃成網打之計. 平日少有睚眥者, 陰嗾浮薄之輩, 非出於疏章, 則必發於臺論, 倘微聖明如天, 一世之忠賢, 必將無遺類矣. 當日之事, 可不寒心哉? 其一時抱枉就死者, 不知其幾何, 以臣等所居一道內之最爲冤痛者言之, 鄭介淸眞踐履實, 德成行尊, 一從程朱之學, 以闡明斯道爲己任. 嘗患湖南之一種士習, 薰染於奸澈, 專務驕虐, 不循義理, 或自托於節義, 而專然曚昧於名敎, 或慕效於淸談, 而實是貪戀於利祿. 顧其歸則俱有害於世敎, 故介淸每以是爲誤一世之害, 恐爲後學之弊, 而及讀朱子語類, 有或引伊川之言, 而晉宋淸談, 因東漢節義, 一激而至此, 朱子曰: "東漢崇尙節義之時, 便自有這箇意思了. 蓋當時節義底人, 便有傲睨一世, 汚濁朝廷之意, 這意思, 便自有高視天下之心, 小間流入於淸談." 又曰: "節義之士, 固非是其位之所當言, 宜足以致禍." 又曰: "後漢名節, 至於末年, 有貴己賤人之弊. 積此不已, 其弊必至於虛浮, 入老莊." 又曰: "晉宋人物, 則雖曰尙淸高, 然箇箇要官職, 這邊一面淸談, 那邊一面招權納貨云云." 因此朱子之說, 以發明晉宋淸談之害, 以救湖南士習之痼弊, 而奸賊惡其平生心術敗露於君子之正見, 陰畜欲殺之心, 而無隙可乘. 及逆變之出, 奸賊指嗾本道無行檢悖妄如洪千璟·林檜輩, 乃於介淸, 所著說上, 任加排字, 目之以排節義, 托以儒生公議, 上疏構陷, 一時名流, 盡入於其疏, 幾爲打盡於一網之中. 而幸賴聖上洞燭情狀, 乃以疏頭十餘人拿來, 將治誣捏之罪, 而澈也嗾臺諫沮之, 反以介淸所著節義說, 請爲嚴刑, 竟死於絶域. 天地間冤痛, 孰加於此乎? 嗚呼! 天旣蒼然而無語, 死者亦不得自明於九原, 臣等請代死者, 釋其著書之旨也. 其書之首曰: "東漢節義, 較以功名, 則其高尙猶可以激頑起懦, 晉宋淸談, 視之謀利, 則其氣岸, 亦足以矯情鎭物"云, 則非訾其眞節義, 而只救其末之弊明矣. 又曰: "源其所始, 皆不知有明德新民之學"云, 則節義者, 卽明德中一事, 明德者, 乃節義之根柢也. 如使人皆知明德, 則臨患難處死生, 知有義而不知有利, 知有君而不知有身, 不期於節義, 而節義之高, 直與日月爭光明矣. 又曰: "獨善於彝倫之外, 自逸於檢防之節, 是衰世之所尙, 而非聖賢中和之道"云, 則中和二字, 萬善具足, 唯堯舜孔孟, 可以當之. 如子而盡爲子之道, 臣而盡爲臣之道, 以至於三綱五常, 莫不各得其當, 而隨處得中, 乃可謂之中和, 是豈捨節義而言之乎? 將此數條而究其旨, 則其所著說, 乃祖述程朱之餘論, 以培壅節義之根本, 而救後世浮虛無實之弊也, 至深且切矣, 而反爲奸賊射影之資, 至於榜示四方, 以惑亂一世之耳目, 可勝痛哉? 嗚呼! 古今天下, 雖有士林之禍, 豈有如今日之慘酷哉? 介淸白首窮經, 晦跡林下, 本與逆賊不相接, 而歲在癸未, 以四書校正郞廳, 同列公座, 始知其面, 而旋以親病先歸, 則其相知之分甚淺, 而適以同僚故,以書相問者, 纔二度, 此不過虛懷見欺之所致, 是則一時士夫不察之公罪也. 其弟大淸, 亦嘗從事於學而行篤孝友, 痛兄非辜, 冀其伸雪, 悲哀服喪, 枯朽將死, 今至十年之久, 凡在瞻聆, 孰不嗚咽而傷痛哉? 臣等自十五六歲時, 嘗受學於表從叔柳希春, 希春以鄭介淸爲涵養功深, 宜後生師表, 勸臣等亟往從之, 臣等遂委己從事於函丈之間, 幾二十餘年. 其所誦說者, 不過小學語孟六經之書, 所講明者, 又只是仁義禮樂天理人欲之辨, 而考其歸趣, 無非爲臣者忠, 爲子者孝而已, 豈敢阿其所好, 欲護已死之師, 而欺罔聖聰哉? 第念師生之義, 根於秉彝之天, 不忍以存亡貳其心, 而妄謂師儒坐黨, 實關於斯文之盛衰治道之汚隆, 故頃在乙未春, 臣等乃敢千里裹足, 訟冤於九重. 自上俯採疏賤之言, 乃以至論下諭, 丁寧凡有血氣者, 莫不聳動感泣, 而第緣當時大臣回啓之辭, 糢糊不明, 遂使聖上好善惡惡之意, 不得昭布於朝野, 厥後廟堂之議, 臺閣之論, 未聞有出血誠擔當期以必定國是者, 人心之愈鬱, 士論之益激, 政在於此也. 嗚呼! 十年而必復者, 天道也, 泯滅而再伸者, 公論也. 頃幸天啓聖心, 洞燭輿情, 其一時被誣竄謫者, 並皆蒙宥, 枉死者, 得以伸雪, 崇秩之褒, 已加於永慶, 而獨於介淸, 尙稽恩典, 豈唯梧丘之目, 不瞑於九原而已? 抑恐羣情堙鬱, 士氣銷鑠, 天地之仁至此, 而不能無憾也. 臣等考諸往牒, 董卓之禍方張, 而識者以解黨錮之禁爲先, 伯顏之亂始熾, 而應麟以立濟王之後爲請, 一二君子之含冤, 似不急於臨敵對壘之日, 而古人之所以必汲汲於此者, 豈不以一人之心, 卽千萬人之心, 而人心之向背, 天命之吉凶, 實有大可畏者而然歟? 咸與維新之日, 固異於臨敵對壘之時, 而茹恨閉骨之魂, 有甚於黨錮濟王之冤, 則今日之急務, 其不在於釋冤枉而慰人心, 慰人心而享天心乎? 此臣等之所以懇懇瀝血不能已者, 非爲死者也, 爲殿下也, 非爲冤枉也, 爲社稷也. 伏願殿下, 特採草野之言, 渙發雨露之澤, 使久鬱之人心, 入地之朽骨, 快覩靑天之白日, 則實扶斯道壽國脈之一大機也. 伏惟殿下, 留神採納焉. 臣等不勝兢惶戰慄之至, 謹昩死以聞.
答略曰: "初非指爲逆賊而鞫之也." 又曰: "大抵是非, 當出於朝廷, 爾等之志雖勤, 不須每煩."



